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디바 패티김
1962년 6월 28일 기억도 생생하다.
“황성옛터” “애수의소야곡”등 불세출의 가수 남인수(南仁樹 본명 강문수(姜文秀)씨가 서울 충무로 2가에 있는 자택하서 타계(他界)했다는 보도가 세상을 아연(啞然)케 했다.
민족(民族)의 극한적(極限的)인 수난 시대를 살아오면서 당시에 울분(鬱憤)으로 응어리진 지식인(知識人), 문화 예술인(文化藝術人)들 사이에 유행(流行)처럼 만연(蔓延)되었던 폐결핵(肺結核)으로 아까운 45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타고난 외모, 미성(美聲)에다 폭발하는 듯 한 발성법(發聲法), 듣는 이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가창력(歌唱力)으로 타의 추격(追擊)을 불허함으로써, 가요 황제(歌謠皇帝), 가요계 기린아(麒麟兒), 100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不世出)의 가수라는 세평(世評)을 받았다.
그리고 5일장으로 조계사(曹溪寺)에서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의 구슬픈 고인의 생전의 목소리 속에 45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홍제동(弘濟洞) 고개를 넘었다.
최초(最初)의 “한국연예협회장(韓國演藝協會葬)”으로 치러진 그의 영결식(永訣式)과 장의행렬(葬儀行列)에 모든 가요계 인사,연예인(演藝人),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수많은 서울시민들로 충무로(忠武路) 상가(喪家)에서부터 태고사(현조계사, 당시 중동고·숙명여중고 앞) 영결식장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여성연예인과 서울의 기생들이 전부 하얀 상복을 입고 홍제동(弘濟洞) 고개까지 장례행열을 따른 것은 두고두고 세인(世人)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가슴에 “남인수(南仁樹)”가 남아 있다.
지금 60대 이후 사람들은 약간 생소한 가수(歌手)일 것이다.
일본 엔카(演歌えんか)의 여왕 미소라히바리(美空ひばり)가 1989년 6월 24일 52세로 타계했다.
일본 엔카(演歌えんか)는 염가(艶歌)라고도 하는데 우리 대중음악인 트로트 뽕짝과 비슷한 대중음악으로 트로트의 정통성을 따지는 논의가 한때 한·일 양국의 음악계에서 벌어진 바가 있었다.
엔카(演歌-艶歌)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미소라히바리(美空)의 타계소식에 당시 일본 언론은 난리가 났었다.
신문마다 호외는 물론,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를 비롯해 간지면에 그녀의 노래 인생 기사로 메웠고, 사설과 칼럼까지 후속 기사가 며칠씩 계속됐다.
방송 역시 전국 도시에서 치러진 장례식(29일장)을 전 TV방송이 동시에 생중계를 하였다.
놀라운 것은 히로히토 일본 천왕이 타계했을 때 보다 미소라히바리(美空)의 장례행열에 참석한 애도 행렬이 더 많이 운집해 국장(國葬)을 방불케 했다고 전했다.
천황의 죽음에 의례적(儀禮的)인 감정을 보였던 일본인들도 미소라 히바리의 사망소식에는 깊이 슬퍼하고 애도 하였다고 한다.
그때 눈길을 끄는 한줄 기사에 “한국의 미소라 히바리”라 할수 있는 이미자(李美子) 가수가 장차 일본의 미소라히바리(美空)처럼 한국에서 과연 어느 정도 국민의 관심을 받을까 궁금하다는
기사가 덧붙고 있었다.
2012.2.13.일 팝가수 휴스턴,
우리에게 “보디가드”로 더 잘 알려져 4억 달러의 돈방석에 앉으면서 “흑진주”의 대명사로 알려진 세계 최고의 팝 가수가 미국의 한 호텔방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2010년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무대를 열광케 한 가수다.
그녀는 항상 마지막 곡으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겠어요(I'll always love you)”를 불렀다고 한다.
아까운 48세 !
어그제 2012.02.16. 신문기사에
패티김 “가수 인생 54년… 할머니 김혜자로 돌아갑니다”
“58년 데뷔… 한국 가요계 디바, 한국가수 첫 카네기홀 공연”
“세상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사람들 기억에 남고 싶어”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멋진 모습으로 스스로 내려오고 싶었다”
“온 천지를 신비로운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석양으로,
즉 가장 아름다운 태양의 모습으로 여러분 기억에 남고 싶어요.”
그리고 그는
“오는 6월부터 1년간 국내외에서 진행될 고별 공연을 끝으로 가수를 은퇴하겠다” 고 말했다.
“무대에 설 때마다 늘 심장이 폭발할 듯 긴장했어요.
차라리 천재지변이 일어나 공연이 취소됐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패티김은 가수를 은퇴한 뒤 유료 공연은 일절 하지 않기로 했지만 자신의 노래가 꼭 필요한 자선과 위로의 자리가 생긴다면 기꺼이 나설 계획이라고 했다.
“둘째딸이 임신 7개월이라 조금 있으면 세 번째 외손주가 태어나요.
이제 평범한 할머니 김혜자(본명)로 돌아가 딸·손자·손녀랑 시간을 많이 보내야죠.
너무나 노래가 부르고 싶으면 거울보고 혼자서 부를 겁니다.”
패티김 !
필자는 시골출신이지만 “패티김” 이름을 안지가 1965년경으로 기억된다.
그는 1959년 가수 페티 페이지(Patti Page)처럼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예명으로 “패티 김”으로 바꾸고 본격 “가인(歌人)”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영원한 현역 가수로’ 불려왔다.
패티김은 한국대중가요계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오만 할만치 당당하였다.
그리고 정말 자랑스럽고 “멋”있었다.
그리고 패티김의 “자존심”처럼 “은퇴선언도” 빨강 구두의 74세 건강한 모습으로 멋있게 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은 음악의 마지막 끝맺음 손짓이 중요하다.
사회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인생의 무대에서 마지막 물러날 때의 때와 장소의 선택이 중요하다.
패티김은
위의 남인수, 미소라히바리, 휴스턴 같은 비운의 스타와는 다르다.
패티김이야 말로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미소로 “아듀”하는 진정 스타이다.
패티김은 정말 멋을 아는 가인(歌人)이다.
우리 속담에
“아깝다 아깝다 할 때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기대수명 늘어났다고 좋아하는 “홍시냄새나는 영감”들
그리고 체면도 부끄럼도 수치도 모르는 정치인 사회지도자들
패티김의 “물러감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패티김은 “김혜자”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청춘 패티김이다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