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소개도 하지 않았네요. 저는 유리엔, 유리
엔 폰 아이네아스라고 해요. 그리고 저기 있는 남자는 케레트, 케레트 폰 카
르타난 이라고 하죠. 조금 무뚝뚝하게 보이지만 속은 아주아주 여린 남자랍니
다."
장난스런 여인의 말.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리둥절
하기만 한 사내. 하지만 사내는 그때부터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평생
토록 지켜주어야만 하며, 그 일은 벌써 세 번째 반복되는 그런 것이라는 것
을. 그리고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세르미안, 세르미안 이스피엘이라고 합니다." 』
-마리오네트, <먼 미래의 이야기Ⅱ>
1. 소년과의 만남. 그리고 광란의 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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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안과의 만남.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 그 날의 만남. 검게 들어선 세
상 속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온 소년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던 나. 그리고 그
후 그와 함께 했던 여행. 만일 그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저
주스런 운명의 실타래로 엉키고, 엉켜 만난 그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슬프지 않았을까?
내 눈앞에 있는 저 소년이 지금껏 내가 알던 그 소년인가, 하는 착각이 인
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아픔. 정(精)든 이를 향한 이 아픔 마음.
정말이지 운명을 저주하고만 싶다.
1
그러니깐 그 '소년' 을 만난 것은 우리가 마을을 떠나 수도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중 처음으로 접한 위험요소인 산적들과의 만남이 있은 후의 바로 다
음날이었다.
산적들로부터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되었는가에 대해 잠에서 깨어난 후 고민
하던 주인님과 레이트 녀석.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고민을 한다해도 무슨 답
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설마, 내가 자신들을 구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저, 그 일은 하나의 미스테리로 남긴 채 다시금 여행을
향한 걸음을 옮길 수밖에. 뭐, 자신이 잠들어 있던 곳 바로 앞에 펼쳐진 호수
가 내뿜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참동안이나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한 주인
님의 행동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금 시작된 여행. 식량이 꽤 떨어졌다. 후우, 마을에서 가져온 식
량도 적은데다가 여행 중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열매나 동물을 잡아 식사를 해결한다지만 그런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확률
속에서나 가능한 일. 게다가 식량을 살 돈은 있으나, 마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이지 큰 이유였다. 뭐, 나에게 어렴풋이 느껴져 오는 인간들의 기척
으로 보아 이런 걸음걸이로는 내일쯤이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그동안
에는 변변한 식사를 하지 못할 주인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이것이 다
저 레이트 녀석이 여행을 떠나자는 소릴 했어 그래! 저 녀석을 내가 예전에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뭐, 후회해도 그것은 이미 항구를 떠나버린 배인걸
내가 어찌하겠냐 만은, 화가 나는 것은 화가 나는 것이다.
간간이 휴식을 취하며-주인님은 휴식이 그리 필요 없다지만, 레이트 녀석에
게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휴식이었다- 꾸준히 걸음을 옮겨가던 우리
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걸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길게 뻗어진 숲은 그 자태
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숲을 향해 한참이나 투덜대는 레이트 녀석. 난 투덜대는 녀석을 바라보
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투덜댈 자격도 없으니 찌그러져 있어. 어떤
바보가 수도까지라는 긴 여행을 이런 조잡한 여행물품만을 가지고 시작하겠
냐. 지도 하나 없는 수도까지의 먼 여행이라니. 세상에 너 같은 바보가 아니
면 누가 그런 일을 추진하겠냐.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짙은 어둠. 어느새 저 천공을 노닐던 새들이 둥지로 돌
아갈 시간이 찾아왔다. 아침 내내 찬란했던 자신을 저 서쪽 세상을 향해 이동
해나가는 태양. 태양의 마지막 모습이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고, 그와 함께 저
동쪽 끝 편에서부터 밀려오는 어둠과 그 어둠 사이로 빛나는 새하얀 달. 그리
고 그 주위를 화사하게 빛내는 별들. 화폭 위 잘 그려진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짙은 어둠 사이로 빛나는 별들이 귀엽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 정말이지 마을은 왜 안 나오는 거야!"
