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숲을 간신히 헤쳐나오고 보니 벌써 밤이었다. 온통 깜깜한 가운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완전 시골아냐...."
진기가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예? 시골이라니요, 테닌만큼 번성한 마을도 별로 없을텐데요.....?"
"예, 그런 것 같군요."
네가 아위크의 말에 동의하자 진기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해 안간다 이거지.
하지만 여기를 서울하고 비교하면 약간 곤란하다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거냐?"
내 말에 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판타지 세계. 서울의 화려한 네온사인도 가로등도 차의 라이트도 없다.
내 말에 아위크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말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쨌든 일단 가 봅시다."
"그래, 지금은 밤이라 잘 안보이겠지만 낮에 보면 굉장하다고."
버트가 발을 옮기며 말했다. 그 옆에서 코커스가 고개를 끄덕이는게 보였다.
지크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 테닌이란 마을은 꽤 멀어보였지만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가까이서 보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꽤나 높고 웅장해 보였다.
그리고 성문 앞에서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다가가자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통행증을 보여주시오."
아위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를 돌아보았고, 지크는 가방 속에서 작은 종이 꾸러미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는 횃불에 종이를 비추며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돌려주며 말했다.
"좋소. 그런데 이 통행증엔 네명의 신분 밖에 안 적혀 있군. 나머지 두명은 누구요?"
지크는 통행증을 가방 속에 쑤셔 넣으며 무심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눈으로 지크를 마주 보았고, 진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딴청 부리기 시작했다.
지크의 눈을 따라 기사의 눈도 나와 진기 쪽으로 향했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때 딴청을 부리던 진기가 걷어찬 돌멩이가 내 종아리로 돌진해왔다.
그 돌멩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이 빌어먹을 진기 자식! 내가 진기를 팍 째려보자 진기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런 우리를 보고 있는 지크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진 듯 했다.
이어, 지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은 안개의 숲에서 만났는데, 짐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기사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와 진기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은 당당하게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기사의 눈이 우리의 배낭에서 멈추자 아위크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저, 저 배낭은 우리의 짐을 나눠들은 겁니다."
그제야 기사는 의심의 눈빛을 풀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알겠소. 그런데....아무래도 옷차림이 이상한데...?"
난 내 옷을 내려보았다.
청색 힙합바지에 파란색 박스티. 거기에 하얀색 나이키 운동화. 허리엔 하얀 셔츠를 살짝 걸쳐 맸다.
손목엔 커다란 방수용 전자시계. 라이트 기능은 물론이고, 알람 기능에 나침반까지 포함되어있는 최신판 전자시계다.
그리고 귀걸이. 파란색 사파이어에 금으로 된 사슬 모양의 줄이 연결되어 있고 그 끝에 역시 금으로 된 아버지 회사의 문양이 매달려있다. 아버지는 무역회사를 하시는데, 그 회사 문양이란게 마차 바퀴를 용이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꽤 멋있긴 하지만 17년 동안이나 이 귀걸이만 하고 다니다 보니까 질린다. 게다가 한쪽 밖에 없어서 고개가 왼쪽으로 쏠리는 느이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4개나 했다. 위에서부터 다이아몬드, 라피스라쥴리, 루비, 사파이어...
진기 말로는 갑부 티를 팍팍 낸다지만 이게 진짠지 가짠지 누가 알겠는가. 다른 사람은 다들 가짜인줄만 알고있다.
우리 아버지가 세계 재벌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진기 빼고는..
그런데 지겨우면 빼고 딴 거 하지 왜 17년간 죽어라고 이것만 하고 있느냐....하면, 이 귀걸이가 진짜 웃기는게 뺄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귀를 찢지 않는 이상 빼는 건 불가능 하다랄까. 평생 이거 달고 다닐 생각하면 정말 눈물난다.
옆에 진기를 보니 정말 가관이다.
하얀색 힙합바지에 검은색 벨트를 차고...거기까진 좋았다. 근데 그 위에 상의가......흰색 조끼 달랑 하나.
