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m n e s i a ] 0 0. Prologue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몰아치는 빗방울이 가슴께에 부딪혀서, 젖어서, 그렇게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에 젖어 무게를 더해가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웨이브져 있다. 그것이 온 어깨에 흐트러진 감촉이
불쾌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준성이와 소주를 한 잔 마셨던 듯 하다.
코 끝에 바삭거리며 구워지던 삼겹살의 냄새가 남아있다. 마감이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이라며, 준성이가
두툼해진 제 지갑을 열어 웃어보였다. 마셔. 준성이의 입에 물려 타들어가던 담뱃불이 깜빡이며
시야가 흐릿해 졌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눈을 떠 보니 나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그렇게 서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젖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체.
"...하아..."
입 밖으로 새어나온 한숨이 공기중에 하얗게 흩뿌려졌다.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의 끝자락.
쌀쌀해진 날씨에 두 팔을 움츠리며 가슴을 감싸안았다. 그 때였다. 내 눈 끝에 네가 보인 것은.
어두워진 길 위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숙인 내 눈에 비춘 것은 비에 적셔진 구두 한 짝.
수트 바지의 끝자락이 발목을 감쌀 정도로 그는 젖어있었다. 홀리 듯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너,"
검은색. 너의 첫인상은 그랬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녹아 번지는 새까만 블랙.
단 한가지, 너의 왼쪽 눈을 빼고서.
유독 푸르게 반짝이는 네 왼쪽 눈. 그 눈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마땅한 대꾸조차 잊어버린 체.
"...너는 나를 구할 수 있나?"
"...무슨,읍!!!"
순간이었다.
예고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순간 짜릿함이 온 몸을 훑었다. 몸을 적신 물을 타고 흐르 듯이,
손끝까지 전류가 퍼진다. 심장이 놀랐다. 미친듯이 뛴다. 이대로 멈춰 버릴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나는, 정말 내가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순간,
타올랐다. 네 푸른 눈이 타올랐다.
푸른 울렁임이, 목을 조여왔다. 네 눈은, 내 숨통을 움켜쥐었다.
삼켜져버려. 삼켜져버린다.
한 마리의 푸른 짐승이 나를 덮쳤다는 생각이,
희미해져가는 정신의 끝자락을 가득 채웠다.
[ A m n e s i a ] 0 1. Retrograde Amnesia
"...역행성 기억장애?"
"원인은 불분명해.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지. 뇌손상이나 퇴화,쇼크,피로,약물사용,알코올중독...
나아가선 정신신경증적 장애까지."
"...농담이지? 멀쩡하던 애가 왜?"
채인의 책상 위에는 로즈마리 화분이 가득하다. 소란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준성은 초록색을, 소란을 노란색을 선물했고, 거기에 맞추어 채인 스스로가 주황색을 사 두 었다.
세 화분이 옹기종기, 하얀 방 안을 밝힌다.
"뭐, 나로써도 뭐라 할 말이 없네. 설마 싶어 CT까지 촬영 해 봤지만 여전히 원인을 모르겠어.
누군가가 가져가기라도 한 듯 기억 한 조각이 빠져있어...이론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해."
"후,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
준성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늘 단정하고 깨끗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채인의 진료실이
오늘따라 갑갑하기 그지 없다. 소란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왔다는 전화에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제 저녁에 분명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었다. 이 상황이 받아드려지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일반적인 기억은 전혀 손상이 없어. 적어도 자신이 27살 반소란인 건 알고 있지. 번역가고,
쌍둥이 동생이 있고. 어머니는 유명한 작곡가에, 아버지는 현직 오케스트라 지휘자."
"..."
"다만, 어제로부터 딱 일주일 전까지의 기억이 없어."
채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를 걷어올린다.
하얀색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꼽고서.
창밖의 내리쬐는 햇볕은, 가을의 안녕을 고하는 하늘의 마지막 선물인걸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이질적이게만 다가와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당분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 현재로써는 아무런 답이 없다."
준성이 불끈, 주먹을 틀어쥔다.
-
노트북을 뒤져본다. 혹시나 싶어 소휘가 건들이면 용서치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비둘기' 폴더도 열어본다.
수확이 없다. 그렇게 공을 들이던 영국 맥켄리대학의 레포트 번역본이 자취없이 날아가 버렸다.
퇴원을 하자마자 집으로 와 컴퓨터를 켰다. 데려다 주겠다던 준성의 걱정어린 말도 뒤로하고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맙소사. 짜증어린 목소리로 소란이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내일 모래까지 약속드렸던 건데..."
