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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7th, 2007
오랜만에 만난 안락하고 깔끔한 야간열차였던 탓일까.
정말 더이상은 자라고 강요해도 잘 수 없을만큼 푹 잤다 싶을 때 눈이 빠딱 뜨였다.
허걱 o_O;;
건너편 이층 침대에서 옆으로 섬세한 s라인을 자랑하며 누워있는 남자 메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이사람, 내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쿨쿨 잠자고 있는 나를 내내 쳐다보고 있었던거야??
주섬주섬 가방 속의 시계를 찾았다. 7시 20분.
에엣? 7시 27분 도착인데;; 아이고야, 김양아. 파리 온다고 긴장의 끈을 너무 놓아주셨구나.
건너편 메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파리 다 온건가요??"
"네"란 짧은 외마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사람이 나를 그렇게도 애처롭게 쳐다봤던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아가씨, 이러다 파리 다 와서 일어나겠구만. 쯧쯧."
좀 깨워주시지 그러셨어요,, 애꿎은 불평을 입 안 한가득 물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다행히 텅텅 빈 화장실에서 여유있게 고양이 세수를 푸우-푸우-하고 돌아왔더니
3층의 아메리칸 시스터 앤드 브라더는 아직도 한밤중이다.
나보다 더한 것들이 있었군.
깨울까 하다가 뭐 어차피 파리가 종착역인데 황당한 경험 좀 겪어보쇼~ 싶었다.
히힛. 건너편 메이트, 당신도 이런 심보였던 거요??
장장 10시간을 내리 달려 온 기차가 파리 오스텔리츠역에 도착,
여기저기서 먼저 내리려는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에 그제서야 깨어난 3층 남매의 끊이지 않는
s**t, f**k, d**n it 타령을 꽤 유쾌한 배경 사운드로 들어가며 플랫폼에 발을 내딛었다.
하아- 오스텔리츠역에서 맞는 상쾌한 이 아침!
호스텔에 배낭만 띡-하니 던져두고 길을 나섰다.
유레일 패스의 마지막 날까지 본전을 싸그리 뽑아주기 위한 베르사이유행으로
파리 일정의 첫 스타트를 끊어 볼까나아~?!
Paris (09:02) → Versailles (RER)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무료 티켓을 받고 베르사이유행 RER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하철과 다른 RER을 타야하는데,, 어떤 RER이 베르사이유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거다.
지금까지 지하철 타면서 행선지 몰라 고생하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뭘 타야할지 여전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베르사이유행으로 갈 것으로 대략 88% 정도 확신이 가는 RER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걸 타야하나, 말아야하나 -_ -??
에라 모르겠다, 타고 보자.
정차와 동시에 사람들이 분주히 타기 시작하고 쫄쫄쫄 따라 탄 김양.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싶어(타기 전이 아닌 타고나서 확인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방금 전 나보다 먼저 탄 한 남자의 어깨를 톡 건드려 "excuse me" 한마디를 살며시 던졌다.
"요거 베르사이유 가요??"
@_@?? 이 남자, 내 눈을 꿈뻑꿈뻑 쳐다본다.
역시 못 알아 듣는 게 분명해. 프랑스인들 영어 안된다더니;;
"베르사이유! 베르사이유! 고고??"
"위위" 간댄다, 퓌유- 한시름 덜었다. 히힛.
아무튼 쌩유 쌩유~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에엣? 내 바로 앞자리에 턱하니 앉아버리는 이 남자.
-_ -; 분명히 동양여인네의 매력에 빠져들고 싶은게야. 눈치 코치하면 나도 200단이라고.
하핫, 약간 어색한 미소를 날리고 부스럭부스럭 가방에서 아침 대용 머핀을 꺼내들었다.
앞에 남잔 관심도 없이 우물우물 머핀을 입안 한가득 물고 있는데 잠자코 앉아있던 이 남자,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영어도 아니고 불어로-_ -
밥 먹을 땐 개도 안건드린다는데 순간 짜증이 인 나는 "no French, so sorry"를 연발했다.
곧바로 이어진 이 남자의 대답, "no English, sorry too"
간단한 기초 영단어는 구사했지만 원활한 의사소통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의사소통의 언어장벽은 다 이런 식으로 생겨나기 마련인게지,
다시한번 실감을 하고 머핀 먹기에 재 집중.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머핀 두개를 꿀꺽 다 해치우고 꽤 만족스럽게 공복감을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드는 생각.
