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대설주의보
허 연
망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당신, 그렇게 등 돌리고 가서는 어떻게 그 눈雪 많은 날들을 견뎌냈는지 세찬 물소리가 혼을 빼가던 강변 민박집에서 눈을 감으면 누군가 떠나가는 소리들이 들리곤 했었지 이른 새벽 구절리로 가는 젊은 영혼이거나 아니면 영월로 야반도주 짐 꾸린 산판 인부이거나 그게 벌써 언제지...... 막걸리 잔에 맺힌 이슬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걸 보며 나는 자꾸만 궂은 추억에 체머리를 흔들었다 차부에서 십 리는 걸어야 한다는 고향집 큰 언니는 20여 년 전 그날 돌아온 너를 안아주었는지 여기서 멀지 않았었지 칠 벗겨진 이순신 동상 서 있는 2층짜리 교사가 있었고 별이 막 달려든다고 운동장에서 너는 외쳤지 가뭄 끝은 있어도 홍수 끝은 없다고 우리가 목선에 잠시 태웠던 것들은 이제 어디로 쓸려 갔는지 알 수 없고 자꾸 눈을 감는 내게 훅 하고 집어등 불빛 같은 게 지나갔다 눈발은 두렵게 날리고 체인 걱정을 잠시 하다가 막걸리 잔을 다시 든다 춥게 살았던 날들 춥게 살았던 내 옛 애인에게 차갑게 식은 파전을 집어먹으며 이제서야 말한다 그날이 진경이었음을
- 시집〈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예스24
올해 데뷔 햇수로 30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다섯번째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발견한다. 생활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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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