레이트 녀석의 투덜거림.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은 어두워진 숲 속의 밤을
지새기 위해 찾은 공터였다. 그리고 그 공터에 도착한 레이트 아까부터 계속
저렇게 투덜대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저런 녀석을 믿고, 주인님이 여행을
해야 하다니. 참으로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졌다. 내가 옆에 없었다면 주인님
은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마을을 찾으면 우선, 지도부터 사자."
역시 주인님은 생각이 있으신 분이라니깐. 내가 지금껏 믿어왔던 주인님은
저 바보 같은 레이트 녀석이랑은 비교 할 수가 없는 고귀하고, 똑똑하신 분이
신 것이다. 하지만 레이트 녀석은 이런 주인님의 깊고도, 심도 있는 여행에
있어 꼭 필요한 발언을 듣고도 전혀 감동치 않은 체 앉은 자세 그대로 벌러
덩, 자리에 누워버릴 뿐이었다. 저 자식을 콱! 참자, 참아. 착한 내가 참아야
지.
레이트 녀석은 바닥에 누운 뒤에도 한참 무어라 투덜거리다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주위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녀석,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
어 주인님에게 모닥불을 피우라고는 못하겠나 보지. 만일, 저 녀석이 주인님
에게 모닥불까지 피우라고 했다면 저 녀석은 정말로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그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이 직설적인 표현이 틀렸던 적이 있던가.
하지만 모닥불 피우는 게 서툰 녀석 덕분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모닥
불이 붙어졌다. 어쨌든 붉게 피워진 모닥불 위로 물이 든 그릇을 올려놓는 레
이트 녀석. 그 뒤 녀석은 주인님에게 소량의 빵과 치즈를 건네주었다. 오늘도
주인님이 이렇게 밖에 식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아프다. 우유도
아닌, 저기 끓고 있는 물에 빵을 적셔 식사를 해야만 하는 우리 불쌍한 주인
님의 모습은 마치 옛날 동화에나 나오는 비운의 공주님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레이트 녀석은 당연히 그런 공주님을 고생시키는 마녀쯤 될까?
어느새 물이 다 끓었다. 그릇에 물을 받아 주인님에게 건네 주는 레이트 녀
석. 그런데 녀석의 얼굴에 약간이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이 들어 나 있었다. 아
마, 지금 녀석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빵 덩어리 때문이겠지. 녀석은 언제나
자신보다 많은 양의 빵을 주인님에게 건네주곤 자신은 조금의 빵만을 먹었었
다. 아마, 주인님을 생각해서 그런 듯 하다. 하지만 저 녀석 덩치에 저 정도의
빵으론 양이 안 찰 것이니, 불만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 게다가
낮 동안 종일 주인님은 내게 체력회복 마법을 선사 받으며 편안히 여행을 했
으나, 그렇지 못한 녀석이었으니 체력소모가 오죽했으랴. 하지만 어쩌랴. 녀석
은 자신이 기사인 줄 아는 '기사병' 에 걸려 있으니 말이다. 원래 기사란 여인
을 숭배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뭐, 녀석이 기사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이러
한 녀석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원망하려면 남자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해라
지 뭐.
주인님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을 조금 떼어내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물에 적셔 나의 입안으로 넣어주었다. 막, 내가 그 빵을 먹으려 할 때. 뒤에서
느껴진 마력(Mana). 난 이런 외진 숲 속에서 느껴질 리 없는 마력을 느끼곤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직 미숙했지만 가공되어진 마력의 흐름. 이것으로 보아 이 자는 정령술사
나 소환술사는 아닌 듯 했다. 정령술사나 소환술사가 마력을 가공할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은 자연의 마력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몸에 마력을 쌓아 그것을
가공하여 마법으로 구현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법사의 기운이다. 아직은 미숙한. 근데 뭘까? 이 미숙한 마법사의
기운 속에서 은은히 느껴져 오는 이 슬픈 기운은. 알 수 없는 묘한 힘이 피부
를 스쳐지나 가는 듯 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는 대체 누구?
그렇게 얼마 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또렷이 들려오는 발자국 소
리. 뭐, 아직 주인님이나 레이트 녀석이 듣기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소리였지만 말이다.
