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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 월에....
寶海/ 유 희 민
(제1장)
* 몽유 도원도 - II *
* 몽유 도원도 - II *
수지와 함께 일본에 도착 한 때는 좀 늦은 4월 이였다.
일부러 덴리대학의 개학일정과 맞추어 대학을 방문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수지와 단둘만의 여행이 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집착이나 연구 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정이 될 수 있었다.
마치 신혼여행을 가는 신부처럼 수지는 모든 걸 준비 했고
나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우석이가 그려준 그림 한 점을 챙겨서 가방에 넣고 그리고 성능 좋은 사진기를 점검 하는걸로
나의 준비를 마무리 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순간 긴장감이 풀렸던지 수지와 내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있구나 느낄 정도로,
수지와의 애틋한 사랑보다 나는 그림에 더 집착 해 있었다.
오사카 공항은 몹시도 복잡했다.
축소 지향형의 소니사 모토가 아니더라도 일본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배치를 오밀조밀하게 배치하고
그런걸 그렇게 불편해 하지 않는 특유의 국민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소설 '대망' 과 '삼국지' 를 비교 하곤 한다.
일본의 막후정치를 이끌었던 세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단 세 사람의 이야기를 장황하고
오밀조밀 하게 표현한'대망' 이라는 이야기를 두껍고
여러 권의 소설로 만들 수 있는 게 일본 사람 이다.
반면에 드넓은 광야에 말을 달리고 그리고 수많은 고사 성어와 인물등장 에도 불구하고
단 몇 권의 소설로 만들어 버린 중국의 '삼국지' 나 ' 수호지' 가 그렇다고 한다.
지하철의 운행 중 정전이 되어서 30분 정도를 터널 안에 갇혀 있어도
아무도 불평 하는 사람이 없는 일본을 보고 사람들은
일본 사람을 두고 '잔인 하고 무서운' 사람들 이라고 표현하기 까지 했다.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도저히 스포츠라고 인정 해 주기 어려운 밀어내기식 씨름, '스모'도 그렇다.
하루 세끼를 흰죽만 먹으며 체중을 불려서
그 큰 등치로 선수들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원 밖으로 밀어 내는 운동은
어찌 보면 유치하기 까지 하지만 그들은 그 자체를 자기들만의 문화로 승화 시킨
정말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아리가또' 와 '쓰미마셍'으로 순종과 친절을 상징적으로 내 보이지만
그 뒤에 사람의 목도 한칼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일본도가 숨겨져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렇듯 일본 공항의 입국장에서 느낀 감회는 눈에 보이는 현상 보다는
이면의 감정적인 느낌이 먼저 나에게 다가 왔었다.
수지와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덴리대학의 주소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택시 기사는 너무 멀기 때문에 국철을 이용 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친절한 택시 기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수지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택시로 그곳 까지 가기를 원했다.
수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현재 덴리대학에 있는 몽유도원도를 취재차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이였다.
총명한 그녀 까지도 내가 아직 문예잡지의 유능한 기자로만 알고 있을 뿐 이였다.
그녀의 일본어 수준은 내가 생각한 이상 이였다.
그녀의 전공이기도 했지만 역시 통역으로는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택시 기사의 말처럼 택시는 공항에서 2시간 정도 걸렸다.
드디어 진본을 확인할 덴리대학의 정문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수지야… 우선 간단하게 구경삼아 학교를 한번 둘러보자. 괜찮지?"
"오빠 편할 대로 하세요. 우선 도서관이 어딘지 찾아 봐야 하고…
또 오늘 당장 취재 하고 그럴 건 아니잖아요? …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에 들어오니까 옛날 생각나네.…"
"그래. 학교가 분위기가 좀 다르지?
지금 같으면 한국 대학은 데모다 또는 다른 집회로 좀 산만할 건데…
여긴 최소한 그런 건 없네."
대학은 우리가 생각 했던 것 보다 상당히 크고 좋았다.
정문 앞 간단한 대학의 역사가 영문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1927년 2월 17일 건축을 올리고 4월15일 오픈 한걸로 적혀 있었다.
단과대학으로 출발해서 1947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 된 걸로 기록된걸 보면
아마 해방 전에 설립 하고 해방이 지난 후에 대학으로 승격 되었던 모양이다.
눈에 띠는 한 가지 건물의 조감도가 나의 눈에 보였다.
저곳이다 싶은 곳 이였다.