참, 어디서 내리는거지??
살며시 앞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베르사이유 어디서 내리는지 알아요??"
기본 영단어 밖에 모르는 이 남자에게 몇 번을 찬찬히 물어 본 후에야
"아~ 베르사이유요? 걱정마요, 나랑 같이 내리면 되니까. 거기가 우리 집이거든요~"라고
짐짓 미루어 추측되는 대답을 어렵게 들을 수 있었다.
이로써 내리는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 뿌듯뿌듯!
김양, 여행 40일이 다 되어가다보니 행선지 찾아가는 데도 도가 트이는 듯. 으쓱으쓱.
영어와 불어로 오고가며 말이 한번 트고 나니 이 남자의 호기심은 극적으로 발동하기 시작.
"파리는 언제 왔어요? 혼자 여행해요? 얼마나 더 묵을거에요?" 등등등 끊임이 없다.
불어는 간단한 인사말 외엔 도통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은 나보다
그래도 기본 영단어는 아는 이 남자가 훨씬 낫다.
아예 자리를 내 옆으로 옮겨 앉은 이 남자, 남은 시간 가이드북의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최선을 다해
"여기가 샹젤리제 거리고요, 여긴 에펠탑, 그리고 음,, 여기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데고,, 또,,"
쉬지도 않고 하나라도 더 설명해주려고 오진 애를 쓴다.
"이제 내려요~"
간단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갈길을 가려는데 이리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이 남자.
오잉?? 왜에??
자기가 친히 베르사이유궁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시겠단다.
하핫, 뭐 영 내키진 않았지만 좋으시다면 그러시유. 이 사람 좀 친절이 과하시네;;;
역에서 내려 10분여를 걸어야 한다고 하던데 덕분에 길 찾아 헤맬 고생없이 편히 가겠고나. 메흐씨!
가는 길, 슈퍼를 지나쳐가며 잠시 담배 하나 사가지고 나와도 되느냐고 묻기에
하이고, 예예~ 그러시유 하는 맘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슈퍼 앞에서 서있으려니
어느새 나온 이 남자가 담배를 내 눈 앞에서 흔들며 "이건 내꺼, 이건 당신꺼"라며
비타민C가 든 플라스틱 통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오홋, 생각지 못했던 남정네의 마일드한 센스! 으흠, 좋아좋아. -ㅁ -v~
파리에 도착해 처음 만난 파리지앵의 과도한 친절에 부담이 되면서도
왠지 앞으로의 파리 일정이 순탄할 것이라고 예고라도 해주는 것 같아 싫지만은 않았음은 인정!
베르사이유궁 정문에 들어서
"너무 고마워요, 이제 정말 잘 가요~ 안녕! 빠이빠이!"
검지와 중지에 키스마크라도 찍어 날려줄 요량으로 고마움을 가득 담아 전한 내 인사는
순식간에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인포메이션 센타에 들러 궁전 내부 지도도 받고 티켓도 끊으려고 했는데
작별인사도 들은 체 만 체하고 무작정 정원으로 이끌고 가는 이 남자.
아니, 왜왜왜??
길만 알려주고 서로 깔끔하게 say good-bye할 줄 알았던 25살의 이 남자,
오늘 나를 완전히 가이드해 줄 태세다. -_ -;;
"아,,아니에요, 난 정원보다 궁전 내부를 보고 싶어요. 그냥 가세요,
전 혼자 다니는게 편해요. 이젠 그 쪽 없어도 괜찮아요."
입에 거품을 물고 애걸복걸하듯 설명했지만 이 남자가 들을리 만무하고 이해할리 만무하지.
"내가 여기 자주와서 아는데 정원을 봐야되요, 정원이 최고라고요, 어서와요!"
내가 정원으로 들어가는 꼴을 봐야 돌아가시겠다는 겁니까, 예??? 정말 그런겁니까????
결국 정원으로 끌려갔다ㅠ
그래,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기 전에 정원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뙤약볕 아래서 힘들게 정원을 둘러보는 것보다 선선한 오전에 둘러보고
오후엔 궁 내부를 보는 것이 낫겠어. 거의 체념에 가까웠다.
