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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역사조요경(历史照妖镜 )
오늘 우리가 얘기할 것은 숭정제때 가장 위험한 직업이었던, "병부상서"에 관한 것이다.
우선, "병부상서"라는 직위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명나라때, 병부상서는 육부중에서 병부의 최고행정장관으로, 전국 위소군관의 선발수여, 훈련, 차량, 무기관리등의 정령을 관장하는 정2품의 고관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병부상서"는 대명제국의 모든 정규군군사역량을 장악했고, 절대적인 실력을 가졌다고.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병부상서"는 모두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이 맡고,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그러나, 숭정제때 상황은 달랐다.
1627년 숭정제가 즉위하고, 1644년 숭정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짧은 17년간 그는 모두 18명의 병부상서를 교체했다. 그중 12명은 비명에 죽는다.
계산해보면, 평균 1년여에 1명의 병부상서가 숭정제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제1대: 최정수(崔呈秀)
최정수는 천계7년, 즉 1627년 병부상서에 올랐다. 그는 또한 숭정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최초의 병부상서이기도 하다.
숭정제는 그의 조상 주원장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숭정이라는 연호를 정식으로 반포사기 전에 먼저 병부상서 최정수(1548-1627)를 죽여버린다.
이 자는 죽을만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충현의 양아들 최정수로 조정내에서 위세를 떨쳤었기 때문이다.
제2대: 염명태(阎鸣泰)
염명태는 1627년 최정수에게서 병부상서직은 넘겨받았다. 그도 최정수와 마찬가지로 '엄당(阉党)'의 일원이었다.
만력26년, 염명태는 진사가 된다.
천계연간, 염명태의 관직은 산동안찰부사(山东按察副使)를 지낸 바 있고, 그 후 손승종(孙承宗)을 따르며, 요동순무(辽东巡抚)를 맡는다. 그후 위충현에 빌붙어, 아부를 잘하면서,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이 된다.
위충현에 아부하기 위하여, 그는 계(蓟), 요(辽)등 병가의 중지에 위충현을 위해 7채의 생사(生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사당)를 짓는다.
그래서, 위충현이 제거된 후, 염명태는 자연스럽게 최후가 좋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관의 탄핵을 받아 숭정제에 의해 변방으로 유배보내어지게 되고, 유배지에서 요역에 종사하던 중에 사망한다.
제3대: 곽유화(霍维华)
천계4년(1624년) 겨울, 곽유화는 형과급사중(刑科给事中)이 된다. 이때는 위충현이 완전히 득세하고 있던 때이고, 그는 바로 엄당에 가입한다. 삼안을 추론하고, <광종실록>을 고쳐쓴다.
천계5년(1625년) 십월 태복시소경(太仆寺少卿)으로 전임하고, 다음해 구월 태복시경(太仆寺卿)이 된다. 그 후 병부우시랑이 된다.
천계7년(1627년) 칠월 병부상서 왕지신(王之臣)이 변방으로 나아가 군대를 감독하면서 그가 병부의 일을 책임진다. 팔월초이틀, 영금대첩(宁锦大捷)의 전공으로 병부상서로 승진한다. 구월, 곽유화는 자신의 영금대첩으로 받은 직위를 원숭환(袁崇焕)에게 넘겨달라고 청했다고 질책을 받는다. 십이일, 최정수가 병부상서를 이어받고, 곽유화는 황극전(皇极殿)을 중수한 공으로 태자태보(太子太保)의 직위를 받는다.
1627년 구월 그는 명의종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위충현이 곧 타도될 것으로 생각하여, 급히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한다.
위충헌, 최정수가 죽은 후, 곽유화의 병부상서직은 회복되고, 북경의 병무업무를 처리한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위충현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았다.
숭정원년(1628년) 사월하순, 숭정제는 대리시소경(大理寺少卿) 유정선(刘廷宣)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원숭환이 오기 전애 잠시 왕지신을 대신하여 서리독사(署理督师)하게 한다. 오월초, 공과급사중(工科给事中) 안계조(颜继祖)에게 탄핵당해, 그가 일찌기 '엄당'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숭정제는 의견을 들어 그를 파면한다.
그후 그는 계속하여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숭정2년(1629년) 흠정역안에 결교근시차등으로 이름을 올린다. 십월, 곽유화는 남락현(南乐县)으로 충군(充军)된다. 숭정구년(1636년) 병자지변(丙子之变)이후 어사 당세제(唐世济)에 의해 변방의 인재로 추천되나, 숭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당세제를 형부감옥에 하옥시킨다.
다음해 정월, 곽유화는 수소(戍所)에서 우울하게 세상을 떠난다.
제4대: 원숭환(袁崇焕)
숭정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병부상서중에서 원숭환의 지명도가 가장 높고, 가장 억울하게 죽었다.