'Tenri Sankokan Museum(天理 參考官)' 도서관에 보관 되었다고 말들 하지만
아마 그곳에 역사 유물이나 다른 사료가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있던 수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빠.. 아마 저곳에 있겠는데? 박물관 이면…"
"그래 저곳으로 바로 가자.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는 걸로… 의외로 쉽게 볼 수도 있겠는데? “
"그럼 오빠 사진만 찍으면 이곳 일은 다 끝난 거야?"
역시 수지도 여자 였다.
'이곳 일정만 마치고 나면 우린 프리야?' 하는 물음으로 들렸다.
나는 흔쾌히 대답 해 주었다.
"만약 그 그림이 있어서 사진만 찍을 수 있다면…
그럼 다음 일정은 수지 마음대로… 수지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지…
우선은 그 일이 급선무다."
"그럼 다른데 돌아볼 필요도 없네!…오빠…곧바로 그곳으로 가요."
수지는 능청스럽게 받아 넘기면서 내 팔짱을 끼고 박물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학은 깔끔한 일본인답게,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답게, 그리고 젊음이 있는 활기가 보였다.
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을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의외로 교내에서 남녀가 팔짱을 끼고 돌아 다니는 모습은 많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그 흔한 남존 사상 때문 인지도 몰랐다.
막상 박물관 앞에 왔을 땐 의외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박물관은 두종류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었다.
항상 문을 열어 놓고 관람 할 수 있는 '상설전(常設展)'과 '특별전.기획전(特別展.企劃展)이 있었으나
우리는 상설전, 그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크게 두 가지로 '세계의 생활문화' 와 '세계의 고고미술' 나뉘어져 있어서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심미안(審美眼)에 혀를 내 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세계의 생활문화' 전시실에는 북해도의 의복, 생활 속 자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동네 어귀에 세워졌을법한 큰 장승과
심지어 무당의 의복 까지도 전시 되었고 그밖에도 중국과 대만의 모든 문화 습관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필리핀과 그리고 인도네시아 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탈과
그리고 열대 지방의 전통 악기며 의류 따위 까지 전시가 되어 있어서
한때 짧게나마 제국주의로 번성 했던 그들의 역사를 증명 하는 듯 했다.
대단한 일본인들 이였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돌려 '세계의 고고미술'이라고 적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문화유산 따위를 구경하기 위해 이곳에 온건 아니었다.
문화유산의 전시는 건물의 1층과 2층을 빼곡하게 정리 되어 있었고
고미술은 3층을 모두 고미술품만 전시 해 두었다.
그러나 올라가서 그곳을 관람 하면서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 했다.
일본, 중국, 대한민국, 그리고 열국 이라고 분류는 해 두었지만
불상이나 그리고 석탑 같은 조형물 이외에 그림은 없었다.
고미술에 그림이 포합 되어 있지는 않았다.
3층 한켠에 특별 기획전 이라는 두개의 방에도 그럴싸한 중국이나 한국의 동양화 묵화는 없었다.
갑자기 답답함을 느꼈다.
'정말 도서관에 있는 건가?' 갑자기 의문이 생기기 시작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수지야… 그림이 없는데? 어떡하지? 사진은커녕… 비슷한 한국 그림도 없는데?"
"한번 물어 볼까? 어차피 한번은 물어 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 오빠 이건 어때? 박물관장님을 취재 하는 거야.
오빠 명함을 주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 보고,안되면 할 수 없지만…
이대로 간다는 것도 좀 우습잖아."
"그래 그 수밖엔 없네…"
3층 전시실 안쪽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에게 둘이 걸어갔다.
그리고 친절 하게 물었다.
한참 둘이 말을 하더니 수지가 나에게 와서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나는 창조 문화사의 대표이사 명함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수지가 웃으며 나에게 왔다.
"오빠.오빠… 일본 사람들은 인터뷰 하는걸 상당히 영광스럽게 생각 하거든?
내가 박물관 관장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좀 찍고 싶다고 이야기 하고
박물관장님의 사진을 같이 잡지에 올리고 싶은데
박물관장님 이곳으로 오실 수 있냐고 했더니 물어 보고 오겠다고 그러네?
진짜 인터뷰 할걸 준비해야 겠어.
그리고 카메라 찍을 준비도 하고… 눈치가 보니까… 응해 줄 것 같은데?"
수지의 입에서 오빠라는 소리가 두 번 연달아 나올 때는 항상 기분이 좋을 때 그렇게 불렀다.