게다가 가슴이 깊게 파여 있어 이번 여름 내내 태운 구릿빛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팔뚝....그래, 니 팔뚝 굵다. 왼쪽 팔목에는 은색 팔찌 3개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하얀색을 좋아해서 머리에도 흰색 브릿지를 넣었다.
귀걸이도 은으로 된 링을 각 각 3개씩 6개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걸이로, 일명 개목걸이라고 불리우는 이 목걸이는 둥근 링 모양으로 목을 감싸고 있고 앞에 진기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야쿠자의 문양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그 문양이란 긴 검을 용이 휘감고 있는 것으로 이것 또한 꽤나 멋있지만...
진기 역시 17년 동안 이것만 하고 다닐려니 지겹고 답답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땐 목걸이가 헐렁거려서 답답하진 않았겠지만 지금은 목에 목걸이가 딱 맞는 이유로...여기서 진기 목이 조금만 더 두꺼워지면 목졸라 죽기 딱 좋은...크흠....이기 때문인진 몰라도 진기의 목은 더이상 굵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덩치에 비해 목이 조금 갸냘퍼보이기도 한다.
근데 왜 목숨걸고 저 목걸이만 하냐면....나와 같은 이유다. 저 웃기지도 않은 목걸이는 뺐다 꼈다 할 수 있는 고리가 없다. 즉, 한번 끼면 죽어도 못 뺀단 소리. 난 이 귀거리 빼려면 귀만 찢으면 되지만 진기는....목을 댕겅~ 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이 목걸이도 은으로 되어 있어서 진기가 걸치고 있는 옷이며 장신구는 모두(벨트만 빼고) 흰색 일색인 셈이었다. 흰색의 옷들은 진기의 갈색 피부와 대비 되면서도 어우러져 딱 눈에 띄었다.
대강 나와 진기의 옷차림을 둘러본 나는 다시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우리의 옷차림을 살펴 보더니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바로 내 왼쪽귀에 매달려있는 그 빌어먹을 귀걸이였다.
그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횃불을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비추어들었다. 난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뒤로 한 발 물러 섰다. 그 기사의 행동에 모두들 나를 쳐다보았다. 기사의 시선을 따라 내 귀걸이 앞에서 시선을 멈춰선 모두는....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모두의 반응에 나는 영문을 몰랐다. 뭐가 잘못된건가? 이건 아버지 회사 문양이라 이쪽 세계 사람들이 알아 볼리는 없을 텐데...? 난 불안한 눈으로 진기를 바라보았고 진기는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 귀걸이가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난 귀가 아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자코 있었다.
진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서 진기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또 멈춰서 버렸다.
진기의 목걸이었다..
3. 야쿠자와 무역 회사...............(2)
-털썩
순간의 정적을 깨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위크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코커스는 입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버트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 무뚝뚝하고 표정 없던 지크마저 눈을 크게 뜨고 진기의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쪽에 서있던 기사도 달려와 진기의 목걸이와 내 귀걸이를 멍하니 번갈아 보았다.
우리 앞에서 횃불을 들고 있던 기사는 아예 선채로 기절해버렸다.
나와 진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들그러지? 귀걸이랑 목걸이 한 사람 처음보나? 그럼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컬쳐 쇼크?!!
흠....그건 아닌것 같군. 코커스도 목걸이를 하고 있으니까. 그럼 뭐야? 뭐지?
다들 부동자세로 서 있는게 이상했던지 저쪽에서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무슨일이야?"
내 앞에서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간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의 표본으로 뽑힐만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기사 둘이 거수 경례를 했다.
"충성! 아무일도 아니....지 않습니다!"
거수 경례를 한 기사의 얼빠진 소리에 방금 달려온 기사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일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일이냐?"
"예, 그게...저....저기....그러니까..."
역시나 얼빠진 소리를 더듬어가며 내 눈치와 기사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처절한 응징을 받았다.
-딱!
"악!!"
음...꽤 아프겠군. 방금 얼빠진 기사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솥뚜껑만한 손의 주인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전 테닌의 기사대장인 한스 맥심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험가이십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난 아위크가 대답할 줄 알고 가만히 있었고 아위크는 여전히 얼이 빠져있었다.
