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끝자락 살며시 열고 나온 달님 개울가 달맞이꽃 밤새 노랗게 물들여놓고 저 산 너머 홀로 길 떠났다지요?
그러한 달빛을 하도 닮아서 기쁘게 활짝 웃음 짓다가 더욱 샛노래진 달맞이꽃
아침 햇살에 날개 접은 노랑나비 되어 다시 올 그에게 날아가려고 이 밤도 설레며 기다린다지요?
연한 초록가지에 피어난 달맞이꽃이 밤새 활짝 피었다가 노랑나비 날개처럼 반쯤 꽃잎을 닫았습니다. 이른 아침 텃밭 일을 마치고, 이슬이 스며든 달맞이꽃을 앞치마 한가득 따옵니다. 달의 변화에 따라서 함께 바뀌는 생명체들을 보면, 달빛을 한껏 받은 달맞이꽃이야말로 주기적인 월경을 통해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들에게 뭔가 좋은 식물이 되어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산딸기 몇 알과 달맞이꽃을 함께 넣어 달맞이꽃 식초를 만들었어요. 3, 4일 지나자 꽃잎의 은은한 향기를 담은 달맞이꽃 식초가 제 입으로 들어와 살며시 키스하며 말합니다, 과연 달빛 향기가 그렇다고.
|
|
|
▲ 달맞이꽃 산딸기 식초 ⓒ용서해 |
흙과 나눈 속삭임
도시에서 들려오는 지구온난화에 얽힌 이상기온 소식과는 상관없다는 듯 이곳 1,100고지의 숲은 평화롭고 차분하게 여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른 봄부터 살(흙)에서 솟아나 그동안 호스피스 요리 재료로 저를 만나주던 활량나물, 줄댕가리(쥐오줌풀), 수영, 곰취, 수리취, 곤드레, 당귀, 궁궁이 같은 산나물들이 각색 꽃으로 그 아름다움을 피우며 씨앗 맺을 준비를 하는군요. 이렇게 식용 나물들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이파리에 독성을 뿜어내어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경이로운 새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한 시절의 풀잎들!
그동안 숲속 동물들과 저에게 오묘한 맛의 풍요로운 먹을거리가 되어준 생명들의 세어진 잎을 더는 채취하지 않기로 마음먹습니다. 한편 어느새 작은 씨앗을 품고 있는 수영과 소루쟁이의 주변 살(흙)이 잘 드러나게 하여 꽃대에 맺힌 씨앗들이 어미인 흙의 품으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작은 생명들이 흙 속에 묻혀 싹 틔울 봄을 기다리며 가을을 지나 혹독한 겨울을 지내겠지요. 나 또한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내 속에 품고 있는 작은 희망들과, 그것들이 싹트는 아름다운 봄날에 만날 것을 고요히 기다립니다.
그렇게 흙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새 돋아난 명아주와 질경이가 너도 우리처럼 질기게 견디며 살아보라고 속삭입니다. 아무리 뽑아도 어느 틈에 돋아나 있는 초여름 풀들! 그러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설피 농사지어야 하는 저에게 이들은 농사를 힘들게 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동반자로서 함께 살아야 하는 소중한 생명들이랍니다.
명아주는 자기가 지금 번지고 있는 이곳 살(흙)의 영양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농장지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그래서 텃밭에 돋아난 명아주를 솎아 반찬으로 일단 무쳐 먹고 쪽파, 상추, 배추를 심어놓은 밭에 염소 우리에서 나온 두엄을 잘게 썰어 섞어서 두툼하게 올려줍니다.
사람 발에 밟혀 씨앗을 퍼뜨리는 질경이도 지난 2년 동안 제 발에 밟히면서 오두막을 오르내리는 숲길에 제법 많은 순을 키워내고 있군요. 뿌리를 다치지 않도록 질경이 어린 순을 칼로 도려내어 옅은 소금물에 데쳐서 말린 후 겨울 식량으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숲에서 한 가지 풀만 며칠 먹으면 독성 때문에 얼굴이 붓는 수가 있다고 마을 어르신께서 알려주셨는데, 질경이는 아무리 먹어도 독이 없고 오히려 다른 풀들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하는지, 저는 질경이를 매일 채취해서 밥반찬으로 양념에 무치기도 하고 국으로 끓이기도 하여 여름내 먹었습니다.
