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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책[편집]
《논형》에는 '橐離(탁리)'라고 적혀 있으나,
고리국은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고대국가를 파생시켰다, 또한 고조선과 동질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나라였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아버지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리, 부여, 고조선을 각각 분리하지 않고 매우 근접하게 연결 된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호 코리아의 어원은 고리다. 즉 단군조선 당시 연방국이였던 고리국으로 중국사료에는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한 북이 탁리국.색리국.탁근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리국(高離國)은 중국 사료에 만리장성 북쪽 지역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나라이다. 탁리국(橐離國), 색리국(索離國), 탁근국(卓斤國)이라고도 부른다. 부여의 전신에 해당하는 국가로, 졸본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고리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를 떠난 소서노가 건국한 요동지역의 어하라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경기도 하남시 고골에 하남위례성을 짓고 도읍한 백제 온조왕이 사당을 지어서 제사지낸 동명왕은 온조의 외고조부가 되는 부여의 동명왕이다.
고리국은 부여의 동명왕 설화에 등장하는 나라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 기록내용에는 부여 동명왕 고두막 한이 한나라의 부여침략을 의병을 일으켜 물리치고 민심을 얻고 해모수왕조를 접수하여 부여왕에 즉위하고 지금의 환인(졸본)지역에 도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부여의 동명왕이 고리국왕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다.
동명왕 설화에 따르면 고리국왕은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장차 나라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동명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이 고리국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호수를 건너 (졸본)부여를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명의 부여건국 설화는 다양한 역사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명왕이 출생한 고리국 이름은 중국사료에서 문헌별로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서기 60년 후한의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는 탁리국(橐離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세기에 서술된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편에는 고리국(高離國)이라고 하였다.
5세기에 편찬한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편에는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세기에 정리된 것으로 기록 자체는 《삼국지(三國志)》 기록보다 오래되었다.
중국사료《논형》에는 '橐離(탁리)'라고 적혀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婢對曰:「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我故有娠」。後產子,捐於豬溷中,豬以口氣噓之,不死;復徙置馬欄中,欲使馬借殺之,馬復以口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令其母收取奴畜之,名東明,令牧牛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掩水(掩淲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
북쪽 오랑캐(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녀(侍婢)가 임신(娠)하였다. 그래서 왕(王)이 그녀를 죽이고자(殺)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로부터 저에게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에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어미에게 아이를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至掩水)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내 흩어져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고 옛(故) 북쪽 오랑캐 땅(北夷)에 부여국(夫餘國)이 생겨났다.
— 論衡/吉驗篇第九
이 동명왕 설화를 고구려의 주몽집단이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차원으로 차용하여 주몽설화로 차용하였다. 해모수의 손자 해부루가 동명왕 고두막 한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지금의 연해주지역으로 추정되는 부여 동부의 농경지역에서 건국한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동명왕이 도읍한 졸본부여로 망명하여 후계자가 없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로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였던 소서노와 혼인하여 졸본부여왕이 된 후에 국호를 고리로 바꾼 주몽이 동명설화를 자신의 설화로 사용한 이유다.
또한 백제(어하라)의 실제 건국자라고 할 수 있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할아버지가 동명왕이니만큼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7세기에 편찬한 《북사(北史)》에는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815년 일본 천황의 명으로 편찬한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는 "백제는 부여 땅의 탁근국 왕의 시녀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리국은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고대국가를 파생시켰다, 또한 단군조선과 동질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나라였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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