일주일 전에 거의 완성한 번역본을 따로 소장하는 USB에 옮겨 담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USB를 어디 두었는지는 커녕 일주일간 무슨 일을 하며 돌아다녔는지 조차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기억은 다 필요없으니 USB가 어디있는 건지 알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란이 가망없는 소원을 빌어본다.
"어후, 방 꼴이 이게 뭐야. 어제는 연락도 없이 외박하더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산만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엄마 혹시 내가 가지고 다니던 USB 본 적 없어요?"
소란의 엄마는 외모 자체에서 자신이 얼마나 예술적인 성향을 추구하는지 나타나시는 분이신데,
지금 그녀의 모자위에 달려있는 깃털 브로치가 수 없는 예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란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마땅치 않아했다. 눈에 띄는 차림새에 외모까지 받혀주니
늘 그녀에게는 시선이 몰리기 일수였고, 그러한 대중의 관심들은 딸인 자신에게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
사람들은 흔히 소란을 가족들 중 이단아 취급하며 기사를 쓰곤 했다. 선망높은 음악가 집안에,
오직 소란만이 다른 직종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동생인 소휘마저도 이름있는 엔터테이먼트의 연습생.
좀 더 다른 것을 원한게 왜 문제가 되던가. 소란은 다수가 가지는 일반적 편협심을 가장 싫어했다.
"어머, 엄마가 네 개인비서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아니."
"미치겠네, 정말."
흥, 콧방귀를 뀐 소란의 엄마가 방을 다시 나선다. 소란은 침대 위에 머리를 감싸쥐고
털썩, 누워버린다. 허공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것도 지쳐 힘없이 누워만 있다.
"엄마 오늘 늦을거야. 소휘 오면, 저녁 잘 챙겨먹이고 있어."
"...알았어요. 아들만 자식이지, 우리 엄마는."
"어떻게 알았대니? 넌 오늘 외출금지야, 욘석아."
"왜?!"
"왜는 무슨. 다 큰 처녀가 외박이라니. 남사스러워서, 원."
"그건...!!"
"시끄럽다. 엄마 갔다올께~"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울컥해서 일어섰던 소란이 다시 침대에 엎어진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여전히 머릿 속은 하얗다. 원본을 다시 번역하려면 못해도
세 달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장 교수님의 떽떽거리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귀를 쪼는 듯 하다.
나이 마흔 여덟에 아직도 시집을 가지 못 한 노쳐녀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해 대면,
자신은 그 앞에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며 용서를 구해야 겠지.
고개를 세차게 저은 소란이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의자에 걸쳐진 윗도리를 탈탈 털어본다.
나와라, 나와라, 제발 좀 나와라. 입을 벌써 주문을 읊조리고 있다.
어제 비가 왔던가. 윗도리에 아직 젖은 느낌이 남아있다. 손을 넣어 주머니를 뒤집어 본다.
오른 쪽, 왼 쪽.
안 쪽 주머니 속까지 탈탈탈. 뭐 하나라도 나와라, 제발. 울상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러다가, 무언가 손에 잡힌다.
부시럭.
"...어?"
물에 흠뻑 젹셔졌던 듯 말라 비틀어진 메모지 하나. 뭐지? 소란의 얼굴이 갸우뚱한다.
자신은 모르는 메모지 였다. 혹시 기억나지 않는 일주일의 잔재일까?
여리게 구겨진 종이가 찢어지기라도할까 조심스레 메모를 펼쳐본다. 슬쩍 보이는 잉크자국.
번진 글씨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핀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진 글씨가
뒤섞여진 퍼즐조각처럼 잘 풀어지지않아, 한 동안 바라보기만 한다.
양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던 소란. 이내 입을 열어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뱉는다.
"...8...875-4?"
의미없는 네 자리의 숫자. 얼핏보면 8이 3으로 보이기도 하는 게, 확실히 알 아 볼수가 없다.
"...이게무슨...윽!"
순간, 머리 속이 뒤틀린다.
'...를,'
지끈거려오는 머리.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소란이 이마를 움켜쥔다.
'....으러 와.'
심해지는 통증이 괴롭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는데.
그 말소리 조차 지끈거리는 머리때문에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찾으러 와.'
순간 눈 앞을 뒤덮는 푸른색. 그건, 새벽의 해가 뜨는 하늘을 닮은 청아한, 그러나 우울한 아이리쉬 블루.
귓 속가득 비바람이 몰아친다. 빗방울이 쏟아져 내린다. 내린다. 내린다. 온 몸을 덮은 그 비가 두 눈을 적신다.
비가 내린다. 몰아쳐 내린다.
'나를, 찾으러 와.'
덮쳐오는 파란색에 사고가 정지된다.
★ 스릴러...? 추리물...? 아니죠, 로맨스 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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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편기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