푸스럭. 푸스럭.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 바닥 가득한 나뭇잎을 밟으며 다가오는 상
대의 소리를 이제야 들은 주인님과 둔한 레이트 녀석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
향을 향해 경계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인해 내가 추론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 우
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는 분명 마법사이며, 남자이다. 그것도 어린 소년. 하
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는 소년이었다. 내가 잘 떠올릴 수 없는- 지금 내가
속한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특별한 힘. 그런 것이 소년의 몸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예상에 맞장구치듯 우리들의 앞에 모습을 들어
낸 그. 달빛을 등진 그의 모습이 묘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고요 가득한 숲 속의 밤중에 어둠 사이로 달빛을 등진 채 나타난 사람이라니.
유령이야기에나 나올 듯한 장면이 아닌가.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듯 깜짝 놀란 주인님과 레이트 녀석. 주인님 떨지 말아요. 만일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저 레이트 녀석은 몰라도 주인님은 제가 꼭 지켜드릴 테니깐 말이에
요.
한참의 정적이 유지되었다. 달빛을 등진 채 우리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가
기괴하다.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듯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시선
으로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는 레이트 녀석과 어떻게든 침착한 모습을 유
지하려는 듯 발버둥치는 주인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잠시의 시간이 흐
르고 희미하게 불어온 바람 소리와 함께 한밤중의 낯선 불청객이 입을 열었
다.
"밥 좀 주세요……."
그가 우리에게 한 첫마디였다.
2
저 북쪽 먼 곳에 사해(死海) 또는 가레프스라고 불리는 정말이지 깊은 바다
가 있다고 한다. 그 바다는 어찌나 깊은지 그 바다의 밑바닥은 저 낮의 하늘
을 지배자하는 태양의 손길조차 닿을 수 없다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바라
볼 수 있는 권한을 신께 얻은 태양조차도 그 끝을 볼 수 없다는 깊은 바다
가레프스. 그리고 그 바다의 맨 밑바닥엔 정말이지 신기한 생명이 많이 살고
있다는데, 그 생명들 중 가장 내 기억에 남는 이름은 바로,
아귀(餓鬼).
일명 폭식자(暴食者)라 불리는 생명체. 동방(East)의 언어로 굶주린 귀신(鬼
神)이란 뜻을 담고 있는 녀석. 그 녀석을 난 한번 본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거
대한 녀석이었다. 성인 남자 셋을 합친 크기보다 더 커다란 몸체를 가지고 있
는 녀석의 모습. 녀석은 어류에 속하는 생명이라 하는데, 난 도무지 그것이
여느 물고기들과 어디가 비슷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표면은 미끌미끌하고,
지느러미조차 없는 그저 넓적한 녀석의 모습에서 어찌 여타 물고기와 같은
점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왜 그런 녀석을 떠올리느냐 하면은 지금 내 눈앞에서 식량 가방
에 들어있는 식량을 먹어 치우고 있는 이 인간의 모습이 꼭 그 아귀의 모습
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지금 식량 가방 속에 들어있던 식량을 바닥내고 있는 이는 바로 내게 자신
의 마력을 느끼게 만든 그 마법사였다. 나이는 내 예상대로 한 17~18 살 정도
로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주인님처럼 밝게 빛나는 긴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었다. 밀가루를 잔뜩 풀어놓은 듯한 하얀 뺨과 여인의
그것처럼 살짝 그려진 입술이 유난히 돋보이는 소년. 소녀라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얼굴이다. 저런 소년들을 흔히들 미소년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숲을 거닐다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얼굴 여기저기에 흙이며 풀조각 등을 붙이
고 있다는 게 미소년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년의 옷은 마법사들이 흔히 입는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가 없는 형태
를 하고 있어 긴 조끼를 연상시키는 그런 로브였다. 전체적으로 푸른색과 흰
색이 감도는 로브.
한참을 그렇게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길에 문득 소년의 가는 팔에 차
여져있는 '팔찌' 가 들어왔다. 은백색이 감도는 매끈한 표면의 팔찌. 그저, 마
법을 사용할 때 그것을 보조하는 마법도구라고 단정지으려 했지만 자세히 보
니 그 팔찌의 매끈한 표면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잘하게 동방의 언어가
잔뜩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글자는,
봉(封).
팔찌의 중앙에 다른 글자에 비해서는 커다랗고, 그 색마저 붉은빛인 글자.
뜻이 분명 '봉하다' 였지. 그리고 자세히 보니 저 팔찌에는 미약하지만 봉인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까 저 소년의 가지고 있는 마력 뒤편에서 느껴지
던 '슬픈 느낌' 과 같은 종류의 느낌. 대체 저것은 무엇을 봉하기 위함일까.
