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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1]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2]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 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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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금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말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술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3]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맑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4] 그 근거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맑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5]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3]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6]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맑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맑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맑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맑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7]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이 많고, 오직 일리노어와 로라, 제니 막스 세 딸만 성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일리노어는 1898년에 43살의 나이로 자살하고 로라는 1911년에 66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제니는 1883년 심장병으로 39세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프레데릭의 증손녀인 힐다 마르크스와 인터뷰한 러시아 기사에 따르면 사생아인 프레데릭의 손자는 나치 게슈타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6]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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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에서 출발했고 헤겔의 사고 방식에서 큰영향을 받았지만 헤겔이 주장한 세계 정신의 관념, 즉 우리가 헤겔의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물질적인 삶의 조건이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적 삶의 조건의 변화가 역사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한사회의 정신적인 상황이 물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물질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특히 한사회의 경제적인 힘이 다른 모든 분야에 변화를 일으켜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강조했다.
흔히 맑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민중들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사회비판과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맑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때는 하늘나라, 극락, 메시아, 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맑스는 딸 엘리노어가 교회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갖자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해주면서도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기독교가 가진 자들, 권력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현대 맑스주의도 기독교를 인본주의라는 공동가치를 화두로 대화해오고 있다. [5]
마르크스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을 통과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정통으로 확립된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후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이에 반발해 본래의 마르크스로 회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유럽에서 부상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아도르노 등이 주도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68혁명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련은 사상의 종주국 소련에서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이 아닌 타협을 모색하던 중,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추락한 것이다. 끝내 소련은 해체되고 마르크스주의도 매우 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치이념이 형체도 없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애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 | 지금 세계는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과 소비가 급증한 반면 빈부의 격차는 극심하다. 인간이 이윤과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여 인간 고유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상실해 가는 심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명을 걸고 고민했고 나름의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는 한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주의는 새롭게 해석되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 |
—김윤태.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책과함께, 69,71쪽 |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사회를 바라볼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첫댓글 기독교 까페에 칼 막스의 유물론이라...해당 사상에 심취한 모양입니다.
님이 아는 만큼은 다들 아니, 그만하시고 WCC에 대한 영문 자료나 살표보시죠.
겨우 칼 막스 따위에, 기독교 까페의 게시판을 할애하는 것은 가치없죠.
차라리 바티칸이 발표한 공식 문서나 세계 정치, 경제에 대한 영문 보고서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어떤 흐름인지가 보이죠. 겨우 한극 웹사이트 서핑해서 칼 막스를 올리는 일 말구요.
맑스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 재평가 되고 있는 철학자이자 경제학자라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가 맑스를 유물론이라 비판하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도 다소
유물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맑스의 이념과 공산주의는 역사속에서 희미해지지만,
기독교 비판이 지독한 자본주의에 그 날카로운 칼을 겨누었으면 합니다.
개신교 신앙은 왜 적들을 그리 많이 만들어 놓는지 참 궁금합니다.
인문학은 인문학으로 받아들이고 인문학은 인문학적 시각으로 바로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어짜피 사상과 이념은 강물이 흐르 듯 역사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텐데요.
기독교 신앙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 더 깊이 침잠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사회적 약자를 자본과 권력에서 보호하는 윤리를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앞의 글에 대한 정의이름으로 님의 댓글에 공감합니다.
주안에 평안하시길~
공산주의 유물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본주의를 논할 게 아니라 이 부분이 문제되는 것 일텐데요.
레스폴님이야 말로, 기독교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좀 보여 주시죠.
기독교인들에게 유물론을 읽는 것이 바른 태도라는 것은 안 맞는 말입니다.
이런 내용은 기독교 까페 말고, 다른 곳에서 애기하시지요. 그 체제를
경험한 '탈북자'들에게 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같은 애기를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은 없다'는 말이죠.
쓸데없는 관용 대신, 할 말과 안할 말은 가리는 윤리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공산주의 유물론을 받아들이라, 거의 커밍 아웃 수준이군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칼 막스는 그 수준이 참.. 말할 가치도 없죠
맑스 이전에 유물론은 존재했어요.
유물론은 일종의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세계관일뿐이죠.
소크라테스 이전에 존재했었고 기독교 철학 이전에 이미 사유 방식으로
존재했다 봅니다.
그것은 사고를 가진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 생각해요.
수학처럼요.
맑스 시대의 자본주의는 참으로 비극이었구요.
그리고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데 관심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우리들 만의 댓글 놀이일뿐, 지나가다 남길 글에 지나치게 비판하고 그러지 맙시다.
아~무섭다.
왜이리 날을 세우는 걸까.
신앙을 떠나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참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이면 칼 맑스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구요. 더구나, 칼 맑스 견해도 충분히 경청할 부분도 있습니다.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즈도 페비언 사회주의 영향받았는데.
기독교 카페는 칼 맑스 얘기 하면 안되는지. ㅎㅎ
윗 글에서 칼 맑스가 가톨릭 사주를 받고, 공산주의는 가톨릭이 만든거라는.
"정상적으로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하니. 설명차원에서 올린 거죠.
아니. 가톨릭이 공산주의를 만들었다는게. ㅎㅎ 참
인간의 성향과 이념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님이 논쟁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더 더욱 변하거나 설득하기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이 글을 올리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성향이나 이념이라기 보다 주장의 근거가 사실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요
전 딱히 wcc관심도 없는데 올리신 글의 논거가 통상의 상식에 맞지 않기에 문제제기 한거죠
저도 머 성향 안바뀔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건 다 좋은데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비판을 해도 해야지요
카톨릭이 공산주의 창시했다하고 맑스가 예수회 사주받고
활동했다는게 너무 터무니 없어서요 ㅎㅎ
제목이 이 카페에 무관한 듯하여 지나치다, 댓글이 달렸기에 들렀읍니다.
전도서의 결론적인 말씀, 12장12절-,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 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해아래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을 통해 하시는 말씀은 세상것들은 사람을 분주하고 피곤하게만한다.
하나님을 힘써 알고 경외함이 모든 것이라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