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진에서 일상으로: 미래 화폐를 현실로 옮긴 프로젝트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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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경험: 화폐의 혁신과 경제의 도약
경제·화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화폐제도의 혁신은 늘 경제활동의 큰 도약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금화나 은화를 직접 주고받던 시절에서 벗어나 17세기 들어 신뢰할 수 있는 중개기관(예: 공공은행)이 장부(원장)에 기록하는 '장부상의 돈'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자, 환어음과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이 출현했고 무역과 상업이 꽃피게 되었습니다. 그 뒤 종이 장부가 '전산화'되어 이를 기반으로 송금·주식거래와 같은 다양한 금융거래가 우리 손안의 스마트폰에 들어오면서, 거래 시간 제약이 완화되고 그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그림 1.유럽 공공은행(암스테르담 은행1)
주1.1609년 설립된 대표적인 유럽 공공은행
자료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그림 2.초기 환어음
자료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그렇다면 다음 단계 혁신은 무엇일까요?
토큰화(tokenisation): 똑똑해지는 화폐, 그리고 자산
그 혁신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토큰화'입니다. 이는 단순히 전산화를 통해 돈을 화면 속 숫자로 옮겼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래조건'과 '실행규칙'까지 함께 담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이 돈은 우리 동네 골목상권에서 정해진 기간 안에만 쓸 수 있다"는 약속을 미리 정해 두면, 그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돈이 지급됩니다. 이렇듯 토큰화된 돈은 단순한 '가치의 저장·이전 수단'을 넘어, 약속과 절차까지 품은 '똑똑한 돈'이 됩니다.
토큰화는 돈에만 국한되어 적용되는 기술이 아닙니다. 국채나 주식과 같은 '자산'도 똑같이 토큰화함으로써, 거래조건과 실행규칙을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림 3.토큰화의 개념
자료BIS(2023)
이제 관건은 똑똑해진 돈과 자산이 한데 어우러질 '새로운 무대'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새로운 무대의 청사진: 통합원장(unified ledger), 그리고 중앙은행
이에 대해 제시된 청사진이 통합원장[2]입니다. 프로그래밍 가능한, 즉 거래조건과 실행규칙을 설정할 수 있는 플랫폼 위에 토큰화된 다음 세 가지, 즉 은행 간 결제 등에 쓰이는 중앙은행 돈(기관용 CBDC), 일반 경제주체가 사용하는 은행 예금(예금 토큰), 그리고 자산(예: 국채)을 함께 올려 두자는 구상입니다.
그림 4.통합원장의 개념
자료BIS(2023, 2025)를 기반으로 재구성
이렇게 돈과 자산이 같은 무대에 자리하면 또 다른 강점이 드러납니다. 지금은 자산 거래에서 대금과 자산이 오가는 시점이 어긋나, 그 사이 한쪽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대금 또는 자산을 먼저 건넨 쪽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통합원장에서는 '값을 치르는 동시에 자산의 주인도 바뀐다'는 약속이 적용되어 이 과정이 한 번에 이루어지므로, 거래가 어긋날 일 없이 한결 단순하고 안전하게 처리됩니다.
그런데 왜 통합원장에는 중앙은행이 중심에 있을까요? 중앙은행 돈은 오랜 기간 화폐제도를 지탱해 온 '신뢰의 닻'입니다. 그 신뢰를 활용하면 토큰화의 장점은 누리면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통합원장은 은행 간 결제 등에 쓰이는 중앙은행 돈을 플랫폼 위에 올려 둠으로써 중앙은행의 신뢰를 '프로그래밍 가능한 환경'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한편, 통합원장에서 우리가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인 예금 토큰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장점은 어느 은행의 예금 토큰이든 1:1로 통용되는 성질, 즉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3].
통합원장은 은행을 없애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앙은행-은행으로 이루어진 현행 2계층 화폐제도(two-tier monetary system)[4] 를 더욱 강화하면서, 화폐의 단일성을 담보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입히되 신뢰의 뼈대는 지키는 것입니다.