아마 이야기가 잘 되었던 모양이다.
잘하면 사진을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빼서 목에 걸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인사를 했다.
수지가 먼저 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 하고 나를 소개 하는 듯 했다.
젊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공무원 이고 이곳의 관장 이라고 했다.
"오빠… 박물관 내 에서는 사진을 찍을수 없다네…
그리고 꼭 사진을 찍고 싶으면 박물관 정문 앞에서 함께 찍을수는 있고…
인터뷰 시간은 20분 정도만 가능 하다는데?"
"괜찮아. 그것도 고맙다고 해라."
그 사람에게 그런 뜻을 전달하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원장 이라는 사람의 뒤를 따라 가면서
수지가 낮은 소리로 나에게 당부 했다.
"오빠… 이런데 계신 분들은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거든?
절대 주의 해야 하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욕설이나 쪽발이 같은 소리는 절대 하면 안돼.
알았지? 실제로 나는 통역 이고 오빠가 해야 할 말만하고
나에게 사적인걸로 이야기 하는 건 삼가 하라는 이야기야."
수지다운 총기 있는 주의 였다.
쉽게 이야기해서 약혼녀로서의 대우보다는 통역으로서의 역할에 충실 하겠다는 이야기 였다.
박물관 관장실 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좁았다.
좁다기 보다는 많은 책들 때문에 방안의 공간이 그렇게 넓게 보이지 않다는 게 정확한 이유 였다.
관장은 조용히 책을 한권 먼저 주었고 간단하게 박물관을 소개 하는 듯 했다.
그가 박물관을 소개 할 동안 나는 책의 목차와 그리고 소장품 인덱스를 찾아서 살펴봤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분명히 '朝鮮/夢遊桃源圖(1447年)'라고 소장품 목록에 쓰여 있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조용히 수첩을 꺼내 그와의 인터뷰를 준비 했다.
수지의 신호가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보라는 신호다.
그러나 나는 인터뷰 분위기에 맞게 먼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촬영 하고 싶다고 제의 했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소파로 돌아온 그에게 내가 질문을 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박물관의 역사나 또는 박물관에 언제 부터 일 했냐는
다소 형식적인 질문을 몇 번 던지고 나서 본격적으로 질문을 해 봤다.
"지금 주신 책자에는 많은 게 소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그림은 많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는 있는가?"
-그림은 벽에 걸거나 또는 펼쳐 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 너무 많다.
그리고 그림 자체가 고미술품이 많아서 보관상에 주의가 따른다.
특별히 고분에서 출토 된 것들은 전시실에 둘 수가 없다.
그래서 전시가 불가능 하지만 국가 기관에서 학술목적의 연구를 위한 허가를 받아 오면
관람 할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런 그림은 몇 개나 되는가?"
-주로 중국에서 가져온 동양화 그림이 그렇고, 특히 종이 자체가 빛에 약한 소재가 많 다.
한국에서 건너온 몇 점의 그림은 종이 자체는 괜찮은데 그림의 가치 면에서 공개하기
곤란한 게 있다. 공개 하지 못한 점을 이해해 달라.
"그럼 여기에 있는 그림 중 몇 개만 사진을 찍게 허락 해 달라.
-그건 곤란하다. 보여 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사진은 찍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원본에 손상이 갈수도 있고 또 특별히 한국의 그림이 일본에 있다는 게 알려 지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발생 할 수 있으므로 그것만은 곤란하다.
만약 사진을 원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책자에 나온 것으로 대신해 주면 고맙겠다.
말은 부드럽게 하였지만 단호했다.
더 이상 사정 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20분이 다 되었음을 이야기 했다.
나는 가방에서 우석이가 나에게 주었던 그림을 꺼냈다.
그리고 그에게 뇌물이 아닌 감사의 표시로 주면서 이야기 했다.
"만약, 무슨 큰 행사가 있든지 아니면 한국과 중국의 그림들이 전시 되는 날이 있거든
연락을 해주기 바라고, 그때 다시 와서 감상할 수 있게 해 달라 "
그는 말없이 내가준 그림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림을 감상 하더니 그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그린 그림 이라는 직답을 피하고 되물어 봤다.
"그림이 좋은가?"
-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산세가 한국풍 이다.
동양화 에서나 볼수 있는 기암괴석이많이 부드럽게 형상화 되어 있는 그림이다.
혹시 당신이 그린 작품 인가?
