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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기 중 올레길을 걸으러 제주도에 내려왔습니다. 걷는 것이 기도가 되고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궁극엔 생각도 비우고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소비적인 삶과 바쁘게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쉬 지치고 생각할 여유를 잃게 됩니다. 생각할 힘을 잃게 되면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십상입니다.
평소 걷는다는 것이 비우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길 위에 선다는 것 자체가 비움의 시작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바다를 바라볼 때나 산을 오를 때 저 너머에 대해, 그리고 나와 다른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 저 너머에 대해 열려 있게 됩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신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매일 만나고 지나치는 모든 자연과 만남에 감동하고 감탄하며, 또 놀라고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건 나의 호불호를 떠나 불편심을 갖게 하고, 열려 있게 되는 체험으로 나도 한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자연에 동화되는 체험입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자연. ©남궁영미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기후위기와 생태적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생태 문제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 또는 영성과 깊이 연관해 있는데, 오늘날은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의 자리를 상업적이고 과학적인 감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태도가 변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던 자연의 웅장함에 대한 감흥과 풍성한 감수성, 신비스러움에 대한 감각 상실로 인해, 이제 자연세계는 경제적 자원 또는 휴양지 정도로 대상화 되었고, 인간 중심의 유용성에 따라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는 객체일 뿐 아니라 엄연한 주체이며, 한 유기체로 자연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자연. ©남궁영미
생명가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선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을 보고 감탄할 수 있고, 다른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자연 안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생태적 감수성은 메마르고 무관심한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다른 생명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연과 함께하는 기회를 갖는 것을 통해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활동주의가 우리 삶의 질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활동주의를 거슬러 멈추어 삶을 돌아보는 시간과 기회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태감수성 회복을 위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이란 책에서 언급하였듯이 “느림은 나태가 아니라 자연의 리듬을 말합니다. 자동차의 속도가 아니라 보행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글씨 남궁영미(괴산 하늘지기 꿈터) ©이수용 수사
생태 문제는 삶 문제이며 결국 실천 문제입니다. 우리 삶을 이루는 가치 판단과 삶의 목표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교통수단, 먹거리, 에너지 수단을 어떤 규모로 어떻게 규모 있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생태계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유기적인 관계, 호혜적 관계로서 서로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현대 자본주의 경제, 사회, 정치 체제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유기적 관계를 내면화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매일의 삶을 통해 실천해 가야 하는가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과제는 무거운 책임이기도 하지만 초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희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덧붙임: “팔레스타인의 지난했던 폭력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 중단과 봉쇄 해제가 이루어져 민간인 보호, 인도적 지원 보장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남궁영미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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