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향우회

몇년 전 유명 개그맨이자 방송인 모씨가 썼던 ‘나의 아버지’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우리 집의 성주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생전 말대꾸 한 번 못 해보고 사셨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밥을 먹을 때에도 우리 집에서는 늘 남자가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아이들, 여자의 차례로 먹고는 했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남자 중심의 사고를 하셨다.” 이 글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문제의 방송인이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가는 엽기적인 CCTV 영상으로 세간에 떠들썩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렇게 아내를 다루라고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성주’였던 아버지, 밥 먹는 것도 남자 먼저 여자 나중의 원칙을 지켰던 아버지, 어머니에게 말대꾸 한 번 안하도록 훈련(?)시킨 아버지의 자장에서 아들은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일취월장(?)을 이룬다. 별로 안 좋은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관계일 것이다. 사이가 좋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고 그보다는 ‘웬수’로 지내는 경우가 더 흔하며, 살가운 쪽보다는 데면데면한 경우가 백 배는 더 많고, 아버지를 몸살나도록 넘어서고 싶어하나 결국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자신에서 아버지를 발견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좀 벗어나서 얘기하면 딸도 비슷하다. 아버지같은 사람 죽어도 안만나던 여자들이 꼭 제 아버지 같은 남자들에게 빠져 죽네 사네 하는 경우 많이 봤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의 얘기다. 곁에 없는 아버지, 일찍 떠나버린 아버지들은 넘어설 수도 없고 닮을 수도 없다. 롤모델도 웬수도 될 수 없다. 그저 그리움의 대상이거나 부재(不在)의 아쉬움이 끝없이 솟아나는 샘터로만 남는다. 눈으로 그릴 뿐 손에 잡히지 않으며 마음으로는 애틋하나 돌이키면 뇌리에 남는 풍경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 자취를 따라 이미 수십년 전 과거에 안착해 있던 아버지의 인생을 복원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찾아 삼만리’를 걷는다고 하면. 김창희 전 동아일보 기자가 두껍게 내놓은 (한울)라는 책을 보면 그 느낌을 싱그럽고도 생생하게 담아볼 수 있다. 저자의 아버지는 1966년 저자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반세기에 육박하는 세월이 흐른 지난 2009년 저자는 집안에서 먼지 쌓인 박스를 발견한다. 박스 안에는 상상도 못했던 아버지의 삶의 흔적들, 당시 귀해던 카메라로 찍어 놓았던 필름들과 아버지의 수첩과 깨알같은 기록들이 오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박스 속 잡동사니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필름 현상을 통해 선명해져 가는 사진처럼 저자의 마음의 눈을 자극했고 박스에서 피어오르는 퀴퀴한 먼지는 아버지의 냄새로 영혼의 후각을 건드렸다. 저자는 이 박스 속 물건들을 알뜰히 챙겨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괴나리 봇짐을 싼다. 평안도 출신의 기독교인 청년이 해방을 맞고 월남하여 치렀던 삶의 무게, 그리고 그 와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조우, 충청도 계룡산 자락에서 그리고 남쪽바다 푸른 물 보이던 통영의 언덕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냈던 세월, 그리고 저자를 이 세상에 내놓게 되는 역사적인 (저자에게는 그야말로 역사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머니와의 만남과 관련된 호기심 넘치는 추억, 그 모든 여정을 저자는 줄기차게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롭게 치러 낸다. 저자 자신에게도 인상 깊었겠지만 나에게도 각별했던 장면 하나를 꼽아 보면 이렇다. 저자는 아버지의 상자 속 기록을 좇아 아버지가 근무했던 반세기 전의 학교를 찾아 나섰고 아버지의 옛 제자를 만나게 된다. 물론 아버지의 옛 제자래야 저자보다 훨씬 나이 들어 이제 인생의 해가 많이 기운 노인이었겠으나. 노인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훌륭하고 각별한 교사였다. 그런데 저자는 “대화 중에 이따금씩 말을 끊고 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순간에는 “웃는 모습에 아버지 모습이 있네요!”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노인이 갑자기 말을 끊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이야기를 내뱉는다. “아버지만 못해유.” 아버지를 찾아 나선 아들에게 노인은 아버지의 기억의 뼈대 위에 튼실한 살을 붙일 수 있는 목격자였지만 이 노인에게도 느닷없이 찾아온 옛 은사의 아들은 자신이 지닌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였던 것이다. 노인은 세월 고개를 힘겹게 넘어온 아들에게 아버지를 투사했고 자신에게 자상했던 교사에 대한 고마움의 추억을 저 깊은 속으로부터 박박 긁어 올렸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앞뒤 가리지 않은 저 말이 튀어나온 것이 아닐까. “아버지보다 못하다니께유.” . 이 짤막한 장면과 그 속의 한 마디에서 저자는 “아버지의 자취를 따라가는 작업이 결국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증언한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바로 역사 탐구의 의미가 된다. 역사란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이면서 결국 오늘의 모습을 따라잡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전인권과 이적이 목놓아 노래한 것처럼 지나간 것은 결코 우리의 오늘과 무관하지 않고 지나가버렸다고 그 의미까지 삭감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외국에 비해 우리 나라 역사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특히 부족한 것은 개인사, 생활사의 영역이라고 여긴다. 왕조 몇 개와 그 왕들의 계보와 업적, 정치적 사건들과 재난과 전쟁으로 이어진 것들만을 ‘역사’로 파악하는 건 바다 위에서 항로만 따라 항해하는 주제에 바다의 넓고 깊음을 이해했노라 자부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우리 주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역사들이 숨쉬고 웃고 떠들고 술도 마시며 살아가고, 또 시들어가고 있는지를 이 는 친절하고도 날카롭게, 담담하면서도 흥미롭게 말해 주고 있다. 한국인들의 20세기만큼 드라마틱한 역사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식민지를 겪고 분단과 마주하고 전쟁에 짓밟히고 독재에 짓눌리다 떨쳐 일어나 그를 거꾸러뜨렸지만 또 다른 독재 앞에서 눈동자를 굴리기도 했고 그 와중에 하면 된다 배워야 산다 부르짖으며 악으로 깡으로 일해 세계 최빈국을 세계 십몇대 무역 대국으로 키우기도 했고 이제는 다시 삶의 본원적 위기를 고민하는 처지에 놓이기까지. 바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 어찌 역사가 아니랴. 이 점을 가르쳐 준 에 감사한다.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간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책임을 고백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자신있게 권해 드린다. 역사는 지나갔지만 떠난 것이 아니고 쟁쟁한 위인들의 삶만으로 그득한 위인전도 아니며 거창한 이론과 지식으로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친 성채도 아니다. 에서 역사를 찾아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한 번 부모님께 여쭤 보자. "그때 뭐하셨어요? 어땠어요? 어떤 기분이셨어요?" 그 답이 역사일 수 있다. 글쓴이 김형민<img src='https://t1.daumcdn.net/cafeattach/19Sgo/b48bbe620fe476ea6be283543cabec32e072f933' class="txc-image" /><img src='https://t1.daumcdn.net/cafeattach/19Sgo/cca71780351220040ba6f0ba766741df9efb2c24' class="txc-im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