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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려면 '빨간 십자'다. 적십자(the Red Cross)와 빨간 십자(red cross)가 같은 것 아닌가 하겠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다르다. 자, 이제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이 이야기는 좀 유명한 일화로부터 시작한다.
빨간 십자의 유래
▲ 1859년 솔페리노의 뒤낭
때는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인 때는 1859년, 무대는 한창 통일 전쟁 중이던 북부 이탈리아 솔페리노Solferiono, 주인공은 스위스 제네바의 사업가 앙리 뒤낭Henri Dunant.
사업차 이곳에 왔던 뒤낭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버려진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의 주검을 보았다. 일단 사업은 뒤로 미루고 구호활동에 참가했다. 나중에 이때의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 이란 책으로 썼다. 뒤낭은 이 책에서 두 가지 제안을 했다.
1.전쟁 부상자들을 돕는 민간인 자원봉사자 단체를 평화 시에 미리 만들자.
2.전시에는 부상병들과 이들을 돕는 구급요원을 서로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각국 정부가 미리 약속하자.
이렇게 조직된 자원봉사자 단체가 바로 세계 186개 나라에 만들어진 적십자the Red Cross이고, 그 요원들에 대한 불가침의 약속이 194개 나라가 서명한 제네바 협정The Geneva Convention이다.
1863년에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의무부대와 적십자의 자원 봉사자를 식별할 수 있는 엠블럼을 빨간색 십자red cross로 정했다. 하고 많은 표식 중에 왜 하필 빨간색 십자였을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국제적십자운동(International Red Cross and Red Crescent Movement) 창시자인 뒤낭이 스위스 사람으로, 스위스 국기 색을 반대로 하면 하얀 바탕에 빨간 십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흔히 듣는 궁색한 답변이다. 덧붙이자면 옛날부터 전쟁터에서 ‘항복’의 표시로 혹은 ‘비무장이니 공격하지 마시오’라는 표시로 사용했던 ‘하얀 깃발’에 빨간 십자만 그려 넣으면 되니 간편해서 좋다는 것이 국제적십자의 설명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간단하고, 눈에 잘 띄고, 그리기도 쉬운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유럽인들끼리야 별 문제가 없었던 빨간색 십자지만, 십자 형상이 상징하는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다른 민족이나 신자들에겐 못내 아쉬운 로고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십자 표시는 스위스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의 국기에도 사용되는 디자인이다. 그리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랜드, 잉글랜드….왜 이렇게 많은 나라에서 국기에 십자 표시를 사용할까? 이들 국가는 모두 기독교를 믿는 나라다. 특히, 이런 십자형 국기의 원조 격인 스웨덴 국기의 유래를 알아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왼쪽 위부터 차례로)그리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아이슬란드 영국 핀란드 국기
십자군 원정 때였다. 바이킹 군대가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하는데 하느님이 기독교신자인 자신들을 ‘보우(保佑)하기’ 위해 푸른 하늘에 금색 십자가를 띄웠다는 것. 그러니, 십자=십자군 원정=기독교를 떠올리는 것은 무슬림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 국기라 하더라도 그것이 십자 모양이라면 무슬림에겐 거부감을 줄 수 밖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든 것은 당시 이슬람의 맏형 오스만 투르크 제국(Ottoman Turk Empire;1299~1922년)이었다. 무슬림들에겐 거부감을 일으키는 십자 대신 이슬람 신앙의 상징인 초승달을 이용해 ‘빨간색 초승달(赤新月red crescent)’ 로고를 19세기 말에 쓰기 시작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인지라 1929년에 초승달 모양도 적십자의 앰블럼으로 채택해 33개 이슬람권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다.
불교 국가나 힌두교 국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별 다른 이견을 내놓지 않았지만 단 한 나라는 십자 모양도 초승달 모양도 거부해 국제연맹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일까? 바로 이스라엘.