또한 봄부터 여름 꽃이 피기 전까지의 방가지똥풀은 제가 숲에서 가장 즐겨먹는 야생초이기도 합니다. 흰 진액을 품고 있는 방가지똥풀은 데쳐서 나물로 먹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쪽파, 배추, 부추, 상추, 토마토, 풋고추들과 함께 쌈 싸서 먹기에 딱 좋은 철입니다. 모양은 서양 오크 잎을 닮았는데 첫 맛은 쌉쌀하고 뒷맛은 고소해서 여름철 땀 흘려 처진 제 몸에 입맛을 잃지 않도록 기운을 북돋아주지요.
또한 방가지똥풀은 밭에서도 그 존재만으로 소중한 몫을 하더군요. 흙의 영양분을 잘 흡수해서 그런지 방가지똥풀이 돋아 있는 곳을 호미로 파보면 흰 곰팡이를 잔뜩 끌어안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식물들한테도 아주 이로운 곰팡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그 흙을 퍼내어 영양이 필요한 다른 식물들에게 뿌려주기도 하지요.
이렇듯이 자연에는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덩굴 식물처럼 다른 생명을 의지하여 어떻게든지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식물이 있더군요. 하지만 그것을 이기심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점이 있다면 다만 곧은 줄기가 없어서 스스로 곧추서지 못하는 것뿐일 텐데……. 줄기로 서서 살든 덩굴로 다른 식물에 기대어 살든 모든 식물의 뿌리가 같은 흙에 박혀 있듯이, 저의 사람살이에서도 어떤 편견과 오만함도 갖지 않겠다고 흙과 약속합니다.
텃밭에 자라는 여름 야채 코너
이른 아침 동틀 무렵이면, 새벽 4시라고 해도 숲은 훤합니다.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고 텃밭으로 나가봅니다.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호박, 수박, 참외, 파프리카, 고추, 옥수수 모종이 제법 자라서 작은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이쯤 되면 한 가지에서 난 열매가 모든 영양분을 받기 때문에 크기를 키우기 위해 곁가지를 잘라줘야 한다는군요. 덩굴로 자라는 호박이야 우리네 겨드랑이 같은 곁가지에 돋아난 순을 따서 쪄 먹기도 하고 국으로 끓여 먹으면 자연스레 가지치기가 되어 괜찮지만, 토마토와 고추의 곁가지를 왜 잘라야 하는 건지 그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래야 열매가 커진다는 게 정말이니?” 그랬더니 정말이라고 하네요. “그럼 내가 잘라내어도 되겠니?” 순간 갑자기 제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어떤 자식인들 사랑스럽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요! 저는 농사짓는 장사꾼도 아닌데 뭘 그리 크게 만들어 팔겠다고 어미 몸에 상처를 주는가 싶어 오히려 줄기 대를 세워주고 끈을 대에 감아 곁가지가 땅으로 처지지 않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발효된 인분 거름과 주변의 풀들을 썰어서 뿌리에 자주 덮어주었더니 곁가지가 원가지처럼 힘이 났던지 여름 내내 많은 열매를 맺어서 주변 분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엄청난 수확을 했답니다. 하지만 가지는 다섯 모종을 심었는데 달랑 두 개의 열매를 얻었고, 오이는 한낮에 햇볕 따뜻한 큰 바위를 타고 올라가라고 길까지 만들어줬지만 1,100고지의 날씨가 추웠는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작은 열매만 아련하게 맺다 말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텃밭이지만 혼자서 풀 베랴, 거름 주랴, 염소 꼴 먹이랴, 하루 일과를 마치지 못하고 잠든 적이 많았던 터라, 미처 관심을 덜 기울인 것이 잘못이었나 봅니다. 가지 모종이 옥수수 그늘에 가려지는 것도 모르고 알아서 커주기를 바랐으니 결과가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마을 어르신이 집안의 족보처럼 대물림해온 귀한 토종 씨앗을 주신 건데 태평농법을 한답시고 오히려 방심한 꼴이 됐으니 미안하다고, 내년 여름엔 가지와 오이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여름 햇살과 약속해 봅니다.
약한 자신을 보호하려고 스스로 만든 가시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축제’
|
|
|
▲ 텃밭의 결실로 달맞이꽃 식초, 와인에 절인 양배추, 산딸기 잼 ⓒ용서해 | 덩굴딸기 꽃이 한창 피어나더니 어느새 빨간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저는 산딸기 쨈을 담그려고 1년을 기다렸어요.
