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년 6월, 장안을 함락한 모용충은 해를 넘기도록 장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휘하에 있는 선비족 40여 만 명은
대부분 고향인 동쪽 땅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었지만, 정작 관동에는 모용수가 건국한 후연이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다.
돌아간다면 모용수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모용충은 이미 385년 정월에 아방성에서 황제에 즉위하였으니, 권력의 맛을 본
이상 내려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모용충은 나름대로 장안을 근거지로 하여 독자적인 나라를 일으켜 볼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안에 궁실을 축조하고 농사도 장려하면서 근거지를 정비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선비족들의 반감을
부추겼다. 마침내 386년 2월, 부하 한연(韓延)이 모용충을 죽이고 모용충의 부하인 단수(段隨)를 연왕으로 옹립한다.
서연 정권은 엄밀하게 말해서 국가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점이 많다. 일단 영토라는 것 자체가 불분명했다.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기
이전에는 거의 도적떼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장안을 점령한 이후에도 장안 인근의 극히 제한된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영토화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좌장군이니 복야니 상서니 하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이 여럿이지만, 그들이 그런 직책에 걸맞는 소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호하다. 말 그대로 도적떼 수준에서 나라라고 자칭하면서 두령들끼리 직위를 나눠가진 느낌이다.
각종 직위를 가진 인물들이 각자의 세력을 가진 두령 수준이었던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군주 시해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첫
군주였던 모용홍도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충 자신도 형을 살해한 사람에 의해 옹립된 군주이다. 국가의 체계 자체가 엉망진창인
것이다. 어쩌면, 모용홍이나 모용충이 살해되게 된 배경에는 군주 중심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하다가 불만을 샀던 것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연에 의해 옹립된 단수는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용항·모용영(慕容永)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고 모용의(慕容顗)가 옹립된다. 습(襲)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보아도, 서연의 상황은 독자적인 군권을 가진 두령들의
집합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거나 모용의를 우두머리로 내세운 모용항과 모용영은 드디어 선비족 40여 만 명을 인솔하여 장안을
떠난다. 드디어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는 꼭두각시이고, 각각의 두령들도 딴마음을 품고 있으니 대장정은
험난한 여정이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모용항의 동생 모용도가 모용의를 죽이고, 이에 화가 난 모용항은 동생을 버려두고
떠나버린다. 모용영은 버려진 모용도를 공격하고, 모용항은 독자적으로 모용요(慕容搖)를 옹립한다. 그러나 선비족들은 모용요를 버리고
모용영에게 투항하였으며, 마침내 모용영이 모용요를 죽이고 모용충(慕容忠)을 옹립함으로써 서연의 무리들은 일단 힘겨운 통합을
마쳤다. 이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동진을 계속하던 서연의 무리들은 병주 남부의 문희(聞喜)에
이르러 멈춰섰다. 이미 동방에서는 모용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시기. 더 전진하게 되면 모용수의 휘하로
들어가거나 모용수와 맞서 싸우는 길 밖에는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거쳐 동쪽으로 걸어왔건만, 고향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6월이 되자 어설피 통합되어 있던 무리들이 다시 분열을 개시했다. 조운이 모용충을
살해하고, 마침내 모용영을 추대하여 하동왕(河東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용수에게 번속(藩屬)을 칭한다. 이 복속은 상당히
미묘한 것이었다. 모용영의 세력은 완전히 독자적이었고, 번속이라는 것 또한 모용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칭"이다.
번속을 칭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 칭호를 버리고 왕호를 사용하고 있을 뿐 완전히 독립적인 세력이었다. 과거 요양이 연에 복속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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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진양에서 황제에 즉위한 부비는 국가를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멀리 장안의 서쪽에 있는 친 전진계 세력들과 연계에 성공하여 요장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이 큰 성과였다. 그러나, 장안 서쪽의 전진계 세력들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사실상 독자적인 상태로 느슨한 연대 상태에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비는 이들 세력을 거의 통제할 수 없었고, 각 세력들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농우(隴右) 지역이 전진계 세력들의 주요 터전이었는데, 그리 넓지도 않은 지역에 이름뿐인 주목(州牧)의 지위를 가진 군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상황이 얼마나 개판이었을까.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워대기는 예사였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여
자립하는 군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양정(楊定)은 부비의 명을 받아 옹주목(雍州牧)에 임명되었는데, 뒤이어 옛 구지를
부활시켜 구지공(仇池公)을 자칭하고 동진에 복속한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동진의 영향권에 있던 천수, 약양 등을
점령하고 농서왕(隴西王)을 자칭하는 등 완전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다. - 양씨는 농서 지역의 소규모 정권인 구지의 군주
일족이다. 구지는 부견에 의해 멸망했는데, 양정이 부활시킨 것이다. 이를 후구지(後仇池) 정권이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비는 연계를 통해 요장을 포위하고 압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압박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농우 지역이
야금야금 후진의 세력에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386년 9월에는 진주자사 왕통(王統)이 요장에게 항복함으로써 사실상 농우 지역의
전진 세력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부비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4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진양에서
출진하여 평양(平陽)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바로 이때, 모용영이 부비에게 접촉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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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비가 평양까지 남하하였기 때문에 모용영과 부비는 상당히 근접해 있었다. 서연의 무리들이 동진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꿈은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비의 세력권을 지나야 했다. 모용영은
부비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청하였는데, 당연히 부비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비와 모용영은 평양 인근에서
맞붙었다. 부비는 이 전투에서 완전히 궤멸되어 기병 수 천을 이끌고 간신히 남쪽으로 도망친다. 또한 부비의 세력이었던
부찬(苻纂)은 저족 수만 명과 함께 서쪽으로 달아나 행성(杏城)을 점거하였다.
여기서 부비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다. 동진이 점령하고 있던 낙양을 습격한 것이다. 아마도 낙양을 점령하여 재기를 노린 것 같기는 하지만, 상당히 무모한 선택임이
분명하다. 약소한 세력이 점거하고 재기하기에 낙양은 너무 크고 중요한 지역이다. 어쨌든 무모한 선택을 한 만큼 부비는 동진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부비의 아들 부녕은 건강에
서 살고 있던 부견의 태자 부굉에게 보내진다.
승리한 모용영은 남은 전진의 무리를 모조리 일소하고 장자(長子)를
점거, 황제에 즉위한다. 도적떼에 불과했던 서연이 드디어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첫댓글 오호 십육국시대는 완전히 일반이들이 살기 힘든 완전 파국의 시대이건 같습니다. 여러군데서 폭주하니 ㅎㅎㅎ하
그나마 전반전(?)에는 살만했는데, 후반전은 진짜 카오스의 극치입니다. ㅡㅡ;;
이때는 차라리 왕위에 오르지 않는게 장수비결인 듯 싶네요^^:;
배후조정을 하는 모용영 같은 이가 역시 장수하죠. ㅎㅎ
황제=죽을자리가 공식이군요-ㅁ-''
이렇게 중앙의 강력한 통일정권이 없으니, 우리나라의 삼국에 별 간섭을 할 수 없었군요.
국사공부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들었지만,
실제 게시물을 보니, 완전 카오스 상태입니다.ㅋㅋㅋㅋㅋㅋ
이 거 중국사가들이 "이민족들의 역사다"라고 일부러 잘 기록을 안 한게 아니고
"기록하려 해도 이 건 제대로 기록을 할 수가 없는 상태야.." 아닌가요??? ㅋㅋㅋ
이시대 앞에서 왠만한 시대는 카오스라는 말도 못꺼내겠네요.
도대체 몇명이 죽고 몇명이 나오고 몇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지는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