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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길지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 해소해준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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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1. '박원순'이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한 사람이, 7월 10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매듭지었다. 그에게 공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서울시장'이다. 그러나 그는 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그에게 붙여졌던 ‘진보적인 인권 변호사,’ 또는 서울을 ‘세계적 도시’로 만든 시장 등 다양한 표지들은, 그가 무수한 결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지닌 다양한 외적, 내적 결들의 한 부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잠적, 그리고 이어서 죽음이 알려진 후, 지난 이틀 동안 나는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착잡한 마음을 깊숙하게 품고 지내야만 했다. 우울한 착잡함의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 우울함, 절망감 등 추상화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단지 고유명사를 지닌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의 죽음 자체 때문만이 아님을 보게 된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생명선’을 순간에 놓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한순간에 무화될 수 있는가라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나의 온 존재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 모두가 이러한 ‘한계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칼 야스퍼스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어 신문과 SNS에 쏟아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코멘트’들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아프게 마주하게 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언어적 테러리즘(verbal terrorism)”이 난무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인간임’에 대하여 절망감까지 들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끔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추상화같은 내적 세계를 담아내고자 할 때, 산문적 글과 말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2. 한국, 독일, 영국, 미국 등 네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어느 사회마다 각기 다른 ‘질병’과 ‘장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악 (vice)’은 “흑백논리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 개별인들의 사유구조나 관계맺는 방식은 물론,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은 물론이고, 한 인물에 대하여 극도의 ‘이상화-악마화’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악’이,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질병중 하나라고 나는 본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비판적 토론이 아닌 ‘내 편-저 편’이라는 편가르기가 먼저 작동하고, 그 중심적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게 된다. 멀리 뒤로 갈 필요도 없다. 지금도 진행 중인 소위 ‘조국 사태,’ 정신대/위안부 문제, 그리고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적인 이분법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복합적 시선이 결여된 채, ‘순수주의(purism)’를 내세우며 단순한 ‘이상화(idealization)’나 ‘악마화(demonization)’ 이외에는 논의거리가 되지 못한다.
3. ‘순수에의 열망 (desire for purity)’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순수주의(purism)’으로 고착되면, 인류 역사에서 무수한 테러리즘과 폭력이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보존해야한다는 ‘순수성에의 열망’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외국인 박해, 동성애자 학살, 장애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미국에서 백인의 ‘순수성에의 열망’에 따른 ‘한 방울 규정(One-Drop Rule)’은 1967년 까지 백인 아닌 인종과의 결혼을 범죄화했다.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 있어도 ‘백인’이 될 수 없고 ‘흑인’으로 범주화되는 법이다. 다양한 인종간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이 ‘한 방울 규정’이 백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백인과 흑인의 피가 각기 50%이지만, 그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규정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인종적/종족적 순수주의’만큼 폭력적인 것이 바로 ‘도덕적 순수주의’에 대한 열광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상화-악마화’라는 지극히 단순한 흑백논리의 범주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 나는 페미니즘이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깊은 딜레마와 씨름했어야 했다. 내 속에 보이지 않는 ‘순수주의에의 열망’이 있었는가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완전한’ 이론가/사상가가 있는가. 없다. 중요한 통찰을 준 특정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적 삶에 이런 저런 ‘오염’을 지니고 있는 경우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깊은 실망을 했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인종적 또는 지적 우월주의 또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오판과 오역을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와 같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부활을 가져온 사상가는 어떤가. 그는 여성은 합리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며, 열대지방에 사는 인종은 지적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지켜야 하는 코즈모폴리턴 권리를 주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혐오’와 ‘인종주의자(racialist)’인 칸트를 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예는 마틴 루터 킹, 폴 틸리히, 마틴 하이데거 등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서 '오염'된 무수한 사상가/운동가들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어느 한 사람도 소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순수주의에의 열망’은 또 다른 폭력과 테러로 사용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 자신속에서 이러한 딜레마와 씨름하면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순수주의의 열망’이 지닌 위험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5. “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 생각하기 (thinking with Kant against/beyond Kant)” 라는 사유방식은 나 자신의 ‘순수주의에의 열망’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나의 학문하기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인종차별적인 페미니스트나 코즈모폴리턴 사상가, 성차별주의자 또는 성소수자 차별하는 인권운동가 등의 이론을 내가 ‘분석적 도구’로 차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라는 것은 한 인간은 무수한 결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인식구조속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간이해를 수용할 때, 한 인물에 대한 ‘이상화’ 또는 ‘악마화’라는 흑백논리적 접근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위험한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란 단순한 한 두가지 표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표지들(markers)’은 지극히 일 부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 한 사람의 복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붙여지는 표지들이 고정적인 것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개인적으로는 거부하는 이유들이다.