오늘 하루 계획이 첫 시작부터 무참히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 같아 살짝 기분이 망가져 있었는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갑을 꺼내들고 무작정 티켓을 사는 이 남자.
뭐야, 너도 같이 들어가겠다고?
내 뒤로도 길게 늘어선 줄, 앞에선 빨리 표사고 들어가주면 좋겠다는 강요의 눈빛으로 쏘아보는
직원의 눈빛에 그만 무대포 이 남자에게 바락바락 대들 생각조차도 못하고 10유로 한 장을 꺼내들었다.
내 몫의 티켓을 사려니까 벌써 산 티켓 두 장 중 한 장을 건네주는 이 녀석.
무려 7유로. 아니, 왜왜왜? 이러지마, 이러면 내가 무언가 해줘야 할 것 같자놔;;;
10유로를 아무리 받으라고 떠밀어 주어도 강력히 거부한다.
"오늘은 내가 가이드 해줄게! 나만 잘 따라와! 어서~" 찡긋^-^"
여기쯤 되자 이젠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 되어버렸음을 직감하고ㅠ
조용히 주머니 속에 10유로를 구겨 넣었다.
아..싸.. 오늘 땡 잡았다ㅠ 그런데 나 기분은 왜 이리 암울한거냐,,
100% 타의에 의해 구해진 전혀 예상치 못한 동행이라니, 여전히 머리는 심난, 마음은 산만.
아무래도 오늘 나,, 7유로치의 정원 산책을 이 놈과 해야하는 거야??ㅠ
아아아아- 믿을 수 없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여~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야야양~~~
이렇게 달갑지 않은 그와의 정원 산책은 이른 오전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돠돠돠돠돠돠돠.
하늘의 푸른 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던 아폴론의 샘
내 마음도 잔잔한 이 샘처럼 평정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때의 나,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잉잉-대는 걱정거리 하나에 도무지 종을 잡을 수 없었단 말이다.
"하아- 이 남자 대체 어떻게 떼어놓나,,,"
베르사이유궁 정원의 조깅족들.
매일 아침 이런 멋진 정원에서의 조깅이라면 나도 주저없이 동참할지니.
아- 바로 귀에 이어폰만 꽂고 달리고 싶어롸.
내 옆의 막무가내 이 남자만 아니었어도ㅠ흑흑.
RER 안에서의 excuse me, 한 마디가 이런 상상도 못할 결과를 만들어내다니;;;
지지리 운도 없고 복도 없지, 그간 시달린 거 파리에선 좀 맘 편히 지내보나~싶었더니만,
아, 신이시여, 당신의 기가막힌 타이밍에 눈물이 나겄습니다아.
무슨 정원이 이렇게도 넓을 수 있을까.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했던 왕가의 정원이라지만 가히 상상의 범위를 그것도 후울쩍 뛰어 넘는다.
정원 여기저기서 자전거타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대운하, 소운하를 불문하고 보트타는 사람들,
잔디밭 위에서의 피크닉, 벤치 위에서의 편안한 휴식,,, 정말이지 황홀한 아침이로소이다!
혼자였더라면 나 또한 조용히 산책하며 벤치에도 잠시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자유로운 상상을
즐겼을 터인데 내 옆의 이 남자 오늘 나에게 대하시는 폼이 좀처럼 떨어져 나갈 것 같지가 않다.
파리에 오자마자 지대로 낚였구나, 김민영. shit.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말에 전달되었던 것일까,
말 끝마다 퉁명스러움이 묻어나고 말았다.
"참, 이름도 모르네, 이름이 뭐야?"
"민영"
"미뇽?"
우이씨-_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사촌쯤 되는 혹은 도롱뇽 동생쯤 되는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다닛!
"아니, 민영이라고, 민!영!"
"이야- 대단한데, 불어로 미뇽이 무슨 뜻인지 알아? 귀엽다는 말이야- 이름 한번 귀여운데? 미뇽~~"
-_ -됐다 됐어, 그래 미뇽해 미뇽.
"아~ 난 이디(Hedi)야~"
"뭐? 이티?" 한참을 배꼽을 잡고 웃었더랬다, ㅋㅋㅋㅋ김양~ 간만의 나이스샷!
