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 本貫 ]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姓)의 출자지(出自地).
관적(貫籍) ·본적(本籍) ·성관(姓貫) ·본(本) ·관향(貫鄕) ·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姓)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對民)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入仕) ·입산(入山)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防戍) ·행상(行商) 등 역(役)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徙民)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良人)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와 양수척(楊水尺) 등의 천인(賤人)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土姓) 및 직역(職役)을 분정(分定)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賦稅)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城)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封邑)’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食邑) 또는 채읍(采邑)을 사봉(賜封)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籍)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同姓)은 처음에는 동본(同本)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姓貫)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改貫)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법률적인 면에서 그 기능이 남아 있고,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출처] 본관 [ 本貫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