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살아오면서 내가 가사도우미를 하리라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대에 다니면서 좋은 성적까지 유지하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또한 얼굴과 몸매도 나쁜 편이 아니라서 꽤 주목을 받고 있던 터였다.
이미 끝나버린 예전의 일이지만, 적어도 그 때, 학교를 다닐 때만큼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좋은 직장을 다니며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랬는데 현재는 3년 경력의 가사도우미가 되었고 두 달 전부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것도 24살의 젊은 여자가 남자 혼자 사는 집의 입주형 가사 도우미로.
일이라지만 이것은 엄연히 남자와의 동거다.
소문이 난다면 나라는 사람, 하나쯤은 가볍게 매장시킬 수도 있는 꽤 큰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계약 조건이 만만찮게 웃기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소진은 가볍게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고무장갑을 벗었다.
그런데 어디에 구멍이라도 낫던 건지 물이 스며들어 손가락 피부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흥, 설거지 밖에 안하는데 왜 이렇게 금세 망가지는 거야.”
정해진 시간처럼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11시가 된다.
내내 그의 옆에 알짱거리면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작은 배려라고나 할까.
그저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저녁식사를 차리고 나면 난 내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내가 슬그머니 기어 나올 땐 그가 잠자리에 든 10시 이후다.
그러다 보니까 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일과를 마치게 된다.
즉, 가사도우미로서 하루의 공식적인 일과는 이렇게 주방 정리를 마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인가 난 이 이후에 잠자는 왕자의 잠자리를 챙겨 주기 시작했다.
아아, 아마 이걸 들키는 순간 난 그 자리에서 해고 일 것이다.
소진이 주방에서 나와 좀 떨어진 맞은 편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주방에서부터 살금 살금 걸어간 후 손잡이도 살며시 돌려 문을 열었다.
거실과 주방, 욕실을 제외하고 방이 총 4개인 집에서 다함의 침실은 유일하게, 그것도 제일 멀리 떨어져 있다.
물론 방 크기도 제일 컸다.
그럼에도 제일 허전했다.
그래, 거실과 똑 닮아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 지도.
방 한 간운데 놓인 침대와 빛이 스며들고 있는 창문이 전부인 방 안.
벽지도 무늬 하나 없는 하얀색이다.
이건 뭐...... 나, 청소하기 쉬우라고 이렇게 해 놓은 건 아닐 테고.
들어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히려 현관 옆의 내가 쓰고 있는 방이 더 사람 방 답고 아늑한 것 같다.
소진은 제법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창문을 닫아걸고 다함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만월의 빛에 하얀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다함은 왠지 오늘따라 더 희고 차갑게 보였다.
“알아요? 내가 모든 걸 감수하고 여기에 사는 이유.”
침대에 살짝 걸터 앉은 소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이라는 듯이 쌔액- 쌔액- 고른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그에 소진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 막고 다함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나긋이 말하는 소진은 여느 때와는 다른,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시간.
아파트로 들어온 다함은 1층 우편함에 꽂혀 있는 한 통의 편지를 빼내 들었다.
단순한 요금 고지서의 중요 내역만 확인 한 후 쓰레기 버리듯 우편함에 집어넣고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최근, 다함은 알게 모르게 이런 식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이라는 것은 다함이 자신의 이름 앞으로 온 우편물을 집으로 가는 길이면서도 우편함에 두고 가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어차피 소진이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다함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일부러 짤랑거리는 소리는 내부에 울리며 20층의 버튼을 눌렀다.
이 근처에서 내로라하는 이 아파트는 내가 고등학생 때 받아서 그 때부터 살게 된 집이다.
입주한 시기는 아마 1학년 입학식을 한 직후였었나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출가해도 좋을 나이라고?
하,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이유다.
단지 자기네 세 식구만이 오순도순 살고 싶었을 뿐이면서.