▲ 적십자, 적신월,적수정(crystal)
유대인들은 민족의 영웅 다윗을 상징하는 별(Magen David Adom)을 엠블럼으로 사용하겠다고 주장했다. 다른 많은 논란이 있었다. 여타 국가들과는 아무런 공통 요소가 없는 다윗의 별이라? 국제적십자는 절충안으로 조금은 비슷하게 생기고, 철자 C로 시작하는 마름모꼴의 ‘수정crystal’을 나머지 국가들을 위한 제3의 공식 엠블럼에 추가해 이스라엘에 가입할 것을 설득했다. 이렇게 국제적십자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IFRC) 엠블럼이 세 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할 이스라엘도 아니다. 이스라엘 민간 구호기구는 국제적십자연맹에 소속은 돼있지만 십자 상징 대신 Magen David Adom (MDA; 다윗의 별)을 사용한다, 이렇게.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적십자 상징과 친근해진 우리들, 혹시 내가 좋은 뜻으로 이 상징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병원 같은 곳에? 불행히도 빨간색 십자 로고는 다음의 몇 가지 예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1)군대 의료 인력이나 장비
2)전상자 치료시설
3)군목이나 종군 사제
4)국제적십자연맹(International Committee of Red Cross;ICRC)이나 그 산하 185개 회원국 적십자; 이 경우에는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텍스트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며 그 예외사항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사진 1은 네모난 상자를 얹은 것 같다고 일명 박스카로 불린 군용 구급차다. 빨간 십자는 적십자가 아니라 1)번 군대 의료인력이나 장비에 해당한다.
사진 2는 한국전쟁 동안 부산에 있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SRCFH)여성 근무자 유니폼이다. 이들은 자원 민간인들로 군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자와 옷 깃에 계급장 대신에 아무런 표식이 없는 빨간 십자 상징을 달았다. 야전병원에서 전상자 구호활동을 하는 민간인 역시 불가침 대상이었다. 2) 전상자의 치료 시설에 해당한다(서울, 전쟁기념관 소장자료).
사진 3은 한국전쟁 동안 덴마크 정부 의료지원단이 한국에 파견했던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다. 수술실과 방사선 촬영실 입원실을 갖춘 이 병원선은 외과병원 기능을 했고 귀국 길에는 부상병들을 본국으로도 수송했다. 전상자 구호활동을 하는 병원선으로 불가침의 대상이었다. 역시 2) 전상자의 치료 시설에 해당한다(서울, 전쟁기념관 소장 자료).
그럼 이 사진은?
수영장이나 해변에서 만나는 구급 요원 표시는 위 사항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불법적인 것 아닐까?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빨간색이 아닌 오렌지 색이다. 그래서 문제 없나 보다.
자, 다시 병원의 십자 상징으로 되돌아 갈 차례다.
표시하는 입장에서야 빨간 십자만큼 잘 띄는 것도 없을 것이다. 병원에도 빨간 십자 표시를 해두면 급한 환자들이 쉽게 알아보고 좋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의사는 오래 전에 빨간 십자 상징을 병원에 사용했다가 보건서로부터 '위법사항' 지적을 받고 간판을 내렸다 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는 어떤 상징을 많이 사용할까 살펴 보니 녹색 십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빨간 십자 대신 녹색 십자를 대부분 병-의원에서 사용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이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에서 시작한다.
녹색 십자의 유래
12세기에 십자군 원정 중에 기독교 군대가 점령했던 예루살렘에 성 라자로 교단(Military and Hospitaller Order of St. Lazarus)이 세운 한센병(나병) 구호 병원이 있었는데 교단을 상징하는 십자가(아래 사진 2)를 병원 로고로 썼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나사로)를 살려낸 것은 아주 유명한 얘기다.
병원이란 곳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니 병원의 이념과 나자로의 부활은 아주 잘 어울리는 얘기다. 이 녹색 십자 모양은 이 병원에서 시작해 어느 새 녹색 십자는 의료(health care) 나 목숨을 구하는 일(First Aid) 을 상징하게 됐다. 한참 뒤에는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아예 '구급의 상징'으로 정했다.
▲ (차례대로)녹십자, 성라자로 교단의 십자가 , 임항기 앞 좌석에 있는 구급함 표시, 박지욱 신경과 의원
그렇다면 이 상징도 전세계 공통일까? 빨간 십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웹에서 회교국가들 병원 몇몇을 검색해보면 십자 대신 빨간색/녹색 초승달 상징이 많이 보인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십자 표시지만 미묘한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을 잘 알도록.
이렇게 우리가 늘 만나는 아주 하찮은 상징은 이름 그대로 일종의 상징 체계에 속한다. 상징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모른다면 상징이 아니라 그냥 그림일 뿐이다. 병원이나 적십자에서 사용하는 십자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상징을 본다면 이제 그 속에 숨은 얘기가 슬슬 들려올 것이다. 그러면서 왜 우리 병원은 이 상징을 사용하는지 묻고, 또 답도 찾게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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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병원은 왜 십자로고를 쓸까?"
이제서야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