지금껏 혼자서 정원이나 공원 산책할 땐 얘기할 상대가 없어 심심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는데
오히려 애타게 빌어왔던 소원이 이루어지니 귀찮아지기 시작하는 나의 지독한 이기심.
대체 웬 변덕이냔 말이지.
결국 오후 6시 이전에는 이 놈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냥 오늘 하루는 이디님에게 적선하는 셈 치기로 맘을 먹었다.
결국 베르사이유궁전은 바로 코 앞에 두고도 구경 한 번 제대로 못하게 됐다.
그러니 별 수 있나,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인생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거지.
피하지 못할 바에야 즐길지어다!
말도 안통하는데 손짓발짓 다 해가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놀이가 시작됐다.
"참, 아까 집에 가는 길이라고 안했어? 밤새 일해?"
"아니, 어제가 토요일이었잖아, 디스코텍 가서 밤새 부볐어~ 나 주말마다 가~ 훗"
"아, 그래;;" 뭐야, 이 자식, 쌩 날라리 아냐~!? -_ -;;
"오늘 6시부터 일하러 가, 6시까진 시간 있으니까 여유 있어." (찡긋") 우웩ㅠ
"밤새 춤 췄다면서 안 피곤해?"
"응~전혀! 나도 산책하는거 되게 좋아해~ 있다가 밥도 같이 먹자!" 얘, 뭐지,,,?? 바,,,밥도??
"안 졸려?" 제발 집에나 가서 주무셔 줄래?
"하나도 안졸려~" 니가 에너자이저냐, 밤새 부비고도 힘이 남아나게;;
신기한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대화는 점점 스무스한 경지로 올라서고 있었다.
아폴론의 샘을 지나 소운하를 삥 둘러 대운하의 끝에 도달한 이 지점에 서면
저 멀리 베르사이유궁전이 나와 함께 마주한다.
아,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여, 내 여기서 당신을 바라보노니,,
그리움을 종이 비행기로 접어 날려보내 드리오리다.
대화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기도 하지.
정원의 반쯤 거닐며 둘러보았을 즈음 스믈스믈 이디에 대한 편안한 감정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퉁퉁 내뱉는 퉁명스러움에 가득찼던 내 대답은 이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린지 오래고,
어느새 이디의 말 끝마다 "하하하하~" 꺄르르 배꼽을 잡고 웃으며 맞장구를 치기까지 한다.
다리가 슬슬 아파와 귀여운 엄살을 부렸더니 "벤치에 앉았다 갈래?"
바로 자리를 마련해주며 휴대폰을 꺼내더니만 최신곡이라며 노래까지 틀어주는 녀석.
"내가 요즘 거의 매일 듣다시피하는 곡인데 이거 들으면서 쉬어. 기분전환엔 최고라니까!"
비록 노래는 디스코텍에서나 들을 법한 빠른 템포의 약간의 소음성 짙은 댄스곡이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 한참을 듣고 있었더랬다.
사실 밤새 부빈 것도 모자라 다시 노래에 맞춰 몸을 살짝살짝 흔드는 이디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ㅋ
4개월 전 무심히 남자친구를 버리고 미국으로 휑-하니 날아가버린 이디의 전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이야기,
요리를 만들며 큼지막한 손 여기저기에 생겨난 상처들에 관한 이야기,
우린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일까.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사이에 두고 공감의 다리가 슬며시 들어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애초 이 자식 뭐야, 대체 어디서 굴러 들어온 호박이야! 싶었는데 점점 괜찮은 녀석이다 싶다.
"다시 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엉덩이를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홍색 대리석과 반암으로 지어진 그랑 뜨리아농.
루이 14세가 후궁 맹뜨농 부인과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과연 이런 곳에서라면 사랑의 밀회는 더욱더 진하고 달콤했을 것 같다.
정원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이젠 뭘 하지,,,?" 사실 슬슬 궁 내부 관람이 하고 싶었더랬다. 이디를 한번 떠보기로 했다.
"나 이제 베르사이유궁 구경할래. 넌 이제 집에 가-" 아쉽긴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본 목적이니까.
"난 거기 가봤단말야. 그냥 우리 얘기하면서 산책이나 하자." 지만 보면 다야, 난 언제 보라고~!! -_ -+
전 유럽을 지배했던 절대 왕권기의 지주, 태양왕 루이 14세의 막강함을 떨치며 만들어진
호화로운 예술의 결정체, 궁내 화려함의 극치를 느껴보기 위한 야침한 계획은 과연 이루어 질 것인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리로는 지금이라도 볼 준비가 되어있는데 마음이 타협을 보고 있었다.