숲에서 만날 수 있는 딸기는 네 종류가 있는데 모두 한꺼번에 열매를 맺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혼자서 밭일하는 시간이 부족한 나를 위해서 적당한 시간차를 두고 열매를 맺는 건지 모르겠다는 착각의 자유가 잠시 제 입가에 웃음을 맺게 합니다. 줄기딸기가 지고 나면 나무딸기가 열리고 다음으로 곰딸기가 영급니다. 딸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햇살만 좋으면 늦가을까지 땅에 바짝 엎드려 번지는 뱀딸기지요. 가을로 접어들면서 한여름보다 맛도 덜하지만 겨울잠을 준비하는 뱀을 위한 열매인 것 같아서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딸기를 채취할 수 있는 기간은 모두 해서 두 달쯤 되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맛이 싱거워지기 때문에 여름 하늘을 자주 보며 하루에 채취할 딸기의 양을 조절합니다. 매일 다르게 그 맛이 무르익어 가는 만큼 열매의 탱탱함도 잃어가기에 한낮에 나무그늘에서 땀도 식히며 산딸기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따지요. 그런데 어찌나 많은 가시가 보이지 않게 숨어서 줄기에 돋았는지, 긴 옷을 입었는데도 내 팔과 다리는 온통 상처 투성이입니다. 맛있는 딸기나무는 자기 약함을 보호하려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가시를 만들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힙니다.
얼마 전, 자신의 ‘삶의 마지막 축제’를 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던 여자 암 환우 분이 생각나는군요. 그분은 여러 인연으로 인하여 생긴 가슴의 상처들을 내려놓고 싶어 하셨지요. 어찌 사람들하고의 인연만 그러하겠습니까? 산딸기에 집착하여 상처를 무릅쓰고 딸기를 따는 나를 보면서, 결국 이 상처는 내가 만든 가시로 말미암은 상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곧 ‘삶의 마지막 축제’를 열어드릴 그분을 위해서 오두막 앞 뽕나무로 자리를 옮겨 오디를 땁니다.
산딸기와 오디로 맛을 낸 소고기 패티와 실파 샐러드
기름기 없는 소 엉덩이 살을 잘게 다집니다. 밑간은 산딸기와 오디로 단맛을 내고 약간의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버무려 센 불로 팬에 굽는데 소고기 패티 거죽으로 육즙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고기의 밑면을 잘 살피며 불 조절을 하여 육즙이 패티 위로 충분히 올라오면 한 번만 뒤집어서 익힙니다.
실파를 끓는 소금물에 뿌리째 살짝 데칩니다. 물기를 뺀 뒤 접시에 실파와 달맞이꽃, 그리고 환우 분이 김을 좋아하니까 김을 구워 위에 뿌리고 소스를 얹습니다. 소스는 산딸기, 오디, 달맞이꽃 식초, 소금, 올리브 오일, 들기름 약간을 고루 넣어 입맛에 맞게 만듭니다.
|
|
|
▲ 산딸기와 오디로 맛을 낸 소고기 패티 ⓒ용서해 |
|
|
|
▲ 산딸기와 오디로 맛을 낸 소고기패티와 곁들인 실파 샐러드 ⓒ용서해 |
|
|
|
▲ 여름 야채 샐러드와 달맞이꽃 호박전 ⓒ용서해 |
여름야채 샐러드 텃밭에 자란 모든 야채와 방가지풀을 함께 같은 크기로 잘게 썰고, 위의 소스에 민트 잎을 넣어 접시에 담습니다.
달맞이꽃 호박전 수수가루에 소금을 약간 넣어 간을 하고 달맞이꽃과 함께 호박전을 부칩니다.
막걸리 상그리아 여름철에 하는 ‘삶의 마지막 축제’를 위해서 시원한 막걸리 상그리아를 만들어봅니다. 막걸리에 탄산수, 사과 주스, 생 사과 썬 것, 민트 잎을 띄우면 됩니다.
산야초 장떡 장떡은 여름철 비 오는 날에 정말 자주 해 먹는 음식 중 하나였지요. 여러 가지 산야초를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치고 달맞이꽃 식초로 만든 리코타 치즈, 메밀가루, 고추장, 된장으로 간을 해서 부치면 됩니다.
이렇게, 흙에서 깨달음을 얻은 마음의 감사와 함께, 딸기나무처럼 약한 저를 지켜보려고 만든 가시 때문에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용서와 화해의 염원을 접시에 담아봅니다. 그리고 늘 그렇게 했듯이, 호스피스 요리사로서 이 음식으로 인연을 맺게 된 그분과 함께 ‘삶의 마지막 축제’를 준비합니다.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