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디스플레이大戰 현주소
대륙의 황색 돌풍
중소형 패널선 경쟁력 막강 7세대 이상 공장 속속 준공 50인치 이상 제품 곧 출시
좁혀지는 격차
세계 2위 대만이 원군 역할 中정부 국가전략 차원 지원 韓·日 인력도 대거 유입돼
한국이 가야할 길
최첨단 OLED 격차 벌리고 핵심기술 문단속 철저히 신흥국 저가시장도 지켜야
최근 10여 년 동안 일본과의 사투 끝에 디스플레이(전자 표시) 산업 세계 1위에 오른 한국 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등장했다. 중국 대륙의 후발 업체들이다. 이들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같은 첨단 분야나 대형 디스플레이 등 고가 상품에선 한국과 격차가 있으나, 중·저가 디스플레이 시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가전(家電)분야에서 중국 토종 기업들이 보여온 맹렬한 추격 양상이 디스플레이에서 재현될 조짐이다.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샤프·소니·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이 절대 강자였다. 이들은 CRT(브라운관), LCD(액정), PDP(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 등 거의 모든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무기로 시장을 지배했다. 한국 기업들이 판도를 바꾼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다. 5세대 이상 대형 LCD분야에서 대규모 투자로 기술 수준을 역전했다. 이후 2010년까지는 한국이 세계 시장을 주도했지만 이런 구도가 지속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중국 토종 기업들이 7세대 이상 대형 LCD에 속속 투자하며 성공적인 공장 운영을 하고 있는 데다, 중국 정부가 막강한 자금으로 산업 생태계 구축과 '한국 추월 작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기계·화학 같은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삼성·LG 두 디스플레이 기업은 국내에서만 6만명을 고용하며, 연간 매출합계는 53조원이다. 글로벌 디스플레이 패권이 중국에 넘어갈 경우,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이 우려된다.
중국의 대표 주자는 베이징의 징둥팡(京東方·BOE)과 광둥성 선전(深�q)에 있는 CSOT(華星光電)이다. 이들은 모두 국유기업이거나 국유기업이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두 회사는 창립 후 거의 매년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지만 죽어서도 움직이는 '좀비(zombie)'처럼 적자 속에서도 투자를 계속 늘리고 있다.
2006년에 중국 100대 전자(電子)기업 가운데 3위에 오른 징둥팡은 거의 매년 영업손실을 내고 있지만, 지난해 가을 제8세대 LCD공장을 세웠다. 480억위안(약 8조3000억원)의 막대한 투자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상증자를 했는데, 중국 정부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징둥팡은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에 8세대 2기 라인 건설을 확정했고 내몽고자치구의 오르도스에도 저온폴리(LTPS) 같은 고(高)사양 제품라인 건설을 추진 중이다.
올 7월부터는 이미 월 9만장(투입되는 유리 기준)의 생산 설비를 풀가동하고 있으며, 올 연말에는 이를 12만장으로 늘리기로 확정했다. 현재까지 32인치 TV와 20인치대 모니터 등 저(低)사양 제품 영역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구축해 놓았다는 평가다. LG디스플레이 상하이 법인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의 8세대 투자는 올 3분기 만에 안정적인 수율(收率)을 낼 정도로 성공적"이라며 "중소형 TV 패널시장에선 이미 세계적인 강자가 됐다"고 했다.
CSOT와 징둥팡은 3D TV와 LED TV, 높은 응답속도(120Hz) 등 고급 사양을 갖춘 50인치 이상의 고급 대형 패널 제품도 곧 내놓을 예정이다. 중대형·프리미엄 제품시장까지 공략에 나선 것이다.
중국 기업들의 '황색 돌풍'을 돕는 '원군(援軍)'도 여럿이다. 먼저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술 전수에 협조적인 세계 시장 점유율 2위인 대만이 있다. 대만의 CMI와 AUO는 올 3분기까지 8분기 연속 적자를 낼 정도로 사정이 어렵지만, 상당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데다 중국 기업들과 지리적·인간적으로 가까워 화학적 결합이 용이하다. 한 디스플레이 업체 임원은 "중국 기업들이 AUO에 대한 인수를 시도할 수 있다"며 "중국 업체 입장에선 기술력과 생산 기반을 동시에 갖춘 AUO 같은 기업 인수가 시장 확대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적자를 아무리 내도 공산당과 정부가 금융·세제 지원으로 밀어주는 중국식 산업정책도 든든한 힘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확정한 12차 5개년 규획에서 LCD 산업을 '7대 전략적 신흥산업'에 포함해 놓고 본격 산업 구축에 나서고 있다. 디스플레이를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할' 산업으로 지정한 이상, 관련 기업들이 자립할 때까지 각종 지원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비디오산업협회 등은 범정부 차원에서 올 6월 대만 AUO와 OLED TV 사업 공동추진에 착수했고 정부 주도로 관련 19개 업체가 참여하는 '중국 OLED 산업 동맹'도 최근 결성했다.
