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김구와 이청천 사이의 알력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감정 대립이 발생하였고, 특히 일제의 강력한 지원 중지와 폐쇄 압력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폐쇄되자, 김구는 자신을 추종하던 학생들을 1934년 8월 남경에 있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선생도 김구의 아들 김인․ 안중근의 조카 안춘생 등과 함께 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들이었다. 군사 특파단에 들어가 임정의 광복군 편성 실행 선생을 비롯한 이들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군에서 근무하면서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강력한 항일전의 수행을 위해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는 군사간부의 양성과 함께 한인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지역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군사 특파단 파견이었다. 군사 특파단 파견은 임정이 1939년 기강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해 11월 조성환을 단장으로 황학수․나태섭․이준식 등과 청년공작원 노복선․서파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이 서안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은 화북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20여 만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서안에 도착한 군사특파단은 서안성에 판사처(현지 사무소)를 설치한 뒤,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 장교들에게 광복군 참여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에서 제대한 인원들을 군사특파단에 참여시켰다. 그리하여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선생과 안춘생․조인제 등도 이때 군사특파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생이 참여한 군사특파단의 주요 임무는 서안에 군사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화북지역 한인교포들을 대상으로 선전 초모 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선생을 비롯한 안춘생․김광․서파․이영여 등 군사특파단원들은 1940년 6월 본격적인 공작활동에 들어갔다. 즉 이들은 중국군 제2전구 사령관 염석산의 협조를 받아, 관할 구역인 산서성 임분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광복군 자원자를 끌어 모아라.” 광복군 병력을 확대 이들의 활동은 1940년 11월 서안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선생을 비롯한 군사특파단의 활동은 광복군을 창설하는 실질적인 준비작업이자, 광복군의 활동기반을 개척한 것이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총사령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곧 지대편성에 들어갔다. 지대 편성은 그 해 11월 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지대는 총사령부에 직속된 예하 단위부대로 편성되었다. 총사령부에서 원래 제1․제2․제3지대로 편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1941년 1월 한국청년 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5지대가 됨으로써 4개 지대가 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단위부대로 4개 지대의 편제를 갖추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군사특파단원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제1지대에 편성되었는데, 지대장은 이준식이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동창인 안춘생․조인제 등과 함께 중국군을 나와 제1지대의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우선 선생은 지대장 이준식을 비롯한 제1지대 간부들과 함께 1941년 3월 산서성 지역으로 가서 병력 확대를 위한 초모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초모 활동은 1942년 4월 지대의 개편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은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행동9개 준승]을 계기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으로 인해 지대의 전면적인 개편과 조정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4개 지대는 모두 해체되고, 제1․제2․제3지대로 새롭게 짜여졌다. 우선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계기로 개편되었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화북진출이 있은 뒤, 중국군사위원회는 잔류 대원들을 광복군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총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이 되었다. 제1지대는 지대본부와 2개구대(區隊)로 편제되었는데, 지대본부는 중경에, 호북성 노하구와 절강성 금화에 각각의 구대를 설치하였다. 제1지대는 편제상 중경 지대본부를 비롯하여 2개의 구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구대는 3개의 분대를 가지고 있었다. 대원수는 지대본부 42명, 제1구대 27명, 제2구대 23명 모두 92명 정도였다. 일본군 탈출한 조선인 학도병들, 중국 내 광복군 찾아와 제2지대는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한다는 결정이 난 뒤, 종전의 제1․제2․제5지대를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들은 1939년말 이래 서안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세력들이었다. 때문에 지대본부와 3개 구대가 모두 서안시 두곡에 주둔하였다. 총사령부 참모장 이범석과 참모 이복원이 지대장과 부지대장을, 그리고 제1지대 간부였던 선생은 제2구대장, 안춘생은 제1구대장, 노복선은 제3구대장을 맡았다. 성립시 제2지대 대원은 대략 80여명 정도였다. 제2지대는 중경에 머물러 있던 이범석이 1942년 10월 취임하면서 지휘체제가 확립되었다. 선생을 비롯 제2지대 간부들과 대원들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산서성 일대 하남성․하북성 지역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초모한 인원들을 중국군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의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제7분교에서 훈련시켜 공작원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5월경 제2지대 병력은 250여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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