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믿음과 기억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켰다. 그들이 증언한 대로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사도 3,16) 사도들이 믿었던 내용과 나의 믿음이 다르지 않을 텐데 나는 왜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걸 알아차릴 때는 있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죽은 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 거다. 아니 나는 할 수 없다.
사도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도자들이 말한 거처럼 그들은 평범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율법 학자나 사제 같은 극히 일부 엘리트만 읽고 쓸 줄 알았으니 사도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과 수년간 함께 먹고 자고 다니던 사람들이었다.(사도 4,13)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는 해도 내가 기도나 생활 중에 체험하는 예수님과 그들이 아는 예수님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예수님을 알리지 말라고 위협했을 때 사도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그들은 예수님 육성으로 가르침을 들었고, 불치병이 낫고,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요즘 말로 능력자라고 믿었다. 그분이 나라를 구하고 거기서 그들도 높은 자리 하나씩 맡게 될 거라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면서 기대하고 있었다. 세상 속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렇게 허망하게 그것도 가장 치욕스럽고 무거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으니 그들은 대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여인들이 주님 부활 소식을 알리고, 또 제자 둘이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니 그들은 더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 혼란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한 사도와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었을 거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지 깨닫는 시간이었을 거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있었다면, 내게는 전해 받은 믿음과 많은 이들이 남긴 삶의 증언이 있다. 사도들의 기억과 내 믿음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같은 분을 가리키고 있고, 그분은 지금 여기에 여전히 살아계신다. 내 믿음이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힘은 그에 못지않다. 주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도 열한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마르 16,13) 결국 예수님이 그들에게도 나타나 그들은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고 분부하셨다. 제자들이 꾸지람을 들었던 걸 생각하면 내가 부족한 믿음으로 늘 시달리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설령 예수님이 내게 나타나셔도 꾸짖지는 않으실 거다. 그 대신 복음을 전하라고, 계명을 실천하라고, 그게 진리이고 구원받는 길이라고, 다른 길은 없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이 말씀하실 거다, 내게 믿음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예수님, 그때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기운을 얻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사도들의 ‘예수님과 3년 살이’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이 이콘은 저를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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