왜에, 그냥 이렇게 얘기하면서 정원 산책하는 것도 좋잖아~ 정 안되면 내일 또 오면 되지 뭐.
오늘은 이디랑 보내는 것도 여행 중 잊지못할 추억이 될거야.
헉-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갈대라더니, 김양! 너 이디한테 넘어간거냐?? -_ -;;
결국 베르사이유궁 내부 관람을 포기하고 꿩 아니면 닭이라고 다른 거라도 보자 싶어
정원 내에 있는 그랑 뜨리아농과 쁘띠 뜨리아농으로 이디를 이끌었다.
헉- 9유로. 이번엔 내가 이디 것까지 내주고 싶었는데엣;; 대략 압박이군.
살짝 부담스런 입장료에 입구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고심하고 있는데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걸 알아차린 이디가 "들어가고 싶어?" 말문을 연다.
입장료 얘긴 차마 못하고 "글쎄, 모르겠어"랬더니
"자, 그럼 대답해 봐, 여기 들어가면 행복할 것 같애? are you happy? you go here?"
살짝 당황스런 질문에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으니 앞의 직원으로부터 덥썩 티켓 두 장을 사버린다.
헉- 또또또! 이디가 티켓을 샀다!
이젠 너무 불편해져서 강력히 이번엔 내가 내겠노라고 했더니 나보다 훨씬 강하게 나오는 이 녀석.
남자 직원을 앞에두고 돈이 왔다갔다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려니까 앞에 남자 직원이 피식 웃는다.
하하하- 사랑 싸움도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나도 다 알죠~라는 모든 걸 다 간파했다는 듯한 눈빛.
그,,그런게 아니라고요;;;
직원이 거슬러주는 잔돈 2유로를 받아들고 20유로를 손에 쥐어주었더니 둘다 가져가 버리란다.
이젠 잔돈까지 퍼준다, 이디.
why? why? why? 몇 번이고 물어봐도 이젠 좀 그만 why why하라고.
그냥 받으란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you are happy, i am happy, too. okay?"
어쩜 이렇게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음 가는대로 다 퍼줄 수 있을까.
화끈한 파리지앵의 즐기는 듯한 삶의 방식을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지금껏 매번 감정 이전에 머리를 앞세웠던, 표현 앞에 미숙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가장 좋아했다는 쁘띠 뜨리아농
금은보화 호화찬란한 궁정생활에 지친 왕비에겐
서민적인 시골 분위기의 이곳 정원이 꽤나 맘에 들었던가 보다.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왕비의 시골마을 초입에 들어서며 상대적인 입장차이를 절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서민은 화려한 궁정생활을 꿈꾸고,
부족할 것 없는 왕비는 소소한 서민적 삶을 꿈꾸고.
당신은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베르사이유궁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왕비를 위해 이런 걸 다 만들어 줄 정도면,, 대체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는거야!!??
나도 모르게 테니스가 치고 싶어졌다.
쁘띠 뜨리아농을 거즘 다 돌았을 때 은근슬쩍 내 허리에 팔을 감싸는 이디.
헉-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싫지만은 않다. 내심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뭐 나쁠 거 있나, 나도 기분좋고 너도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
혼자만의 여행중 가끔씩은 간절히 받아보고팠던 것 아니었던가.
짜식, 너도 남자구나 ㅎㅁㅎ;;
알고보니 핑크빛의 로맨틱한 그랑 뜨리아농도 티켓으로 관람이 가능했다.
덕분에 베르사이유궁전을 보지 못한 한을 어느정도 풀게 됐다.
실제 비교한다면 메인 궁전와 비교 자체가 불가하겠지만 그랑 뜨리아농 자체도 꽤 멋졌다.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방 여기저기를 가이드해주는 이디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you are a princess, i am a prince!" 서스럼없이 떠들어대는 이디의 농담에 웃어도가며
어느덧 3시가 됐다.
꾸물꾸물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오려는지 청명했던 아침과 달리 먹구름이 한가득 끼어 있었다.