대표적인 장치 산업인 디스플레이 산업은 IT산업의 경기 사이클 및 세대별 투자시기에 따라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나타난다. 일본이 한국에 패권을 내준 것은 이 사이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차세대 투자를 주저하거나 설익은 기술에 무리하게 투자했던 요인이 크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은 한·중 디스플레이 전쟁에서 중국 측에 매우 유리한 요소이다.
마지막 원군은 한국·일본·대만 등에서 중국으로 유입되는 기술 인력들이다. 디스플레이는 산업 특성상 원천기술을 확보한 뒤에도 개발·공정기술의 체득(體得)이 중요하다. 수율 등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업계 관계자들은 "대만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면서 대만 기술 인력의 상당수가 중국 대륙으로 이미 건너갔다"며 "중국 토종 기업들이 중대형 모델을 양산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했다.
◇한국의 승부수는 '기술 블랙박스화'와 '전방위 기술력 제고'
한국 기업들은 OLED 등 차세대 개발을 통한 '기술격차 확대'로 맞불을 놓고 있다. OLED는 일본 기업들에도 미답(未踏)의 영역이며, 중국으로 들어간 외국 기술자들에게도 생소하다. 한국 기업들은 휴대폰용 OLED 디스플레이 상품화에 이미 성공했고 OLED TV 상품화를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의 주도권을 지키려면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먼저 차세대 OLED 디스플레이 같은 첨단 분야에서 장비 및 연관 재료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경쟁국 기업들이 모방할 수 없도록 '블랙박스(blackbox)화'해야 한다. 과거 LCD 시대에서는 대형 공장을 먼저 지어 빨리 안정화하는 게 중요했지만 앞으로는 대형 공장을 먼저 짓는 것보다 OLED 디스플레이를 안착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특히 OLED 경쟁의 핵심은 유기물 증착·잉크젯·플렉서블 등과 관련된 장비·재료 기술 분야에서 혁신이다. 이미 중국 기업들은 여러 방법을 총동원해 한국 OLED 디스플레이 관련 핵심 기술을 조직적으로 빼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올 6월 이스라엘의 OLED 검사 장비업체의 한국 지사 직원들이 한국 OLED TV 패널 회로도와 공정기술을 유출하려다 적발됐는데, 그들을 접촉한 곳이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였다. 이런 시도를 차단하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철저한 문단속이 절실하다.
'차원이 다른 저가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제품기술 확보도 필수적이다. 중국과의 디스플레이 대전에서 '저가(低價)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과거 한국 전자기업들은 일본과의 경쟁에서 부족한 기술력을 '싼 값'이라는 소비자 가치로 만회했다. 기술력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일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저가시장을 한국에 내줬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에 도약의 기반이 됐는데, 지금 한중 대결도 비슷하다. 중국 기업은 32인치 TV 등 저가 제품 시장에서 기술력을 다져가고 있고, 향후 50인치 이상 TV, 차세대 OLED 디스플레이 시장에도 진출이 확실시된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내에서 저가 디스플레이 시장을 포기한다면, 일본의 실패를 반복할 공산이 크다. 특히 성장 시장인 중국·인도·동남아 등 신흥국 시장에서는 여전히 가격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한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중국 현지 법인 운영을 곧 시작하면 현지 소싱을 통해 원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최소한 중국 토종기업과 비슷한 저가 가격 수준을 유지하거나 '저가이면서도 더 고품질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한·중 디스플레이 대결은 차세대 OLED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황색 돌풍'을 잠재우지 못하면, 글로벌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어렵게 잡은 패권은 금방 중국에 넘어갈 것이다. 20여 년의 영화(榮華)를 누린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단명(短命) 신세로 자칫 끝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