"아니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의 작품이다. 맘에 드는가?
- 물론 맘에 든다. 내가 이런 선물을 받기는 너무 과분하다.
그리고 다음에 특별 기획전 이 있다.
그때는 꼭 연락 해 주겠다. 그때 와서 다시 당신을 만났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몇 가지 그림을 볼 수도 없는가? 사진은 찍지 않겠다.
- 역시 곤란하다. 이해해 달라.
그러나 다음에 특별 기획전에는 한국 작품들을 전부 볼 수 있게 해 놓고 연락 하겠다.
미안하다.
그의 '쓰미마셍(미안합니다)'은 차라리 사정에 가까운 간곡함이 있었다.
조금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문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제의를 했다.
그것은 아주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기실은 박물관 정문 앞에서의 사진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다만 다음에 찾아 왔을 때를 대비해 또 현상한 사진을 보내 주기 위한 나의 얄팍한 꼼수에 불과 했다.
그때도 역시 우석이가 주었던 그림을 한 장 더 보내야 겠다는 나의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일본에서의 소득은 박물관 카탈로그 하나 얻는 걸로 큰 소득이 없어진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그림 이라는 그 그림의 가치는 확인된 결과가 되었다.
수지와 박물관 원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박물관 정문 앞에서 촬영 하는 걸로
덴리대학 탐방을 마쳤다.
그리고 우린 또 택시를 잡아타고 오사카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의 오사카 밤은 현란했다.
지금 한국은 올림픽을 개최 한다고 거리를 정비 하고 네온사인의 규정을 바꾼다고 난리를 치고 있지만
큰 행사가 없는 오사카 거리는 이미 불야성처럼 불을 밝히고 외국인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오사카조(大阪城)'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 했다는 수지의 설명이 있었지만 꼭 오사카조 뿐만이 아니더라도
예전에 동경보다 훨씬 빨리 공업 지대로 성장 했다는
여행 정보지의 설명은 이를 압도하기 충분 했다.
오사카 에서는 3일을 더 머물렀다.
괜찮은 오사카의 요리들, 그리고 파친코라는 현란하게 돌아가는 구슬들,
그리고 좀 괜찮다는 관광명소, 아키라바라라고 했던 가전제품이 싼값에 팔리는 곳에 갔던 기억,
그곳에서 돈 많은 주부들이 많이 찾는다는 그 유명한'코끼리 전기밥솥'을 샀던 기억들이 전부 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추억에 남을 기억은 역시 수지와의 기분 좋은 3일 동안의 행복한 시간들 이였다.
나는 충분히 행복 했고 그녀도 늦게나마 나를 남편으로 대할 수 있는 큰 명분이 생겼다는 점에서
그녀의 말처럼 '역시 사랑은 터치(Touch)가 맞아' 그 자체 였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제안은 좀 색다르기 까지 했다.
"오빠. 이제 집에 가면 그냥 합방 할까? 이렇게 둘이 여행 까지 갔다 왔는데….
방을 따로 쓰면… 그건 노인네를 기만 하는 거 아닐까?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여전히 각방…
그게 왜냐하면… 장모님이 지금 혼자니까…
아직은 수지가 같이 옆에서 잠을 자야 조금 이라도 덜 외로울 것 같은데…
정식으로 결혼식 올리고 그리고 합방 하자."
"그 말도 일리가 있네… 근데… 오빠가 더 못 참을걸!ㅎㅎㅎ"
"괜찮아…난."
그걸로 끝 이였다.
더 이상 어떻게 하자는 제의도 또 칭얼거림도 없었다.
나는 수지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항상 묵묵히 뒷전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그녀는 7년차를 극복한 종가집 마나님 같았다.
이제 정말 시골에 내려가 어머님께 수지를 소개 시켜 주고
며느리의 자격을 부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수지와 사귀면서 첨으로 느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또 다시 바빠진다.
사설 경호 전문 회사를 차려야 하고 또 그걸 운영 해야만 한다.
아마 사무실과 법인체는 이미 기삼이가 한 중사를 통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그렇게 천재성을 발휘 했었으니까.
귀국길 김포 공항은 산만했다. 특히 보따리 장사들의 짐 검사는
다른 여러 사람들 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폐를 끼치고 있었다.
나 역시 '코끼리 전기밥솥' 때문에 조금 시끄럽기는 했지만 일본이 초행 이라는 점,
그리고 신혼부부라는 이유로 관세 없이 통관 시켜 주었다.