아이스크림 좋아한다는 말을 잊지않고 어디론가로 데려가더니 아이스크림을 떡-하니 사다주는 이디.
"넌 안 먹어?"
"난 단거 안 좋아해"
"그래도 나만 먹기 미안하잖아-"
"난 여기 담배가 있잖아~" 담배 한 개피를 톡" 꺼내든다.
사정없이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의 황홀한 맛에 정신 못차리고 흥분하며 먹어대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자꾸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쳐다보는 녀석 탓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겠다.
"하하하-너 애기같애, 어쩜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하하"
이젠 완전 데이트 모드다;;
"나 조금 있다 일 가려면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좋은 데가 있어"
베르사이유궁전을 뜨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정문 밖으로 나섰다.
나서자마자 파리떼처럼 환장하고 몰려드는 호객상들.
몇 걸음 걷다 멈춰 선 이디가 한 호객상을 향해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이리 와보라는 제스쳐를 취하더니
뭘 하나 사드는데 대체 뭘 사나 싶더니만 금세 금빛 에펠탑 열쇠고리를 내 눈 앞에서 흔들어댄다.
"기념이야, 가져"
이건 정말 꿈인지 생신지;;; 오늘 완전 스페셜 서비스가 따로 없다.
"여행하느라 많이 못 먹어 봤을테지? 잘 아는 아시안 레스토랑 집이 있어, 거기로 가자~"
배려한다고 맘 써주는 건 고마운데, 이디야, 난 파리까지 와서 아시안 푸드쯤 안먹어도 된다고ㅜ
그런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 고맙다고만 하고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저패니즈 레스토랑, 차이나 레스토랑, 샹하이 레스토랑 중에 가고 싶은데 있어?"
뭐야, 코리안 레스토랑도 아니자네;;
쏴아-
아직 목적지까지 도착도 못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내리기 시작했다.
맘이 급해진 이디는 가까운 차이나 레스토랑엘 가자며 날 이끌었다.
그런데, closed. ㅋㅋ
다음 그 옆에 샹하이도 오늘은 휴무, 그 옆에 저패니즈 또한 문은 열렸는데 주인이 없다-_ -ㅋ
오늘 아시안 멤버즈 모임이라도 있으십니까??
"안되겠다, 미안하게 됐네, 아시안 푸드 사주고 싶었는데, 그냥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가야겠다,,"
안타까워하는 이디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 속마음은 지화자 좋고~쾌재를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
크림소스가 곁들여진 닭고기에 프렌치 프라이 그리고 하이네켄 비어
와우! 나 쓰러지시겠돠. 눈물나게 맛있다ㅠ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통통 튀는 듯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살짝 구운 연어 메뉴를 시킨 이디가 먹어보라며 떡-하니 자기 걸 떼어다가 접시 위에 놓아준다.
이 녀석, 매너하며 센스가 100점이요, 여자 맘은 왜 이리 잘 아는고.
"I'm crazy about you, you are my baby"
이런 말을 듣고도 식도에 닭고기가 걸리지 않은게 의심스러울 따름.
구구절절 늘어놓는 달콤한 말이 듣기 좋은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렸던 탓일까.
만난지 반나절도 안 된 이디와 이런 편안함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건 정말 연인사이가 따로 없다.
사실 이 때 나, 슬슬 녹아들고 있었다. 이디에게 홀랑 넘어가고 있었다, 담벼락의 능구렁이처럼.
전화번호를 건넨다.
"이거 내 전화번호야, 파리에 있는동안 전화하면 언제든지 어디든 같이 가줄게"
오후 내내 내비친 에프터 신청에 과감히 거절의사를 건넨 뒤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을 내비치는 이디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받아들었다.
꼭 연락하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맘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니 이렇게 단 하루만에 누군가가 좋아질 수 있는거야??
여자는 선물 공세에 약하다고 하더니 그런 비열한 여인상이 바로 나였군;;
아침만 해도 오늘 재수 옴 붙었다 하던건 어디로 간거야, 너!
하긴 파리에서 재미있게 보내보는 것도 좋잖아??
왔다리 갔다리 하는 마음에 신경이 쓰여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지금쯤 가야할 것 같은데 비가 안그치네, 우산도 없고 어떡하지,,"
계산을 치르고 나온 이디가 웃옷을 벗어 재끼더니 머리 위로 들더니만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한다.
