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7-11 / 불안해 하는 헤롯 왕
(눅 9: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눅 9: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눅 9: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눅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제자들의 전도 여행 후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 후에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죄책감으로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헤롯은 비록 왕이라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 후 사람들이 몰려오자, 피곤을 무릅쓰고 제자들과 함께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은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배웁니다.
7~8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가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 예수님의 이름이 유대 전역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퍼지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죽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옛 선지자 중에 하나가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들은 헤롯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왜 심히 당황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헤롯이 당황한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제수씨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남편 헤롯 빌립보 일세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떠나 시아주버니인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였습니다. 제수씨와 시아주버니가 결혼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도 없는 일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였습니다. “옳지 않소! 회개하시오” 이 말을 듣고 헤롯 안티파스는 회개하기보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전남편 헤롯 빌립보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가 야한 춤을 추었습니다. 술에 취한 헤롯 안티파스는 살로메에게 무엇을 줄까 나라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헤로디아는 딸을 통하여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은 술김에 큰소리쳤다가 체면 때문에 요한을 목 베어 쟁반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는 의인 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인 죄로 인하여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니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는 비록 왕이라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왕이라도 죄를 지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둘째, 헤롯이 당황한 이유는 죽은 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과 엘리야와 다른 선지자의 공통점은 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나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신자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신자는 부활하여 영생을 얻고, 불신자는 부활하여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죄를 짓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죄를 지은 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느껴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고 10년이 흘렀어도 마음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책감이 있을 때 회개할 수 있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가인의 후예 가운데 라멕은 죄를 짓고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남은 것이 심판뿐입니다.
헤롯이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죄책감이 느낀다고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괴로워할 때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와 같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입니다.
둘째는 가룟유다와 같이 고통 하다가 극단적으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를 지은 후에 자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살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회개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방을 견디면서도 살아내야 합니다. 회개하고 살아내는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다윗도 회개하고 고통을 감내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1년간 은폐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는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고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말랐습니다. 고통의 때 다윗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지만, 죄로 인하여 엄청난 후폭풍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고통, 국가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메시야의 그림자로서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는 고통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드러나고 부끄러워도 자살하지 말고, 회개하며 온전히 믿음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 마음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9절 헤롯은 심히 당황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요한의 목을 벴는데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니 그 사람 예수가 누구인가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헤롯은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싶어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기 전에 헤롯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죄 사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표적을 볼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그는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되 표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지금 살아계신 그리스도 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수록 우리의 행복도 깊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