'코끼리 밥솥', 전두환 대통령 당시 고위급 인사의 부인들이 이 밥솥을 너무 많이 사오다
공항의 검색대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오고
그게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이 밥통 같은 자식들아, 니들은 밥솥 하나도 제대로도 만들어?
그걸 만들어 내지 못하면 니들은 밥도 쳐 먹지 마' 라고 호통을 쳐서
부랴부랴 6개월 후 우리나라도 일본에 버금가는 전기밥솥을 만들어 내기 시작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일본제품인 '코끼리 전기밥솥' 을 선호 했고
밀수품의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의 그 산만하고 시끄러움을 벗어나 택시를 타고
수지의 집으로 가서 간단히 여장을 풀고 나는 다시 700 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도착 하자마자 한 중사를 통해 기삼이를 연결 하도록 지시 하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다 피웠을 때 기삼이의 전화가 왔다.
"일본 잘 갔다 왔어? 수지하고 불타는 밤은 어땠냐? "
"별로다…"
"자식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그래 뭐 좋은 결과 있어?"
"그림이 그곳에 있는 건 확실 한데… 보지는 못했다.
학술적인 연구가 필요해서 일본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만 볼 수 있단다.
그 경우도 사진은 찍을 수는 없고…
다만, 특별 기획전이 열리면 연락 해 준다고 해서 그것에 기대를 걸어 본다."
"개새끼들… 남의 물건을 금고에 쳐 박아 두고 즈들 끼리만 보겠다는 이야기네…"
"뭐 어쩔 수가 없드라. 그래도 다행스럽게 책자에 간단한 그림은 소개가 되어 있던데
그걸로는 크게 확대 한다고 해도 정갈한 그림을 보기는 힘들 것 같더라."
"전번에 이야기해서 알겠지만… 국가 차원의 학술 연구는 곤란 하다…
차라리 대학처럼 진짜 학술연구가 필요한 기관에서 일본 정부에 요청을 하면 모를까…
아마 일본 정부에서 허락을 하지 않을 거야…. 결국 내 생각이 맞아 떨어지는구나…"
"뭐가 맞아 떨어져?"
"그림을 한국으로 불러 들여 야지… 예상은 했지만… 결국 그 방법으로 갈수 밖에 없네…"
"기삼아. 혼자 중얼 거리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를 해 봐라."
"알았다. 그건 내가 할일 이니까…너는 일단 경호 회사를 만드는 일만 구상해라…
그러면 다른 실무적인 행동은 내가 계획 해 놓은 게 있으니까…
그때 또 이야기 하자. 그리고…
요사이 용팔이 사건으로 시끄러우니까 인원들 뽑을 때 신경 좀 써야 할 거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 사건에 개입한 놈들 모두 잡아 들여야 할지 모르니까
그 사건과 관련이 없는 놈으로 뽑아야 할 거다. 참고 해라."
항상 그렇듯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예상 했던 일을 알지 못했다.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한국으로 불러들일지는 나는 전혀 생각 해 보지도 않았고
그게 한국에 올수 있다고는 예상 하지 못했다.
그는 또 다른 방법을 미리 연구 해 두었는지 모른다.
그는 항상 나보다 앞서 가는 천재 였으니까.
그가 말한 용팔이 사건은 어쩌면 경호회사를 차려야할 근거가 되는지도 몰랐다.
4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통일민주당의 지구당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20대 청년 150 여명이 도끼로 출입구를 부수고
들어와 당원들을 폭행하고 사무실의 집기를 불태운 뒤
경찰 도착 10분전에 모두 사라져 버린 사건으로 창당 방해 폭력 사건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5일 사이에 47개 지구당중 18개 구역에서발생 하였으나
경찰에서는 당내 문제라고 취부 하고 전혀 조사를 하지 않았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발표 하겠다는
소문과 함께 정국은 또다시 반정부 시위대로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지만
정부는 언론과 그리고 민심을 묶을 수 있는 한계 까지 묶어 두고 방관 하고 있었다.
민간 혁명은 꾸준히 진행 되었지만 펜과 민심은 그들을 이끌 아무런 힘도 없었다.