지크가 대답했다.
"예, 저희는 모험가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지크가 나와 진기를 흘끗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이분들이라니? 지크씨가 뭘 잘못드셨나?
난 재빨리 말꼬리를 잡아챘다.
"이분들이라뇨, 그냥 낮춰부르세요. 꼭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에헤헤. 아, 그리고 한스....맥....."
"한스 맥심입니다."
"아....네. 혹시 부친께서 커피공장을.....?"
"네?"
"아...아닙니다...하하.."
옆에서 진기가 숨죽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짜식, 그럼 어떡하냐. 맥심하니까 자동으로 커피 생각 나는걸.
나는 진기의 등짝을 한 대 후려갈기고 나서 맥심인가 멕스웰인가 하는 경비대장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쪽 분들과는 안개....뭐라더라? 어쨌든 거기서 만나서 같이 온 것 뿐입니다. 저분들은 통행증이 있으니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통행증이 없는데......어떡하죠?"
"....안개....계곡을 통해서 오셨습니까? 사이드로드를 통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사이드로드? 거긴 또 어디야?
난 지크를 쳐다보았고, 경비대장의 시선도 자연히 지크를 향했다.
지크는 나와 경비대장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희는 분명히 안개계곡을 통해서 왔습니다. 사실...여기 이분들이 안계셨더라면 저희는 벌써 안개계곡에서 시체로 남아있었겠지만요."
"......믿을수가 없군요. 정말 안개계곡을 통해서 오셨습니까? 이런.....좀 더 자세한 얘길 듣고 싶군요. 같이 술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지크는 일행들을 둘러보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옆의 진기를 흘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희는 통행증이 없는데요?"
경비대장 한스는 나와 진기를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미소지으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경비대장인 저와 함께 있는 이상은 말입니다."
그는 그대로 발을 돌려 성문 안으로 들어갔고, 지크 일행도 함께 들어갔다. 아위크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발걸음이 헤롱거리는게 마치 술취한 듯한....진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해? 안가?"
"아아....가야지. 근데, 저와 함께 있는 이상은 말입니다라는데?"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얘기겠지."
"응. 근데 아까 사람들....왜 그렇게 놀랐을까?"
"........글쎄? 나중에 지크한테 물어보자."
"응, 어서 가자. 어이~ 아위크씨!! 술취했어요? 부인이 봤다면 몽둥이 들고 쫓아 왔을지도 몰라요!!"
"난 부인 없어!"
...저 와중에도 대답은 꼬박꼬박 하는구만. 쳇, 부인 없는게 글케 자랑인가?
"같이가요오~!"
나와 진기는 성문으로 뛰어들어갔다.
3. 야쿠자와 무역회사 ................(3)
"이봐! 여기 맥주 한 잔 더!!"
버트가 얼굴이 벌개져서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버트으~ 벌써 여섯잔째야, 제발 그만 마셔~!!"
그 옆에서 코커스가 술잔을 빼앗으며 버트를 뜯어말렸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기에게 물었다.
"성직자가 술 마셔도 되는거야?"
"......성직자도 인간이야."
"아, 그래."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 광경을 계속 지켜봤다. 그 사이 종업원이 맥주를 가져왔고, 버트가 막 받아들려는걸 코커스가 뺐어들더니 원샷해버렸다. 술잔에서 입을 뗀 코커스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테이블에 머리 박고 잠들어버렸다. 버트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또 다시 주문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옆 테이블에선 한창 얘기 중이었는데, 지크가 안개 계곡에서의 일을 경비대장 한스에게 얘기하면 옆에서 아위크가 보충 설명 해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기절하고 일어나보니 오크들은 다 죽어있고, 저 분들이 계시더군요."
"아, 지크는 기절하고 있어서 못봤겠지만 정말 대단했어요! 사실 저도 기절하다 일어나서 중간에서부터밖에 못봤지만, 오크를 한 방에 날려버리더라니까요! 역시 전설의...."
