당신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물음표로 시작해서 말줄임표로 끝나는
마흔 번째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며칠 전 쉼표 뒤에 고개 숙이고 있던
당신의 뒷모습을 엿본 다음부터
내 가슴에 벌 한 마리 벌 두 마리 세 마리…
붕붕붕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라일락향이 머리맡에 자꾸 쏟아져내립니다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여러 개의 형용사를 구사하는
나와 당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능구렁이 몸통처럼 이어지는
붉은 페이지가 점점 늘어나는 그러나
당신이 보내온 수십 통의 편지에는
그 흔한 마침표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기를 바라지 않는 내 마음 같습니다
편지의 양끝을 손으로 돌돌 말아 쥐고 나는
마흔 한 번째 도착할 편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시집〈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
사진 〈Bing Image〉
꽃잎의 배후
김 나 영
멀리서 보았을 때 폭포인 줄 알았다.
마른 계곡 안, 하얀 꽃잎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나무의 뒤로 발길을 옮기자
들뜬 뿌리와, 새까맣게 문드러진 속살과,
땅과 맞닿을 듯 내려앉을 듯 오체투지의 등걸이
계곡과 등산로 난간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난산을 치르는 산모 같다.
이 가파른 능선까지 벚나무는 어떻게 기어올라왔을까.
낮은 꽃가지 가지마다 가쁜 숨 매달고 있다.
몸 낮추면 사방(四方) 수평의 길 열린다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한 다발.
말씀처럼 가슴에 턱 받아 안고 내려오는
어느 하산 길.
- 시집〈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
무 꽃 / 사진 〈Bing Image〉
무 꽃
김 나 영
무꽃이 피어났다, 쓰레기 봉지 안에서
기억상실처럼 하얀 무꽃이 피어났다, 생선가시 사이
불어터진 밥알 사이 시퍼렇게 곧추 세운 꽃대가
안간힘을 다하여 꽃을 밀어올리고 있다.
쓰레기봉지를 묶으려 들자,
밤새 게워놓은 들숨과 날숨이
해서체의 긴 유서(遺書)를 빠르게 써내려간다.
쓰레기봉지 안, 촛농처럼 하얀 무꽃이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
- 시집〈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
사진 〈Bing Image〉
왼손의 쓸모
김 나 영
보통 때는 잘 모른다.
땅에 돈 떨어진 것 발견했을 때
내가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 놓을 때
참다 참다 말 안 듣는 자식 등짝 몇 대 후려칠 때
망설일 것 없이 왼손이 스프링처럼 확 튀어나간다.
아버지 앞에서 오른손 부들부들 떨며 숟가락질 배운 탓에
ㄱ, ㄴ, ㄷ, … 오른손 덜덜 떨며 완곡하게 구부려 쓴 탓에
지금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오른손으로 밥 먹고 살지만
위기가 닥칠 때 맨손으로 버티는 것이 왼손의 근성이다.
유년 시절 한 봉지의 과자를 훔치던 손이 성공했더라면
어느 하산 길 왼손이 나무뿌리 부여잡고 피 흘려주지 않았더라면
내 생의 지도는 극도로 우회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왼손의 쓸모를 수시로 빌려 쓰고 있다.
바느질 할 때, 돈 셀 때, 생선 지느러미 가위질 할 때, 친정 이불장 사이에 봉투 찔러놓고 올 때
왼손이라야 더 날렵하게 끝을 낸다.
상처의 칼집인 왼손이
생활의 현장 속으로 손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십 년 넘게 교육 한번 받지 않은 왼손이.
- 시집〈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
Víkingur Ólafsson – Bach: Concerto in D Minor, BWV 974 - 2. Adag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