프로젝트 한강: 청사진을 선도적으로 실제 구현하다
이런 구상을 현실로 옮기려는 시도는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중앙은행(ECB)도 '아피아(Appia) 구상'을 통해 중앙은행 돈까지 직접 토큰화한 통합 생태계 구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2028년 청사진 마련을 목표로 한 '계획' 단계입니다.
한국은 이미 한발 앞서 통합원장이라는 청사진을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현실로 옮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유럽에 비해 2년가량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행은 7개 참가 은행[5]들과 협력하여 통합원장인 디지털화폐 시스템을 실제 구축하고, 2025년 4∼6월 중 실제 거래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유용성을 확인했습니다.
• 통합원장 시스템이 실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 예금 토큰이 새로운 일상적 지급수단이 될 수 있다.
• 프로그래밍 기능은 잘못된 사용을 거래 시점부터 방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2단계: 국고금, 더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2026년 하반기에 시작될 2단계에서는 참가 은행이 9개로 늘어나고[6], 생체인증과 예금과 예금 토큰 간 자동 전환 같은 편의 기능을 더합니다[7].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 재정 집행에 프로그래밍 기능을 본격 활용할 예정인데 전기차 충전 인프라 구축 보조금과 공공부문 업무추진비가 첫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국고금 집행은 자금을 지급한 뒤 사후에 점검·정산하는 방식에 주로 의존해 왔습니다. 이에 잘못된 사용을 미리 막기 어렵고 점검·환수에 적지 않은 인력과 자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사업자가, 허용된 용도로, 정해진 기간에만'과 같은 조건을 미리 설정해 두면 조건을 벗어난 지출이 발생하기 어려워지고, 사후 점검에 소요되는 자원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자금이 거쳐 가는 중개 단계도 줄어 결제 수수료 부담까지 낮출 수 있습니다.
그림 5.공공부문 업무추진비의 프로그래밍 기능 활용사례
자료한국은행(2026a)
프로그래밍 기능을 통해 재정 집행 방식을 '사후 감사' 중심에서 '사전 규칙' 중심으로 옮기게 되면, 이는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라 재정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떠받치는 토대 자체를 바꾸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 국채 토큰화, 그리고 국경을 넘는 결제
2단계 사업을 넘어 앞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더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디지털화폐 시스템 상에 중앙은행 돈과 예금에 더해 '자산'까지 실제로 토큰화하는 것입니다[8]. 그 대표적 대상이 국채인데, 국채가 통합원장 안에서 발행·유통되면 국채 소유권과 대금의 교환이 동시에 처리되고 담보 관리가 자동화되어, 중앙은행 본연의 책무인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정부는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기관용 CBDC와 연계한 국채 토큰화 실증 시범사업을 2027년 중 추진할 예정임을 밝혔습니다. 한국은행은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동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또한 미국, 유럽 등 8개 중앙은행과 40여 개 금융기관[9]이 참여하여 여러 나라의 토큰화된 돈을 한 플랫폼에서 주고받아 국경 간 결제를 개선하려는 프로젝트 아고라(Project Agorá)와의 연계를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각국이 구축해야 하는 관할권 원장을 이미 마련해 놓은 상황이며, 2026년 7월 디지털화폐 시스템과 아고라 플랫폼을 연계한 실거래 테스트(real value testing)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향후 프로젝트 아고라가 상용화될 경우 외환, 더 나아가 증권 결제를 한 번의 거래로 처리해 비용을 낮추고 원화의 국제적 활용도를 한층 더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 6.프로젝트 아고라와 한국은행 디지털화폐 시스템(DCS)의 연계
자료BIS(2026)
토큰화라는 전환기에 선 지금, 한국은행은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는 가운데 철저한 준비와 선제적 혁신으로 미래 화폐제도를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