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버릇 / 심수자
뚫어놓은 수챗구멍에서 느닷없이 고개 내민 쥐가 웃는다
아차, 지난겨울 잊고 있었던 윗목 고구마 자루를 여니
스르르 끌려 나오는 반세기 전 기억 하나
젖이 모자라 낑낑대던 세 살박이 막내는
한밤중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구마 양손으로 잡고 생쥐처럼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때 벗겨 낸 껍질은 흩어지는 마른 울음 같아서
얼굴 늙어 가며 듬성듬성 생겨난 검버섯
주렁주렁 고구마 매단 넝쿨이 당겨져서
언니 언니 나를 부른다
일찍이 본능의 씨눈을 삼킨 아이는
철든 후에도 자주 손톱을 물어뜯고 하였다
가늠 되지 않던 생의 골짜기에서도 이빨만큼은 언제나 빛났다
빠져나가라고 뚫은 수챗구멍에서
내 눈으로 건너온 쥐는 앞니 유난히 하얀 소설이 되어
갸우뚱 엿보던 나의 비밀을 갉고 있다
- 『술뿔』, 책나무, 2014.
감상 – 쥐버릇이란 말이 사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수챗구멍에 고개를 빠끔 내밀며 이리저리 살피는 쥐 모습은 이전 세대엔 흔한 풍경이다. 심수자 시인의 「쥐버릇」은 새끼 쥐의 호기심, 어른 쥐의 경계심으로도 보이는 이러한 쥐의 버릇에 착악한 제목일 수도 있겠다.
쥐버릇이 사전에 없는 단어임에도 익숙한 느낌을 준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니, ‘지(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 때문이다. 이 속담은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 쓰여 한 번 들인 버릇은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때도 개는 애꿎게 불려 나와 망신당하는 측면이 있지만 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대명사 ‘저(제)’를 지방에 따라 [지], [쥐]로 발음하기에 ‘쥐 버릇 개 못 준다’로 더러 오해하는 경우는 생길 법하다. (쥐 버릇 개 못 주고, 개 버릇 쥐 못 준다고 했으면 쥐도 개도 평등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조금 덜 거 같긴 하다)
이런 면을 두루 고려해서 제목을 정했을 성싶은 「쥐버릇」은 유년의 가난함과 그때의 원체험을 간직하며 성장한 지금의 모습까지 간략하게 줄인 인생사다. 젖을 빠는 대신 고구마 껍질을 벗기던 막내의 이빨이 강하게 각인된 이래 이후 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상징으로 시인은 그녀의 이빨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언니 언니” 부르는 인연의 힘이 작용하는 가운데, 막내는 막내대로 자신의 삶을 가꾸고, 그때의 한 식구이자 관찰자인 시인은 그 기억을 이렇듯 남기는 일을 하고 있으니 쥐버릇 아닌 제 버릇대로 다들 오늘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다.
“수챗구멍에서/ 내 눈으로 건너온 쥐”가 “하얀 소설”이 되는 결구도 인상적이다. ‘소설’의 한자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시의 묘미가 더 생긴 듯하다. 하얀 눈의 소설(素雪), 시끄럽게 떠도는 소문의 소설(騷說), 만들어 낸 이야기의 소설(小說)이 다 낯설기도 하고 또 그럴듯하기도 해서 시인이 못다 말한 “나의 비밀”에 자기 방식으로 동참하는 기분을 낼 수 있으니까.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