아위크가 말하다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전설의?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진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와 아위크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셋의 시선이 나와 진기에게로 쏠렸다.
"아, 얘기하시는데 죄송해요. 사실 궁금한 점이 쫌 있어서요."
난 경비대장 한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위크를 향해 물었다.
"아깐 왜 그렇게 놀라신거예요?"
아위크는 흠칫하더니 지크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지크는 술잔에서 입을 떼며 내 귀걸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크의 시선을 따라 내 귀걸이를 본 한스는 그대로 입 안에 있던 술을 내뿜어 버렸고, 그 희생양은 진기였다. 냐핫, 쌤통!
진기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한스를 째려보았지만,
"사과받긴 글렀군, 쿡쿡."
"쳇. 마, 넌 뭐가 좋다고 웃어! 웃지마!"
"아~ 자식 봐라, 이거. 남이사 웃던 울던 북치던 장구치던 내 여편네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잔소리래, 잔소리가~!"
...내 장난스런 말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처절한 응징이 되돌아왔을 뿐이다.
-퍽~!
"이건!!"
"꾸에엑~!"
갑자기 벌떡 일어선 한스는 내 귀걸이를 홱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난 귀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한스 쪽으로 끌려갔고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러야 했다. 난 눈물을 찔끔 흘리며 한스에게 고함을 빽 질렀다.
"한스씨! 귀 찢어지겠어욧!"
"이건...이건...이거언!!"
"이건 뭐욧!! 이거덩 저거덩 간에 귀 좀 놓고 말해요오!!"
"아....미안."
한스는 내 귀를 놓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지크를 보며 말했다.
"이건 설마....그겁니까?"
"아무래도...그건것 같습니다."
"진짜...그거라니..."
이게 웬 지시대명사?!!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나의 물음에 한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진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거....아니, 겁니까?"
진짜 몰라서 묻느냐고? 아무렴 뻔히 알면서 물었을까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기를 쳐다봤고, 진기는 한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실버라인」도 모르십니까?"
"...실버....라인...?"
난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진기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진기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한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한스는 그 무언의 압력에 실버라인인지 뭔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쯤 전에 당신들 만한 나이의 소년 둘이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들 역시 당신들처럼 안개계곡을 통해 왔죠. 안개 계곡은....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대부분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긴 하지만 안전한 사이드로드를 통해 이곳, 테닌으로 오죠. 제가 알기로 그 안개 계곡을 무사히 지나온 사람은 아마 그들이 최초일겁니다. 당신들은....두번째고요. 어쨌든 안개 계곡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모험을 하며 각국을 여행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세계최강으로 불리워질때쯤 그들은 모험을 끝내고 케미아....우리나라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단 3년 만에 최대최강의 조직을 만들어냈죠. 그들의 이름을 딴 조직, 「실버」와「라인」을요. 그들이 모험할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실버와 라인 이라고 불렀었거든요...."
"자...잠깐만요. 그러니까...실버라인이란게 조직 이름....인가요?"
"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버는 세계 최강의 자유기사단이고, 라인은 세계 최대의 부를 가진 무역회사죠."
진기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자유기사단....?"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기사단입니다. 기사단장의 의지대로 움직이죠."
호오...그러셔? 하지만....
"대체 그게 저희와 무슨 상관이죠?"
한스는 한쪽 눈썹만을 치켜올리는 재주를 선보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귀걸이와 목걸이 말입니다."
엥? 내 귀걸이랑 진기 목걸이가 모가 어때서?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스를 쳐다보았고, 한스는 남은 한쪽 눈썹까지 치켜뜨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에엑? 정말 모르십니까? 정말로요?"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세차게 끄덕인 나머지 잠시후 가벼운 후유증이....
머리를 움켜쥐고 잠시 안정을 취하고있는 나를 보던 한스는 한숨을 푹 내쉬으며 말을 이었다.