"미, 미리네…… 저걸 저 애가 다 먹으면……."
레이트 녀석의 말. 그리고 난 잠시 저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 차고 있는 팔찌
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채 중요한 사실을 잊고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 지금 저 소년은 우리의 식량을 거의 다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예상대로라면 내일쯤이면 마을에 도착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들의
이동 속도로 보아 그것은 아마, 저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식량이 없는
상태에서 대체 아침과 점심은 어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저 소년에게 어서
중지를!
-냐앙!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급하게 식량 가방을 마구 할퀴며 소리를 질러보았
지만,
"야옹아, 식사하는데 그러면 못 써."
날 안아 올리는 주인님의 행동에 따라 내 그런 처절한 식량을 향한 몸부림
은 무산되고 말았다. 주인님! 저러다 식량 다 없어져 버릴 거예요. 제발 이성
적인 판단을. 아무리 마음씨가 고우시다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하잖아요!
하지만 주인님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소년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식량을 다 먹은 듯 보이자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을 건네줄
뿐이었다.
만족한 듯 자신의 배를 잡고 미소짓는 푸른 눈동자의 소년과 텅 비어 버린
식량 가방의 모습이 내 시선 가득 들어왔다. 하아, 결국 내가 우려했던 결과
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비극이다. 이렇게 내일 아침과 점심거리가
날아가 버리는구나. 너무 허무한 식량들의 최후가 아닌가?
"잘 먹었니?"
"네, 덕분에……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마음이 너무 좋았어 탈이야. 뭐, 그것이 안 좋은 것도 아니지만, 너
무 마음씨가 고운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꽤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는
데. 역시 주인님의 곁에는 영원히 내가 있어줘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보다 식량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 아, 충격이다. 주인님이
내일 아침과 점심을 굶어야 하다니, 가슴이 안 아플래야 안 아플 수 없지 않
은가.
"아, 식량이……."
나와 레이트 녀석의 마음이 통한 건가? 레이트 녀석이 텅 비어버린 식량 가
방을 보며 세상다 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녀석에게는 나보다 더 큰 충격
이 찾아왔겠지. 나야 뭐 내일쯤이면 마을에 도착 할 수 있을 거란 걸 알고 있
지만, 녀석은 그런 걸 알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마을을 기대하며 다 떨어진 식량으로 여행을 해야 한다니 앞날이 얼마나 캄
캄하겠는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 문득 자신의 로브 자
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주인님께 내보이며 말했다.
"저기…… 이걸로 사례를 하면 안 될까요?"
어두운 밤하늘 쏟아지는 새하얀 달빛을 머금어 그 영롱한 녹빛을 마음껏 퍼
뜨리는 주먹만한 덩어리. 에메랄드? 저 소년, 생각 이상으로 부자였잖아. 지금
더럽혀진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거지꼴인데. 어쨌든 주인님 어서 받으세요!
저걸 받아두면 이제 우리들의 여행은 편안한 여행의 지름길을 밟게 되는 거
란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레이트와 함께 그 커다란 에메랄드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주인님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아까 먹은 게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 괜찮으니깐 그건 어서 집
어넣어."
후우, 역시나. 주인님은 너무나도 마음씨가 고와서 탈이야.
"하, 하지만……."
"괜찮으니깐. 그건 도로 넣어. 그런데... 너 그렇게 배가 고플 정도로 왜 이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니?"
화재를 바꾸려는 듯 그에게 말을 거는 주인님. 그리고 그런 주인님의 패턴에
넘어간 듯 잠시 주저하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주인님의 앞에서 하기 시작
했다. 뭐, 레이트 녀석은 비어버린 식량 가방을 꼭 끌어안은 체 울상만 지을
뿐이었지만.
한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알아낸 사실은 그가 로존디아 마법학교의 학
생이란 것이다. 로존디아 마법학교라면 나도 일전에 들은 적이 있는 이 나라
의 명문 마법학교다. 호오, 이 소년은 꽤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그런 학교에
다 들어가다니. 저기 식량 가방을 안고 훌쩍이는 누구누구(!)랑은 달리 말이
다. 어찌하였던 그 학교에 다니던 이 소년은 방학을 맞이하여 자신의 할아버
지가 살고 있는 지방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수도로 올라가던 도중 길
을 잃어 이 숲에서 자그마치 4일을 헤맸다는 것이다. 그렇게 숲을 헤매다 오
늘 불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소
년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난 뒤 나온 소년의 말에 난 실
소를 감추지 못했다.