품 속에 붙다시피 달라붙어 역까지 내달리기 시작한 우리.
파리까지 와서 영화 클래식의 한 장면을 찍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역에 도착하자 오전에 노선을 몰라 고생했던 내가 떠올랐는지 직접 큼지막한 노선도를 구해다가는
"지금 우리가 있는 역이 바로 여기야,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내리면 되는거야, 알겠지?"
몇 번이고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주기에 여념없는 남자친구같은 이디.
그러면서 내가 있는 호스텔 주변이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며 거듭 주의를 주는 아빠같은 녀석.
개찰구를 통과해 뒤를 돌아서 이디에게 "안녕!"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이디 역시 손을 흔든다. "전화해, 잘가!"
Versailles (RER, 17:18) → Paris
파리에서의 잊지못할 추억을 선사해 준 멋쟁이 친구녀석, 이디.
잘 살고 있어?
꺼지지 않는 배에 연신 꺼억꺼억 해대며 푹-꺼진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 일정을 세웠다.
가이드북 옆에 살며시 놓인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에 시선 한 번, 두 번, 세 번을 주어가며.
그나저나 큰일이다, 하루 즐긴 걸로 만족해야 할텐데 자꾸만 마음이 기울고 있다.
안돼 안돼 안돼, 김양.
이러다 더 큰 일이 벌어지는 수가 있다고,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버리게 된다구.
사람 하나 만나는데 있어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하게 따지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와 달리
그냥 맘에 들면 만나고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이디의 모습이 사실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까다롭고 복잡한 줄다리기 심리전도 다 필요없이 그저 좋을대로 표현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쿨함.
오늘 하루 상대방의 마음이 무엇이었든 정말이지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더없는 사랑을 받았다는
황홀한 느낌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사람이라는 거 역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때 그 감정이 통하는가 보다.
아쉽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헤어지기 전에 볼에 뽀뽀라도 하고 오는건데.
감정 표현에 너무나도 인색한 김양이 이렇게 후회할 날도 오는구나.
파리에서의 첫날 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그 설레임에 잠이 쉬이 오지 않는 밤이다.
첫댓글 와우~이런게 여행의 묘미인가 봐요 ^^
동감입니다^-^
와... 한편의 드라마? 소설.... 그런것을 읽는듯한 느낌이었어요... 제가 마치 앤님이 된듯...상상속에 홀랑 빠져있었다는^^;ㅋㅋ 정말 좋은 추억거리 만드시고 오셨네요.!! 부럽습니다..ㅎㅎㅎㅎㅎㅎ 아 다음 후기가...기대되네요^^
파리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정말 잊지못할 추억을 선사받는 행운을 누릴줄이야;;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오~~ 저도 담엔 혼자여행 가서 님 처럼 영화 한편과 추억 남기고 와야 겠어요..^^ 잼나게 잘 읽었네요..제꺼랑은 비교가 안될 만큼..^^;
ㅎㅁㅎ 혼자 여행가셔도 이번에 다녀오신 여행때처럼 편한 동행이 생기는 건 아녜요??
와우~~ 정말 왜 저에겐 저런 일이 안생겼던 건지..... ㅋㅋ
나중에 대박터지려고 하나본데요? 또 가셔야죠~어리버리공주님^-^
우와~~ 지대로 영화한편 찍으신거 같은데요.. ㅎㅎ
정말이지 이번 유럽여행 중 최고의 추억들 중 하나였을만큼 좋았음에 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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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ㅁ -ㅋ 저도 이러고선 남은 일정 계속 외~로웠답니다-_ㅠ
오랜만에 오셨어요! 무지 기다렸거든요~ ^ㅇ^ 가끔, 종종, 대시하시는 남자분들이 꽤 있으신 것 같아요. 저는 과연..+_+;;;
여자로 혼자서 여행다니다보니까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_ -;; 에스쁘와르님도 혼자 계획중이시면 단단히 각오하셔야할 듯ㅋ
이글 읽으니까 저도 막 기대되는걸요!혼자가면 저런일이 저에게도 생길까요?영화에요 영화정말..ㅋㅋ
생깁니다, 생겨요 ㅎㅁㅎ!!
잘하셨어요 하루쯤은 이렇게 낯선곳에서 낯선사람과 함께하는것도 좋잖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