6. 인간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은, 동일한 정황에서 누구나가 다 동일한 해석, 결정,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우리 각자는 다른 해석과 결정을 내린다. 그렇기에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표현으로 한 고유한 존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매듭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사리 ‘용기’라거나 ‘비겁’이라는 단순한 표지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죽음에 대한 한 사람의 결단은 우리의 '이해-너머 (beyond comprehension)'의 문제이다. 알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자의적 판단/심판을 중지하는 것--인간됨의 실천이다. 그가 스스로 이 삶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이 '용기있는 사죄의 몸짓'인지, 아니면 다른 몸짓인지 '그'만이 알 수 있다.
7.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다.” 데리다의 말이다. 자신의 ‘생명선을 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하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애도이다. ‘애도한다’는 것이 그를 전적으로 ‘이상화’하라는 것도 아니다. ‘더불 제스츄어(double gesture)' 를 가지고 ‘박원순과 함께 박원순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의 말이 담고 있는 바, 한 죽음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애도라고 나는 본다.
한편으로는, 한 공인으로서 그가 한국사회에서 이루어 왔던 소중한 일들을 지켜내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남아있는 일들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어서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순수주의’의 열망으로 그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 오류와 한계를 지닌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지극히 남성중심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 개인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 역시 한국의 가부장제적 '사회적 산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나 만 택해야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인 면들을 ‘한꺼번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8.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파안대소’하는 몇 얼굴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그 파안대소하는 얼굴 중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K' 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침묵속에서 애도하려고 했던 내가, 이렇게 미완의 단상이라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사진이다. 얼마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가보았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본 사진이 떠 오른다.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되자, 그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독일 군인들을 발가벗기고 죽여서 그 주검을 수용소 철조망에 걸어놓고 조롱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소위 ‘피해자’들 역시 이러한 끔찍한 ‘가해자’의 모습을 품고 있는 ‘인간’임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었다. 인간 속에는 ‘피해자-가해자’의 가능성이 언제나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표지가 붙었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조롱받을 죽음’이란 이 세계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 보다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제를 우리 각자의 어깨위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여러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의 죽음앞에 나는 애도한다. 그가 아무런 흠 없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여러가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기 때문이다.
@짜자장 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를수 있겠죠. 그리고 Social Media에는 다른 사람들 보라고 쓴글이니 독자를 고려하는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애초에 명제자체를 옹호하기 위해 이린저런 얘기를 가져오며 살을 붙이니 제가 읽기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즉 표현력이 세련되었지만, 어려워서 다 읽고 솔직히 이게 뭔소리야. 라는 생각만 계속 듭니다.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많이 다른가 봅니다.
@식혜 네 그런가보네요.
나이 들면서 생겨났건 질문들인데
선악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해야하는가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해답의 방향을 조금 더 잡아 주는 고마운 글이네요
이런 정서스러운 마음이 담긴 피드백
정말 많이 와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나 만 택해야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인 면들을 ‘한꺼번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다들 이유가 있는거죠
다만 남겨진 자들의 몫이 너무 크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07.12 08:23
네 남겨진 이들이 몫이 크기도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겠죠
이일이 일어나고 나서 인간의 내면이 다크하다는 이야기로 죄에 대해서 덮으려는 말은 저에게 그다지 공감가지 않네요. 박시장님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혹시 잘못이 있다면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보는 제 입장은 여전하다고 봅니다
글 내용이 말씀하신 그 말인 것 같은데요. 뭘 덮자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좋네요.이런건강한 생각들이 많이퍼졌으면 합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깊이 공감합니다.
^^
맞는 말이긴 하네요. 박원순이란 여러 스펙트럼을 가진 인간이 저 의혹 하나로 손바닥 뒤집듯이 평가가 바뀌면 안되죠. 이런 순수와 완벽에 대한 집착이 노회찬도 죽음으로 몰았으니까요.
정치인에 대한 인식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노통의 억울한 죽음 이후로 순수와 완벽에 너무 집착한 느낌입니다.
저도 딱 이렇게 똑같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아니 혐의받고 자살한 사람한테 무슨 각종 미사어구를 동원해서 포장하는지...모든 정치인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되죠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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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모두가 같은 생각 갖고 살 수는 없죠
좋은글이고 공감이 많이 갑니다
다시 좋은 날이 왔으면 하네요
과연 이와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모든 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글쓴이에게 되묻고싶네요
어떤 마음이라 생각하고 되묻고 싶은 건지도 궁금하네요. 마틴 루터 킹 사례를 찾아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글이 깊네요.생각하게끔 하구요.좋은 글 잘봤습니다.
저도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좋은글 잘봤습니다
많은걸 생각하고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