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의 비유
<연중 제16주일 강론>
(2026. 7. 19.)(마태 13,24-4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1) ‘가라지의 비유’는, “왜 교회 안에도 악인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고, 악인이 교회 안에도 존재하는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에’ 악과 악인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악 자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악’의 기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또는 인간 세상에
‘악’과 ‘악인’이 존재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배반자 유다의 존재를 설명하는
비유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뽑으시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그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는가?” 라고
물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들만’ 뽑으셨습니다.
열한 명의 사도들과 한 명의 배반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 13,27).”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을,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또는 영혼에 가라지를 뿌렸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밀이었던 유다를 사탄이 가라지로 바꿔놓았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유다의 배반에 사탄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책임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유혹’만 했을 뿐이고,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따라서 배반의 일차 책임은 유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유다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하라고 사탄이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2서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이 말은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을
모두 외면했습니다.
3) 실제 농사에서는 밀은 밀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이지만,
사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의인이 타락해서 악인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악인이 회개해서 의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 또 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끝까지 가서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끝’은 ‘죽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 때’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교회가 큰 박해를 받을 때,
당시 신자들 가운데에는 박해자 사울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서 박해자 사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살인죄를 짓는 일이 될 뿐이고,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4) ‘하느님의 정의’가 너무 더디게 실현되거나,
아니면 아예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현하시는 분이고,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바로잡히는
마지막 ‘그날’이 오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알아보고, 이해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를
모든 사람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사탄은 ‘유혹’만 했을 뿐이고,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