언론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남한으로 왔다는 김만철씨 가족의 이야기로
수십일 동안을 T.V 화면과 신문의 1면을 활여하였지만 시위대의 크고 작은 사건은
그렇게 크게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최초로 에이즈 환자가 죽었다는
그렇게 비중이 크지 않는 사건조차 식약청과 보건당국의 인터뷰로 언론 매체를 이용해
국민의 시각을 교묘히 돌린곤 했다. 이렇듯 조직폭력 까지 동원 하여 야당을 탄압 하면서
또 그 야당을 경호 회사가 보호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정부의 모순이며 흑자로
돌아선 경제와는 전혀 대조적인 대한민국의 현실 이였다.
용팔이 사건을 계기로 어쩌면 경호 회사를 ‘빨리 만들어야 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전화를 목포에 있는 쌍식이 형님에게 해 봤다. 항상 그렇듯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형님, 저 우상이 입니다. "
"전화 한번 올 줄 알았다. 뭔일 이여?"
"그냥 뵙고 싶어서요. 상의 드릴 것도 있고…"
"그라믄 또 내려와… 늙은 놈 오라니 가라니 허지 말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복잡한 서울 보다는 내려가서 자세히 이야기해야 하는지 몰랐다.
어차피 그림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경호 회사를 차리면 모든 걸 그에게 맡겨야하기 때문 이였다.
"형님…낼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특별히 부탁 하실 것 없으세요?"
"그라믄 올 때 롤라 스케이트 하나 사가꼬 와라.
거 왜 신발 밑창에 바꾸가 4개씩 붙어 있는 신발 있잖여. 싸이즈는 250 으로…
막둥이가 그거 사달라고 며칠 전부터 울어 싼께….
목포는 아직 그런 신발은 보급이 안되는 갑드만… 것도 성가시믄 말고…."
"예. 하나 사가지고 가죠."
"그라고 올라믄… 늦게 온나. 낮에 와 봤자 같이 놀아 줄라믄 내가 성가셔서 허는 소리여.
오믄 바로 입가심 하러 가브러야제 니 델고 시간 보낼랑께 것도 할짓 아니드라이…"
"예. 형님 술 시간에 맞추어서 가겠습니다."
"그래 주믄 내가 고맙고… 그래 낼 봐."
쌍식이 형님은 뭘 부탁을 해도 항상 당당 했다.
그 나이에 막내의 롤러스케이트를 챙겨 주는 세심함은 나를 위해 배려 할 때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는 평소 그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롤러스케이트야 한 중사 에게 부탁 하면 될 일 이였고
오늘은 일본에서 돌아온 피로감에 일찍 집에 들어가 쉬어야 했다.
수지와 함께 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외박을 해야 하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마음만 바빴다.
나는 한 중사 에게 현금으로 300만원을
목포 내려 갈 때 가져 갈수 있게 준비 하게 해 두고 집으로 향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에 수지는 이것저것을 잘 챙겨 주었다.
평소에 지방을 다닐 때와 다르게 속옷이며, 양말 그리고 갈아입을 수 있는
간단한 티셔츠 까지 3일 동안의 작은 소품을 챙겨 주었다.
집을 나설 때 '홍어 좋아해?' 하는 물음에 코와 입을 막고 손을 흔드는 흉내를 내는 걸로
그녀는 '사오지 마세요!' 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예전과 다르게 아파트 통로까지 따라 나와 볼에 입맞춤 하는걸 잊지 않았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의 새로워진 수지의 습관 이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색할 뿐이었다.
이제 사무실에 들려 한중사가 준비한 롤러스케이트와 몽유도원도의 정리된 보고서를
한부 챙겨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쌍식이 형님이 말했던 적당한 시간에 도착 해야만 '바로 입가심 하러 가브러야제' 하는
타이밍에 맞출 수가 있었다.
한중사의 일에는 실수가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 하자
가벼운 목인사와 그리고 커피 한잔을 방으로 가져 왔고
목포에 가져갈 롤러스케이트를 잘 포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단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사장님. 우리 요원들은 기차를 탈 때 돈을 내지 않습니다.
서울역 가시면 100호실에 가셔서 표를 한 장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표를 줍니다. 참고 하십시오."
"난 그렇게 까진 하기 싫은데… "
"편할 데로 하십시오. 다만 기차표가 없다거나 또는 예매를 하지 못해 기차를 타지 못할 경우는
이용 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저한테 전화를 주셔도 됩니다."
"편리 하긴 하네.… 근데… 서울역에도 100호실이 있나?"
"예 있습니다. 서울, 인천, 부산의 여객 터미널과 역사 에는 있습니다.