일찌기, 그는 스스로 요동의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요청하였고,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영원대첩(宁远大捷)과 영금대첩.
숭정제가 즉위한 후, 원숭환은 병부상서에 임명된다.
1629년, 홍타이시(청태종)는 부대를 이끌고 우회하여 관내(산해관안)로 들어와 북경을 포위한다. 원숭환은 천리를 달려 관외(산해관바깥)에서 북경으로 와서 황제를 보위하고, 홍타이시와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숭정제는 "찬주화의(擅主和议)", "전륙대수(专戮大帅, 모문룡을 죽인 것을 가리킴)"의 두 죄명으로 원숭환을 하옥시킨다.
숭정3년 팔월, 원숭환은 능지처참당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무지한 양민들은 앞다투어 그의 살을 씹어먹어 한을 풀었다."
제5대: 왕재진(王在晋)
이 사람은 능력있는 인물이다.
왕재진은 천계2년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에 임명되어, 요동, 계진, 천진, 등래를 경략하며, 웅정필(熊廷弼)을 대체한다.
당시 조정의 연수입은 겨우 300만냥백은이었는데, 관녕금방어선에서만 매년 600만냥을 소모했다. 재정의 무저동이 된 것이다.
왕재진은 재정과 군사간의 연계를 깊이 인식했고, 군사비지출을 통제하는 핵심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변방방어선을 계속하여 축성하는 것은 지속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땅히 재정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는 손승종의 전략과 대립했다. 손승종은 방어선구축을 통해서 요동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고, 야전의 중요성은 무시했다.
왕재진의 책략은 산해관(山海关)을 공고히 해서, 비용지출을 줄이고, 시기를 기다려 요동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조정은 손승종의 편이었고, 그는 남경으로 좌천된다.
숭정원년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경진(张庆臻)이 칙서를 고친 사건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후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제6대: 왕흡(王洽)
1628년, 당시 병부상서로 있던 왕재진이 파면된 후, 숭정제는 조회때 왕흡이 용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즉시 그를 병부상서로 임명한다.
왕흡은 부임후 군정에 관한 열가지 일을 상소했는데, 모두 옳은 말이어서, 숭정제는 모두 받아들인다. 다만 나중의 사실은 증명한다. 왕흡은 그저 수화침두(绣花枕头)였다. 보긴 좋지만 쓸모는 없었다.
후금군대를 맞이하자, 명나라군대는 연전연패한다.
1629년, 홍타이시는 후금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기습한다. 대명군대는 연전연패했다.
이때 누군가 숭정제에게 말한다. 옛날 가정제가 정여기(丁汝夔)를 죽이자, 후임으로 올라온 사람이 적을 물리친 바 있다고. "정말 그런 적이 있느냐?" 숭정제는 바로 왕흡을 가두고, 죄명을 덧붙여 죽이려 한다. 왕흡은 놀라서 참수당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일설에는 굶어죽었다고 한다.
제7대: 손승종(孙承宗)
손승종은 명희종때의 대들보이고, 숭정제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천계2년의 병부상서이다. 원숭환, 조대수(祖大寿)등이 모두 그의 부하였다. 그리고 천계5년 은퇴후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동안 그는 대명의 북방영토를 지켰고, 대포 한발로 누르하치를 하늘로 보내버린다.
숭정2년(1629년), 원숭환이 하옥되자, 다시 손승종을 기용한다.
나중에 부하였던 조대수가 청나라에 투항한 건에 연루되어, 숭정제의 신임을 잃고, 다시 한번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칠십이었다.
숭정11년(1638년), 청군이 손승종의 고향인 고양(高阳)으로 쳐들어온다. 집안에서 쉬고 있던 손승종은 전체 성의 군민을 모아 성을 지킨다. 성이 함락된 후, 칠십육세의 백발노인은 대명에 무릎을 꿇어 절을 한 후, 화살줄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그외에 그의 다섯 아들, 여섯 손자, 두 조카, 8명의 조카손자가 모두 전사한다.
제8대: 신용무(申用懋)
신용무는 신시행(申时行)의 아들이고, 중국문학에 중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부임했을 때는 마침 후금군이 퇴각할 때였고,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달려왔던 군대가 군량을 받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신용무는 하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하야한 이후에도 강남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속 친구들과 취생몽사하는 생활을 즐겼다. 병부상서들 중에서 가장 노년이 괜찮았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제9대: 양정동(梁廷栋)
1630년, 양정동은 병부상서에 임명된다. 양정동이라는 인물은 재주가 상당히 있었고, 숭정제의 신임을 받았다. "중추에 한해 이상 있으면서, 병사에 관해 말한 것들이 적절해서, 황제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1635년, 청나라군대가 장성 희봉구를 우회하여 관내로 침입하고, 경사를 공격한다. 청나라병사들이 지나간 곳은 마침 양정동이 관할하는 곳이었고, 그는 이에 대한 직접책임을 지고, 대죄입원(戴罪入援)하도록 명받는다. 양정동과 나유녕(罗维宁) 삼변총독은 겁을 먹고 감히 나서서 싸우지 못했다. "모두 겁을 먹고 감히 나가 싸우지 못한다. 그리하여 보저, 순의, 문안, 영청, 웅, 안숙, 정흥의 여러 현과 안주, 정주를 차례로 빼앗기게 된다."