"실버라인은 설립된지 단 3년 만에 세계 최강으로 급부상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요. 그리고 그들이 이 곳에 온지 5년째 되던 날,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레드 드래곤 이신 아사히나님과 이곳 케미아의 제 1 왕녀 이셨던 제미니아 님과 함께요.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여전히 실버라인과 귀걸이와의 관계에 대해선 한마디의 언급도 안한채 한스는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나와 진기는 그의 다음말을 기다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의 매혹적인(?) 시선에 압도당한 한스는 결국 맥주를 잘못 들이켰는지 한참을 켁켁거리더니 말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십년 후에 우리의 후계자들이 그 증표를 가지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증표는 바로 실버라인의 문양이 새겨진 귀걸와 목걸이다.』....라고요."
실버라인의 문양이 새겨진 귀걸이와 목걸이라고? 하지만 내 귀걸이는 분명히 우리 아바이(아버지)의 무역회사 문양이고, 진기 목걸이는 걔네 아버지의 야쿠자 문양....인데..?!! 이게 어케 된 일? 가만....
"그...사람들이 나타난게 25년 전이고, 5년 동안 있다가 사라졌다고요? 레드 드래곤과...왕녀와 함께?!!"
"네. 들은 바로는 서로 사랑해서 같이 갔다고 하더군요. 레드 드래곤의 인간일 때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고, 왕녀님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우셨다고 하니까요."
"허걱....그...그렇다면 설마....?"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확인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진기를 보았다. 진기는 간질환자의 증세를 보이는 나를 심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아...아마도. 너희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25년쯤 전에 사라졌다가 5년뒤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들었어. 두 여자와 함께...그 여자가 바로 너희 어머니랑 우리 어머니고. 그리고 3년만에 최대최강의 무역회사와 야쿠자 조직을 만들고....우리가 태어난거지. 아마 여기서 '실버'라는 자유기사단을 만든건 우리 아버지고, '라인'이란 무역회사를 만든건 너희 아버지겠지."
이...이런...말도 안되는...!! 진기, 이녀석은 왜 이렇게 침착한거냐?!! 난 지금 머릿속이 뒤죽박죽인데!! 크어억~ 게다가 제일 화나는 거스은~!!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 떠났다는 건...."
그리고 우리에게 절대로 빼지 못할 목걸이와 귀걸이를 채웠다는 건...!!
"이런 상황을 예측.....아니, 어쩌면 계획했을 수도.."
"끄어억~!!! 용서 못해!! 이 빌어먹을 아버지, 담에 만나면 가만 안둬엇!!"
그러니까 이런 빌어먹고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상황을 계획한게 우리 아버지....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영산과 이쪽 세계...안개 계곡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버지는 그걸 뻔히 알면서 이곳으로 소풍가는 걸 말리지도 않.....아니, 어쩌면 교장을 협박해서 소풍 장소를 무영산으로 정했는지도 모르지. 나랑 진기를 이쪽으로 보낼려고....하지만 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긴 해야겠고, 기껏 키워놓은 조직을 버리고 가자니 아깝기도 하고 그랬겠지. 그래서...."
진기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저녀석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수록 침착해지는 녀석이니까...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도를 닦지 못했단 말이닷!!
폭발 일보직전의 상태로 돌입한 나를 힐끔 쳐다본 진기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버지들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셨단 얘기는 우리도 다시 갈 수 있단 뜻이야.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말라구."
....그렇지. 다시 돌아갈 수 있어....큭큭....아버지, 두고봐여. 반드시 돌아가서 처절한 복수를 해드릴테니....
난 흥분을 가라앉히며 내 앞에 놓인 잔을 들고 그대로 원샷해버렸다. 진기 녀석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다시 한스를 보며 물었다.
"그럼....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아십니까?"
우리 하는 양을 보며 멍하니 있던 한스는 갑작스런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아...아뇨. 전 그냥 사라졌다는 얘기만 듣고...."
큭...제일 중요한 건 어떻게 사라졌냐...즉, 어떻게 원래세계로 돌아왔냐는 건데...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진기에게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지크가 말했다.
"우리도 전해 들은 얘기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실버라인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실버라인이라면...그 자유기사단이랑 무역회사라는데요? 그게 어디있는데요?"