내가 진실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한 것은 대충 7살쯤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친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보다 영문도 모른 채 찬밥 신세가 된 것이 더 서러웠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남자아이가 밤마다 이불자락을 붙잡고 울 정도로 말이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입양을 하지 말던가.
아님 아이를 낳지 말던가......
어릴 때 받았던 그 철저한 남의 자식 취급은 커가면서도 계속되었고, 덕분에 난 이렇게 삐뚤어 질대로 삐뚤어진 남자로 자라고 말았다.
술, 담배는 10대에 기본으로 시작했고 예절을 알아도 지키지 않는다.
덧붙여 지금은 유명한 바람둥이다.
바람둥이는 얼굴이 워낙 좋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 한 번 놀다 헤어지기 딱 좋은 헤픈 여자들 밖에 없지만.
아, 간혹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여자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그 중엔 돈 많은 여자들도 꽤 많아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카드를 던져 주고 가는 여자들도 있다.
일을 안 해도 먹고 살만하게 되고, 나와 그들 양쪽 다 나름대로 즐기고.
일종의 win-win 전략이랄까.
현관문 구멍에 꽂은 열쇠가 돌아가자 금속을 때리는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함은 때 묻은 열쇠를 청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는 오른손으로 문을 열었다.
강소진이 있다는 건 알지만 초인종은 잘 누르게 되질 않는다.
9년 동안 몸에 베인 습관이니까.
“시원하다......?”
커다란 집에선 냉기가 불어 나왔지만 미묘하게 미지근한 바람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보나마나 에어컨 틀어 놓고 창문 열어 놨겠지.”
빛이 들지 않아 다른 곳 보단 어두운 복도를 지나 거실로 가자 원목마루에 누워 있는 소진을 발견했다.
무릎 옆에 개켜 놓은 상당한 양의 빨래 더미들과 미처 개키지 못한 것들.
그리고 활짝 열려 있는 발코니 창문.
다함은 소파를 힐끗 보고는 구석에 올려놓은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일에 지쳐 잠든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단순한 식곤증일지도 모른다.
“비빔밥 냄새. 하아, 환기보단 설거지를 먼저 하지.”
그릇을 갖다 놓으러 주방에 들어간 겸 콜라도 마시고 나온 다함이 소진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엄청난 기세로 나부끼는 소진의 머리칼에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다함의 머리칼도 만만찮게 흩날리고 있었다.
소진에게 손을 뻗던 다함은 잠시 그대로 멈추고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 있으면서도 올려다보지 않은 하늘은 어제보다 높고 파랗게 펼쳐져 있다.
가을이 온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른 생각이다.
바람도 후덥지근하고 집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푹푹 찌는 더위에 등허리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온 것도 푹푹 찌는 날의 한여름 밤이었다.
멈추어 있던 손이 다시 움직여 소진의 이마에 덮인 머리칼을 옆으로 넘겼다.
얼굴도, 성격도, 생각도 거의 모든 게 나와 비슷한 여자.
언제나 내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여자.
내가 바라보게 되는 여자.
그렇지만 계약 조건을 무슨 똥으로 알고 있다.
연신 웃으면서 끄덕이더니만.
“쳇, 이 간댕이 부은 여자야. 너 때문에 밤마다 미쳐버릴 지경이라구.”
다함이 볼 멘 목소리로 소진의 양 볼을 쭉- 잡아 당겼다.
소진은 그럼에도 깨어나지 않고 작게 신음하며 통증을 호소할 뿐이었다.
첫댓글 꺜ㅋㅋ다음얘기궁그매요 ㅋㅋㅋㅋ빨리 꼬고꼬고
꺜- 첫 댓글! 감사합니다^^
역시남자들이란...그간자는척한거였군..ㅋ
그런 거였습니다ㅋㅋㅋ 댓글 감사합니다^^
ㅋㅋㅋ 1편부터 보고 있는데..ㅎㅎㅎ 담편이 계속 기대 되네욤ㅎ
재밌게 읽으시는 것 같아 기분 좋네요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