숭정제의 처벌을 겁내어, 양정도는 매일 대황(大黄)을 복용하여 독성이 발작하여 사망하게 된다.
제10대: 웅명우(熊明遇)
이 사람은 동림당(东林党)으로 문인기질이 있었고, 전투능력은 없었다.
역사에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저 시사가부(诗词歌赋)에 이름이 나올 뿐이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당시 홍타이시가 선부(宣府)를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쳤고, 순무(巡抚) 심계(沈棨)가 사사로이 홍타이시와 합의를 하여, 돈을 건네주고 청군을 물러가게 하려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숭정제에게 목이 잘린다. 웅명우는 숭정제의 면전에서 심계를 변호하는 말을 몇마디 했고, 결국 숭정제의 분노를 사서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후 그는 관직에서 떠난 상태였다.
제11대: 장봉익(张凤翼)
장복익은 위충현과 관계가 아주 긴밀했고 ,일찌기 위충현을 위해 생사를 지은 바 있다.
숭정제가 즉위한 후, 그는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한다. 그후 장봉익은 변방을 지킨 대신이라는 점을 참작받아 사면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봉익은 다시 기용되었고, 계,요,보정의 군무를 총독한다. 전공으로 태자소보, 병부상서로 승진한다.
그러나 1629년, 홍타이시가 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진격한 "기사지변(己巳之变)"떄, 장봉익은 왕흡이 하옥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화를 면하기 힘들다고 여겨 매일 대황을 복용한다. 그 결과 후금의 병사들이 퇴각하였는데, 그는 죽어버린다.
제12대: 양사창(杨嗣昌)
양사창은 숭정제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그가 병부상서를 맡은 것은 전혀 의외가 아니었고, 그는 또한 내각에도 들어간다.
양사창은 십면장망(十面张网)의 초적계획(剿贼计划)을 세운다. 일거에 농민의 반란을 토벌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고양상(高迎祥)은 피살당하고, 이자성(李自成)은 겨우 18기를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치며, 장헌충(张献忠), 나여재(罗汝才)는 투항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겨우 반년이 지난 후, 농민반란은 다시 일어난다. 양사창은 할 수 없이 직접 전장으로 나간다. 그러나 좌량옥(左良玉)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하인룡(贺人龙)은 겉으로만 따르는 척하고 실제로는 따르지 않았다. 양사창은 비록 주도면밀하게 계획했지만, 농민반란군을 섬멸시킬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장헌충이 양양을 공격하고, 이자성은 낙양을 점령했으며, 두 명의 왕은 피살당한다. 양사창은 놀란 나머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양사장은 자주 간신으로 불리지만, 실제로 그는 당시 보기 드물게 전략적인 안목을 지녔고, 전체적인 방안을 짤 수 있는 관리였다. 그가 죽자, 명나라의 국세는 더 이상 수습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제13대: 부종룡(傅宗龙)
운남에서 사안기의(奢安起义)를 진압하자, 숭정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병부상서에 임명된다.
재직기간동안 그는 숭정제에게 말했다: "백성은 가난하고, 재정은 바닥났습니다. 황제께서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숭정제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나중에 더 이상 기용할 사람이 없자 숭정제는 부종룡을 다시 기용하고, 그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이자성을 막게 한다. 그러나 패전하여 자결하게 된다.
제14대: 진신갑(陈新甲)
진신갑은 중경 장수 사람이다. 만력36년 거인(举人)이 되고, 1640년에 병부상서에 오른다.
자세히 살펴보면 진신갑은 명나라에서 거인 신분으로 병부상서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1642년, 진신갑은 송금지전(松锦之战)떄 지휘잘못으로 대패당한다. 숭정제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비밀리에 청나라조정과 합의하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협상기간동안 진신갑의 실수로 청나라와 협의중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어, 여론이 발칵 뒤집히게 된다.
숭정제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고, 분노하게 된다. 그리하여 진신갑을 길거리에서 참수한다.
나중에 급사중 심신(沈迅)이 그래도 계속하여 진신갑을 공격하자, 숭정제는 차갑게 응수한다: "너는 그만도 못하다!"
제15대: 장국유(张国维)
진신갑이 죽은 후, 장국유가 후임으로 병부상서에 앉는다.