"둘 다 이곳 케미아에 있습니다. 본부는 케미아의 수도에 있고, 지부는 없는데가 없죠. 아마 이 마을에도 있을겁니다."
호오....없는데가 없다라...하긴 최대최강이랬으니 그 정돈 되야쥐...
"그럼 지금 당장 가보시겠습니까?"
지금? 옆에 진기를 보자 헬쑥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역시....지금은 좀 쉬고 싶은데. 육체적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 컸단 말야...
"지금은 좀 쉬고 싶은 데요....내일 가면 안될까요?"
"아, 네. 피곤하시겠군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근데....쉴 곳은 있으십니까?"
쉴 곳? 물론 없지. 또 땅바닥에서 자야하나? 여긴 여관도 없나보지? 아차, 있다해도 돈이 없구나..크으....
내가 고개를 살레살레 내젓자 아위크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흰 여관에서 묶을 건데 괜찮으면 같이 가시죠."
난 최대한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흰 돈이 없는데요..."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여관비 정도야 얼마든지 있으니....저희가 내드리죠."
허걱....이런 횡재가!! 난 감격한 얼굴로 아위크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아까부터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던....
"그런데, 그 존댓말 좀 어떻게 안될까요? 저희가 나이도 어린데....그냥 반말 하세요, 반말"
아위크와 그 일행들, 그리고 한스까지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왜요?"
나의 당황한 물음에 지크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실버라인의 후계자이시잖습니까. 게다가 아까 당신들 말대로라면 케미아의 제 1 왕녀의 아드님과 드래곤의 아들...즉, 이곳 케미아의 왕자님과 하프 드래곤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감히 반말을 하겠습니까."
엥? 그게...그렇게 되나? 그럼 우리 중에 한명은 왕자고, 다른 한 명은 하프 드래곤....인간이 아니란 말야?!!
난 진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어쩐지 인간 같지가 않더라니....휴우...그런 진실이..."
난 곧 이어 올 주먹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아무런 공격도 오지 않았다. 왠일이래~? 방어한답시고 들어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리며 진기를 쳐다보았다. 진기는 피식 웃으며 내게 일격을 가했다. 주먹이 아닌 말로..
"그래? 아까 듣기로 그 드래곤....레드 드래곤이라며?!! 우리 어머니 머리는 은발, 너희 어머니 머리는 붉. 은. 색. 누가 하프 드래곤
이지? 응?"
크어억....그런...X같은...!!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였단 말이야?!! 어무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절규를 하고있는 나를 바라보며 진기는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저 빌어먹을 놈....내가 씹을 듯이 노려보자 진기는 얼른 고개를 지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지크는 말꼬리를 흐리며 한스쪽을 쳐다봤다. 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다음에 또 뵙도록하죠. 아, 술값은 제가 낼 테니 그냥 가십시오. 그리고...."
친절하게도 술값까지 내주겠다고 말한 한스는 나와 진기를 보며 말했다.
"만나뵈서 영광이었습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에 또 만날수 있기를..."
나와 진기를 서로 힐끔 마주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거...다신 안 만날 것처럼 왜 이러세여. 지금 떠날것도 아닌데...어? 혹시 빨리 가버리길 바라시는건....?"
"절대!......아닙니다.."
허걱...놀랬다. 아니면 아닌거쥐 왜 흥분을 하고 그러신담. 난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며 평온한 미소를 띄우고는 말했다.
"그럼, 내일 다시 뵙죠."
"네!"
나는 빙긋 웃으며 문쪽으로 걸어나갔고, 지크는 한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뒤 따라나왔다.
술집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밤공기가 온몸에 둘러싸이는게 느껴졌다. 반팔이라 꽤 추운걸~ 하지만, 조끼만 걸친 진기보다야 낫지, 킥킥. 옆에서 진기의 '니가 무슨생각하는지 다 알고있다!' 라는 듯한 시선을 무시해버리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하늘에 걸린 환한 보름달에 아버지의 낯짝을 그리며.....이 세상의 모든 저주를.
등 뒤로 술 한잔 마시고 꿈의 세계로 여행가버린 코커스를 깨우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