"제가, 방향치다 보니."
마법사가 방향치라니. 마법이란 엄연히 공간과 공간 사이를 떠도는 마력을
끌어 모아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날려보내는 것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데 그런 마법사가 방향치라니. 방향치라는 것은 동서남북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정확한 마력의 운용이 필요한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럼, 너희 집에 갈 때는 어떻게 간 거니?"
주인님이 소년에게 그렇게 물음을 보냈고, 소년이 대답한다.
"아, 집에 갈 때는 상인들과 함께 갔는데, 수도로 다시 돌아갈 때는 그 상인
들이 이미 떠나간 후라, 저 혼자 길을 나서다가 그만……."
그런데 이 소년은 정말이지 부끄럼이 많은 성격처럼 보였다. 주인님과 대화
하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히는 소년의 모습이라니. 왠지 모르게 귀
엽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누구누구(!)와는 비교되기 그지없는 소년
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찰싹 하는 손바닥이 서로 마주치는 소
리가 들려왔고, 주인님의 들뜬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아, 맞다. 수도로 갈 거라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래? 우리도 수도에 가는
길이었거든."
동행이라. 저 소년과 동행을 하길 원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주인님의 말을
들은 레이트 녀석의 표정이 영 편치 못했다. 저 녀석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까? 혹시 위기의식? 저 소년의 얼굴이 자신보다 낫다는 것을 느끼고, 주인님
의 마음이 저 소년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 녀석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보게 청년. 주인님은 처음부터 청년에게 관심 없었으니 그런 생각조차 가
지지 말게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소년이 입을 열어 방금 주인님이 내세운
동행건에 대해 뭐라 말을 하려 했다. 얼굴을 잔뜩 붉히고, 거절의 의사를 밝
히려는 듯 보였으나 선뜻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저 소년도 자기 혼
자서 수도로 가는 것보다는 우리들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좋다 판단하나 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너무 폐를 많이 끼친다는 생각에 저러는 것이
겠지.
"그, 그래도……."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거부를 하려는 의사를 표현하려는 소년.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싫다는 쪽으로 마음이 간 듯 하다. 그때 주인님이 너무나도 예쁜 미소
를- 저 흩어지는 달빛을 머금어 새하얗게 빛나는 미소를 소년에게 지어 보이
며 말했다.
"아니야, 너 방향을 잘 못 잡는다며, 우리와 함께 가자."
오, 나왔다. 주인님의 미소 어택. 채소가게 아저씨한테 채소 값 깎을 때 써먹
던 그 불멸의 공격. 저 미소에 채소가게 아저씨가 주인님께 깎아주었던 그 금
전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 가듯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주인님의 미소 어택을 마주한 소년의 얼굴은 잔뜩 붉어졌고, 소년은 고개 숙
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라고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뭐가 좋은 듯 밝게 미소짓는 주인
님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 그렇지. 우리 이름도 아직 서로 말하지 않았네. 난 미리네 엘리세이나이
고, 저기 저 남자는 레이트 스펠리스. 넌?"
"저, 저는…… 시리안 카드메시아라고 해요."
미소 짓고있는 주인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그가 말을 했다.
정말이지 재빠른 절차과정이다. 재빠른 동성명과 함께 이제 동행이 된 소년.
뭐, 레이트 녀석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주인님과 그런 주인님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소년- 시리안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어찌 주인님의 결정에 반
대 의사를 표하겠는가. 암,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정말이지 황당한 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소년과 그런 소년과의 동행이 결
정되다니. 뭐, 위험한 소년처럼 보이진 않지만, 저기 소년이 차고 있는 팔찌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려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어쩌겠는가, 난 그저
힘없는(?) 고양이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지만 저 시리안이라 자신을 밝힌 소
년은 마법사이니 레이트 녀석보단 주인님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그
정도 걱정은 넘어가 줘야겠지.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뭔가 딴 속셈 때문
에 우리와 동행을 한 거라면 그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