당시 이자성이 이미 개봉을 점령한 때였다. 대청의 군대는 남으로 내려가 연운항까지 진격했다.
장국유는 혼자의 힘으로는 청군에 맞설 수가 없고, 명나라가 곧 망할 지경이라고 느낀다. 그는 만감이 교차했고,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심사숙고후, 장국유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백성을 지키기로 한다. 만일 그가 죽지 않고, 청군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화를 입는 것은 언제나 백성들이다. 양주도성(扬州屠城)이라는 생생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장국유는 현령을 불러 후사를 부탁한 후, 현령에게 자신이 순국하는 것을 지켜보게 한다.
그는 진지하게 대명의 관모와 관포를 입고, 정중하게 집안의 연못 앞에 서서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뛰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익사한다.
현령과 장국유의 가족들은 그의 당부에 따라, 그의 사체를 중당의 태사의에 단정하게 앉혀주어 마치 죽지 않은 사람인 것철머 두었다.
그후 청군이 장국유의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가 태사의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부지불식간에 절을 한다. 일부 청나라병사들은 통곡하기도 하였고, 눈빛이 처연했다.
청나라장병들은 그를 잘 장사지내주었고, 그로 인하여 성을 도살하지 않게 된다.
건륭제가 황제에 오른 후, 장국유의 영웅적인 사적을 들은 후, 그도 장국유의 애국적인 행동에 감동해 마지 않는다. 비록 장국유는 청나라의 적이었지만, 건륭제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에게 "충민(忠敏)"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후손들을 후대하도록 명한다.
제16대: 풍원표(冯元飇)
그가 병부상서로 있을 때 중병에 걸려, 3개월간 병부상서로 있었으나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땅을 이자성에게 내준다.
나중에는 병으로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자 숭정제는 은퇴하도록 명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제17대: 장진언(张缙彦)
그가 병부상서로 있을 때는 이미 완전히 되돌릴 힘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매일 게으름만 피우다가 나중에 숭정제에게 파면당한다.
숭정제가 죽은 후, 그는 대순에 투항하고, 다시 대청에 투항한다. 그는 명나라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하여 부정부패를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결국 들통나서 영고탑으로 유배당한다.
제18대: 이건태(李建泰)
1644년 신년 초하루, 이자성은 군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북경으로 진격했다. 숭정제는 초조해마지 않았다. 그는 대신들에게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맞이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이 나오자 대신들은 난리가 난다.
기실 숭정제도 직접 군대를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때 누군가 나서서 자신을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울며불며 말만 할 뿐, 그 어느 누구도 대신 나서겠다고 하지 않는다.
이때 대학사 이건태가 나섰다. 자신이 황제를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해 북경을 지키겠다고.
숭정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우리 대명에 아직도 충신이 남아 있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대전을 나서자마자 이자성에 투항한다. 성문을 열고 농민군과 안팎에서 호응하여 숭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군대가 오삼계의 항복을 받아내자, 그는 다시 이자성을 버리고 만청에 투항한다.
청나라 순치2년(1645년), 순치제는 명을 내려 숭정제때의 옛관료들을 그대로 기용하도록 조서를 내린다. 이건태는 청왕조에 의해 홍문원대학사의 직취를 받아 중용된다.
얼마 후, 청왕조는 이건태를 <명사>편찬의 총재관으로 임명한다.
그래서, <명사>의 대부분 내용은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엉터리같은 작자가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순치6년(1649년), 산서일대의 농민들이 청왕조의 잔혹한 통치와 민족압박에 불만을 품고 곡옥일대에 모여든다. 이자성농민군의 옛 장수들의 지휘하에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태는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나, 대패한 후 농민군에 투항한다.
그후, 청왕조는 산서의 농민군을 토벌한다. 이건태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보고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청군은 이건태를 붙잡아 북경으로 압송하여, 순치제의 처분을 기다린다. 순치제는 형부에서 상세히 심문한 후 엄히 처벌하도록 명한다.
순치7년(1650년), 이건태는 북경성에서 주살된다.
그리하여 사실상 숭정제가 말한 것처럼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망쳤다"가 아니라, "짐이 여러 신하를 망쳤다"가 맞다. 이 18명의 병부상서중에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오직 1명만이 제대로 은퇴했고, 두 명은 투항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최후가 좋지 못했다.
결과가 좋지 못했던 '병부상서'들은 대명에 대한 충성심이 컸던 인물들이다. 예를 들면, 손승종, 장국유같이. 그리고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도 있었다. 원숭환, 양사창, 왕재진같이.
그러나 결과적으로 숭정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중용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계속하여 사람을 바꾸기만 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바꾸는 것은 전란시기가 아니라 평화시기라 하더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마침내, 숭정제의 이런 멍청한 짓으로 인하여 원래 간당간당하던 대명왕조는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향년 2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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