100 호실 직원들은 대공 간첩 사건을 담당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의 동향은 항상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치되어 있습니다."
"목포 같은 작은 도시에도 그런 게 있나?"
"없습니다. 급하시면 역 주변에 반드시 헌병대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공무원 수준의, 국가에서 운영 하는 모든 기관의 상부 기관이 안기부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 하는 한중사의 조언 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로 권력의 힘을 테스트 해보고 싶지는 않았고 시도 해 보지도 않았다.
다만 급할 때 이용 할 수 있다는 정도의 상식으로 알고 있을 뿐 이였다.
"그리고 한 중사… 경호 회사 때문에 그러는데…
지금 이 팀장은 어디 까지 일을 진행 시키고 있는 거지?"
"이미 법인체는 나와 있습니다. 사무실도 임대 계약이 끝나있고
20명이 상시 묵을 수 있는 숙소만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사장님께서 인원이 확보 되면 그때 정해야 한다고 하셔서…"
"회사 이름은?"
"'충무 경호 서비스 주식회사'입니다.
약칭으로 충무팀 으로 부르시면 되고 충무는 아시는 것처럼
나라를 지키는 충무공 이순신에서 따온 이름 입니다."
"누가 지은 이름인데?"
"이건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이름이라 저희가 정한 건 아닙니다.
이외 에도 세종 팀과 호국 팀이 있지만 그런 것 까지는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팀은 선거가 끝나면 자동 해체 되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법인체가 유지 되고 사회의 질서를 위해 상시 가동 합니다.
특별히 자체 적으로 경호의 대상이 생길 경우는 어떤 상대든 경호 업무를 담당 하고
그건 법인체 에서 자체 회계 처리를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국가든 아니면 사회 유명 인사든 누구를 상대로
정상적인 영업을 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 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지정한 업무에 대해서는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불행한 사태가 발생해도 그건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는
완벽한 사기 업(私企業)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국가에서 누구를 경호해야 하는 경우도
일정한 틀 속에서 계약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만 사적인 영업에 의한 업무는 국가에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완전 사기업이 되는 겁니다."
"잘하면… 앞으로 상당히 괜찮은 유망 업종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건 알 수 없지만, 사실 경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리고 아마 저희 충무팀 이 최초의 민간 경호 서비스를 제공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언제 까지 인원을 뽑아 두면 되지?"
"이 팀장님 말씀으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대통령 선거 있기 6개월 전에 팀이 완성 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좀 급한데…알았어요... 그 일로 목포에 내려가니까… "
"잘 다녀오시고, 가끔 연락 주십시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완전 자동화된 사무 기구와 같았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쉽게 정리 해 주는 가이드 같은 존재 였다.
요원을 뽑는 지침서를 한 장 챙겨 주었지만 나는 그걸 그 자리에서 펼쳐 보이지 않고
그냥 품속에 갈무리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포로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여전히 서울역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안경을 두껍게 쓴 대학생들의 가방 검사는
이곳 에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 이였다.
초봄의 아직 얇지 않는 차림의 대학생들의 소지품 검사와 신분증 검사는
이 시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분개 하거나 검사 하는 경관들을 탓하지도 않았다.
이제 서서히 그런 생활에 동화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시대의 종말이 빨리 오기를 기대 하는 많은 민주화 투쟁의 재야인사들 에게
희망을 걸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은상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하는 독려만 있을 뿐
한 치 앞도 전진 하지 못하고 정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 였다.
표가 없거나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시기는 아니 여서
표를 사자마자 바로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좌석에 앉아서도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는 행운 까지 얻었다.
나는 품에서 한 중사가 준 요원을 뽑을 때 참고 하라는 지침서를 빼서 읽어 보았다.
내용은 생각 보다 간단했다. 그러나 다소 까다로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이런 것은 쌍식이 형님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그들을 뽑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 지침서를 다시 품에 넣고 덜컹 거리는 소음과 함께 깊지 않은 수면을 재촉 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포에 도착 한건 6시가 조금 넘는 시간 이였다.
쌍식이 형님이 좋아 하는 '입가심하기 좋은 시간' 이였다.
역에서 멀지 않는 쌍식이 형님 가게로 곧장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그대로 였다.
손님 없는 가게에 쌍식이 형님은 여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첫댓글 더위에 모든분 건강관리 잘 하시구요.....오늘 하루도 알차고 행복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즐거운 주말잘보내세요~~~~~~~~*^^*
감사히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