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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부터 내린 비는 21일 새벽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로 변했다, 중국 단동에 내린(560m)폭우로 압록강이 범람하는 것을 열심히 취재했는데 낡은 컴퓨터가 고장이 나 볼로그에 올릴 수가 없었다. 컴퓨터를 고치는데 4일이 걸려고 출장� 다녀와 지금 올린다. 그러나 그동안 언론에서 취재하지 못한 부분과 잘못된 정보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지금의 글도 정보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잘못된 보도란 압록강이 범람하� 신의주시와 단동시가 물바다가 되고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내용이다. 22일 아침 모방송사 기자를, 단동시 5호 파문(홍수를 막는 패문) 현장에서 만났다. 녹화 내용을 들어보니 “단동은 제방시절이 잘되어 있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신의주는 엄청난 피해가 예상 된다”는 내용으로 뉴스를 녹화 하고 있었다. 모TV 방송사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들이 압록강의 범람으로 단동시와 신의주가 물바다가 되었다고 보도하였을 것이다.
22일 새벽 5호 파문 앞에서 모 TV방송사에서 홍수취재 뉴스를 녹화하고 있었다. 그는 신의주에 토담으로 된 제방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화교 무역상에게 신의주에 전화를 부탁했다. 신의주 현지 소식은 강물의 피해가 아니라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침수 된 지역들이 있다고 한다.
북한 신의주나 중국단동이 물바다가 된 것은 외각에서 일어난 것이지 시내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동시내는 제방시설이 잘되어 있어 85만 명이 살고 있는 제방시설 안쪽은 평상시처럼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다만 강변에 살고 있는 소수의 가옥과 압록강 강 복판에 있는 섬들에 주거하는 사람들은 대피 소동이 있어 났다. 강변 가옥들은 1m 이하의 수위 로 1층에 물이 들어왔고 강변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는 차단되었다.
단동의 행정구역은 단동시내 3구(진흥구, 원보구 진안구) 와 동강시, 봉성시, 관전만족자치현, 지역을 포함하여 인구 255만명, 총 면적 15.222km2 로서, 충청북도 두 배 정도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 언론은 대개 인구 85만명이 살고 있는 단동시를 단동으로 보고, 중국 언론이 말하는 단동의 홍수 피해는 봉성시와 관전만족자치현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정전과 통신 두절, 가옥과 농경지 침수 등의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단동시내는 홍수 당일에도 일상적인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다만 3일-4일 동안 강변도로 청소를 위하여 부분적 도로 통행 제한과 수돗물 공급이 하루 3번 나누어 해주는 단수 조치가 있었을 뿐이다.
단동시내는 압록강 강변에 낮은 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멘트 제방을 쌓고 파문을 만들어, 평상시에는 6차선 4차선 2차선으로 강변과 통하는 도로로 사용한다. 일제 때 만든 파문이 12개 이고, 도시의 발전에 따로 지금은 45개의 파문이 있다. 파문에는 고유번호가 있고 파문은 철재와 목재로 조립식으로 되어있다 파문의 두께는 50cm-60cm정도로 수압의 정도(지역이 낮은 곳과 높은 곳)에 따라 차이가 있다. 목재의 두께는 10cm이상 되는 것으로 양쪽에 조립하고 그 속에 비닐을 치고 모래를 넣는 방식으로 조립하고 파문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바깥쪽에서 모래포대를 쌓아 올린다.
신의주도 마찬가지다. 신의주 시내는 일제 때 흙으로 제방을 만들었다. 신의주 시내는 중국 쪽 보다 지형이 3m 정도 더 낮은 지역이지만 이번 홍수 때 압록강에 범람한 물이 신의주 시내로 밀려들지는 않았다. 만일 압록강에 범람한 물이 제방을 넘었다면 신의주에는 대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주 시내에는 배수 시절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내린 폭우의 빗물이 빠지지 않아 침수되는 곳은 많았다.
북한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하도와 황금평 등의 섬들과 신의주 제방 밖에 있는 강변의 주택과 농경지, 의주군 일 때는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한다.
ㅎㅎ 10년전 중국에서 구입한 낡은 컴인데 수명이 다 되어가나 봅니다. 한족 기사가 4일 동안 수리했는데도 신통치 않네요. 특종기사도 놓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