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처녀 해순이의 상경기 2
농삿일도 예전처럼 잘 안되자 해순이는
모든 일들에 대해 시들해진다
아침 일찍 들에 나가 비닐하우스 기둥을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과수며 채소밭을
돌려본 후 마을 중앙에 있는 공회당으로
총총 걸음 한다
어제밤에 못 본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드라마를 다시 보기 위해서다
일일 연속극인 드라마는 을메나 슬프고
재미난지 하여튼 방영되는 저녁 8시에는
온 마을이 조용해지고 심지어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마을 공회당은 넓직한 큰방으로 대형 흑백
텔레비전이 방 북쪽 끝에 놓여 있고
오른쪽벽에 있는 철제 캐비넽안에 마을
방송장비가 촌스럽게 놓여 있다
방에 들어서자 이미 연속극은 시작되었고
많은 여자들이 모여 훌쩍대고 있다
‘훌쩍 훌쩍 히이잉---’ 울다 울다 코가
막혀 치마에 실컷 코를 푸는 아낙네, 울다 울다
하도 기가 막혀 냉수 한사발에 얼음 꽉꽉
채워 단숨에 삼키는 아낙네, 슬퍼 가슴이 터질까봐
앞저고리 주름만 꽉 잡고 있는 아낙네,
별별 모습이 드라마이상 진풍경이다
‘애인과 혼전 임신한 후 애인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겨 버리고, 몰래 낳아 혼자 키운 아들도
남자 부모에게 들켜 빼앗겨 버리고, 아들 보고싶어
찾아간 서울집 골목, 학교에서 늦게 왔다고
자신의 아들을 대문밖에서 벌 세우는 광경에
앞에 나서지 못하고 골목에서만 슬피 우는
한많은 억울한 여주인공 미워도 다시 한번‘
해순이도 으찌나 슬픈지 눈시울이 벌써 뻘개져
충열되고 습관적으로 코딱지를 심하게 판다
시커먼 왕코딱지가 새끼손가락에 끌려 나오자
코안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아니 저럴려고 사랑하나?
진짜 미친 짓이다 바보같은 여자‘
라고 평가절하해 보았지만 생각대로 머리가
잘 인정해 주지 않는다
기분도 울적하지 연속극도 울적하지
오늘은 도대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에이! 오늘은 정말 재수 옴붙은 날이다
밭일도 대충 손 봤것다 읍내에 영화 구경하러
가야겠다‘
해순이는 드라마가 끝나자 제일 먼저 나와
문앞에 세워 놓은 모패드를 타고 읍내로
눈썹 휘날리도록 줄행랑친다
조그마한 시골 읍내에는 남쪽 구석진 곳에
작고 허름한 목조 영화관이 하나 있다
관람객이 별로 없다 보니 농삿일이 바쁜
계절에는 휴관하고 또한 싸구려 필름이 서울
에서 제 때에 공급 안되면 휴관, 하루에
3번만 상영한다. 오전에는 공치고 오후에
3번이다.
값도 싸고 2편 연속 상영이라 마을 놈팽이들
백수들, 골빈 처녀 총각 둥이들이 많이
보러 온다
해순이는 모패드를 영화관앞에 세워 놓고
영화 프로를 보니 모두 자기가 평소 넘 좋아
하는 영화들 일색이다
오후 2시-4시 뽕2, 정사
오후 6시-8시 애마부인, 하녀
오후 10시-12시 뽕2, 하녀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이다. 어디 가서
죽치다가 오면 되겠지
근처 다방에 들어가 커피 한잔 시켜 놓고
구석진 곳에서 소파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도 정말 죽여 준다
‘ 미워도 다시 한번, 동백 아가씨, 정,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은 눈맞춤,
등등 오늘 영화 분위기와 딱 맞다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식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일어나 근처 영화관으로
달려간다
이왕 볼려면 아주 좋은 위치의 자리를
선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20분 먼저 입장했건만 좋은
자리는 씨벌년놈들이 다 차지했고
가장자리 중간 정도에 한 좌석이 남아있다
영화관안은 매케한 담배연기와 여인들의
싸구려 지분냄새로 꾸리꾸리하다
스크린에는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새마을 노래가 나오며 여기저기 농촌에서
마을길 넓히기, 소득 증대 사업, 그리고
집채만한 무등산 수박이 클로즈업 된다
모두 농사 지어 성공했다는 뉴스이다
그것을 보니 해순이 더욱 더 속상혀진다
‘아니 저년놈들은 대가리에 다이아몬드
박았나 우찌 올해 농사 다 망했다 하던데
지네들만 잘됐다고 떠드냐‘
‘비엉신들 꼴깝 빠드득 하다 숨넘어 가라’
보기 싫어 눈을 감아 버린다
곧 이어 예고편 ‘ 옹달샘, 바람난 과부’가
방영되고 본격적으로 본영화가 상영된다
애마 부인
주연 : 평강이, 온달이, 참이, 보라...
감독 : 쌀쌀이
영화가 시작되자 갑자기 실내가 씨끌법적
여기저기서 반기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박자를 맞추듯 ‘짝짝’ 껌씹는 소리가 뒤따른다
자리도 잡고 편안해진 해순이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 글쎄 모두 쌍쌍,
자기 혼자만 싱글이다
‘아니 저 잡년 잡놈들은 일도 안하냐?
허구헌날 영화만 보러온다냐?
씨발 개잡년들! 가랑이를 잡아 읍내 한복판
에서 찢어 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년들,
저 개잡놈들! 잘난 고추를 몽땅 뿌리채
뽑아 나이롱실에 꿰어 말려 오뎅꼬치나
해먹어도 분이 안 풀릴 새끼들
갑자기 혼자인 것이 너무 억울해 온갖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욕들이 ‘술술’
막걸리 마시듯 잘도 나온다
좀 야한 장면이 나와 신경 쓰고 볼려면
과자 먹느라 부스럭대는 소리. 눈치코치
시도때도 없이 주둥이 맞추느라 둘이서
사탕 빨아먹듯 ‘쪽쪽’ 빨아대는 소리에
정신이 산만해져 집중이 안된다
또한 베드신 장면이 나와 침도 못 생키고
보았는데 남년 주인공들이 옷을 벗고
침대로 가는 순간 ‘찌지직’ 하면서 필름이
끊어져 버린다
5분 있다 다시 이어지지만 그 장면은 이미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서역으로 간 이후이다
화가 나고 억울도 해 가슴이 터질 직전.
눈에 쌍심지를 있는대로 세우고 참고
있는데 어디서 날아 왔는지 모르는
반쯤 먹은 사이다캔이 머리에 맞고 치마로
떨어져 쏟아져 버린다
뒤를 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누가 그랬는지
알수가 없고 사이다를 털려고 엉덩이를
들려니 무언가 잡는 것이 있다
아뿔사! 껌이 치마와 의자에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