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앞에서'
김남주 (1946~1994)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 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나는 오지 않았다 상원아
쓰러져 누운 오월 곁으로 네 곁으로
나는 그렇게는 올 수 없었다
승리와 패배의 절정에서 웃을 수 있었던
오 나의 자랑 상원아
나는 오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
나는 네 주검 앞에 올 수가 없었다
그따위 짓은 네가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
1980년 5월 남도(南道) 빛고을 광주를 피로 물들인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와 민주를 외쳤던 광주민중항쟁의
한 지도적 인물로서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에서 산화한 윤상원.
'남민전' 사건으로 십 년을 복역하고 나온 김남주 시인은
사랑하는 벗의 묘지를 찾아
사자(死者)와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 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시인이 '오, 나의 자랑 상원'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혹은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가 아니다.
시인이 맨주먹 빈손으로 벗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다.
시인은 벗에게 나지막이 부탁한다.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들불을 밤의 노동자를,
그리고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인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나에게 다오."
<下略>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 정연복(1957~ )
-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 졸업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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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尹祥源, 1950년 9월 30일 (1950년 음력 8월 19일)[1] - 1980년 5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활약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윤개원도 있다.
단기 4283년(서기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나
임곡국민학교, 북성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
1978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1979년에 들불야학 1기에 일반 사회를 가르치며 참여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총상으로 밝혀졌다.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힌 뒤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눕혀져 있던 윤상원에게 떨어지면서
윤상원의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됐다.[2]
1978년 12월 27일에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이를 모티브로 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첫댓글 ◇김상윤 고문 약력
△전남 장성 출생 △광주일고·전남대 졸업 △녹두서점 대표 △광주비엔날레 실무 책임 △윤상원기념사업회·지역문화교류재단 설립 △광주문화도시협의회 설립
전남 강진 출생의 김종률 작곡가는 전남대학교 재학 시절 5·18을 경험한다. 80년 5월 21일, 금남로에서 집단 발포로 40~50명이 사망했다. 김 씨는 상무관 앞에 놓인 수십 개의 관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 때 만든 노래가 '검은 리본 달았지'다.
1982년, 민중가요의 효시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한다. 당시 운암동에 살던 황석영 소설가는 광주에서 문화운동 하던 사람들 10여명을 불러 모았다. 예술로 5·18 2주기를 기념하고자 윤상원 열사와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소재로 한 노래극(미니 뮤지컬)을 만들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개사하고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연주소리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거실 유리창을 담요로 막은 후 소형 카세트 녹음기에 공테이프를 넣어 녹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