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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화와 후회를 극복할 수 있도록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위일까요?
어떻게 하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혜가 행복을 가지고 오나요? 왜 지나간 과오는 항상 후회를 가져올까요?
10대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커리어와 성공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맞는지,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것이 맞는지,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하는데 상대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원래 스님이 부탄 사람들에게 하고자 했던 ‘기후 위기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주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부탄은 인구가 얼마 안 되는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탄 안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부탄의 젊은이들과 함께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를 주제로 대화해 보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질 생산 지수로 잘 사는 기준을 삼고 있는 지금 시대에는 더 개발된 국가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에는 우리가 소비를 줄여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50년 내지 100년 후에 환경오염이 점점 심해져서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런 삶의 길도 있다’ 하고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부탄 안에서도 가장 개발이 안 된 젬강 지역에 가서 주민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마을개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소비를 줄이는 삶을 좀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는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부유층의 소비는 중범죄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부유한 사람들 중에는 혼자서 100명 분, 1,000명 분의 소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중범죄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이것을 부러워하는 한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적게 소비할수록 기후 위기를 늦출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적게 소비할 바에야 많이 소유하고 나서 적게 소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잖아요. 가진 게 없으면 적게 소비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있는 걸 일부러 갖다 버릴 필요는 없지만, 없는 것을 너무 초라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1960년,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불이었습니다. 그런데 65년이 지난 지금은 35,000불입니다. 350배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을까요? 이것은 책에 있는 얘기가 아니고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350배는 고사하고 35배라도 행복해졌을까요? 아니면 3배는 더 행복해졌을까요?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경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경제가 더 발전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앞으로 1인당 GDP가 10배 늘어서 35만 불이 되면 문제가 다 해결이 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미래에 그렇게 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이 길만 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만약 다른 부작용이 없으면 이렇게 가도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 위기가 닥쳐서 더 이상 이렇게 갈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OECD 가입국, 인구로 따지면 12억, 지구 전체 인구의 15% 정도 되는 개발 국가들에 의해 초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이 길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역시 14억 인구를 가진 인도가 이 길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나라들도 이 길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로 간다면 기후 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지속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또한 행복해지는 길도 아닙니다. 소비를 통해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적게 소비하고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저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붓다는 밥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고도 스스로 행복했고, 많은 사람들을 행복한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런 붓다의 삶을 토대로 한다면 우리가 지속가능한 미래 문명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강연을 마친 후 스님은 숙소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저녁 7시에 맞춰 다시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이 끝나고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오자 큰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2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가볍게 안부를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퍼스에 얼마 만에 오는지 잘 모르겠네요. 한 7년 만인 것 같습니다.”
“2017년에요”
“2017년에 왔었다고요?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제가 퍼스에 처음 온 것은 2014년에 115일 동안 날마다 나라와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세계 115곳에서 강연을 했을 때였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 나라 또는 한 도시씩 다니면서 강연을 했는데요, 그때 처음 퍼스에 왔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 한 번 더 왔었나 봐요. 그러면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여섯 명부터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의 후반부에는 즉석에서 다섯 명이 추가로 질문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시간 동안 11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유년 시절에 가정에서 학대를 받고 자랐지만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후회를 할까 봐 두렵다며 어떻게 부모님을 대해야 할지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저는 부모님을 어느 정도까지 돌봐야 할까요?
“저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어머님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크게 비뚤어지지 않고 밝고 명랑하게 성장했습니다. 부모님 또한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와 불우했던 환경으로 인해 그렇게 행동하셨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두 분 존재는 제 삶의 짐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저 혼자라도 잘 살고 싶어서 부모님을 떠나 호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특별히 부모님을 챙겨드리지 않고, 가끔 거의 생존여부만 체크만 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고민이 됩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싶지만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후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로서 부모님을 어느 선까지 돌봐드려야 하나요? 어떻게 하면 제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모를 해치거나 부모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부모를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자식으로서 마땅히 부모한테 해야 될 도리 같은 것은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이것은 자연생태계적으로 봐도 동일합니다. 자연생태계에서 어미가 새끼를 낳게 되면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 본능이 없다면 그 종은 멸종하게 됩니다. 이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 종이 지구상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생태계에 존재하는 어떤 종도 자식이 부모를 보살피는 경우는 없어요. 아무리 늙어도 성체 사이의 관계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성체가 되지 않은 새끼는 아직 독립된 생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미의 보살핌으로 인해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새끼가 성장해서 성체가 되면 어미와 동등한 관계가 됩니다.
인간은 자기 새끼도 자기가 안 키우고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생태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에 의해 오류가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악행이라고 해요. 생태적인 본능에 의한 행위에 대해서는 선악을 논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것으로 인한 행위에 대해서만 선악을 논합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생태적인 본능에도 없는 좋은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를 ‘선(善)’이라고 말해요. 동물도 안 하는 나쁜 짓을 하면 ‘악(惡)’이라고 하고, 동물이 안 하는 좋은 일을 하면 ‘선(善)’이라고 합니다. 동물도 하는 행위를 하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자연적인 본능이라고 합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거나, 넉넉한 사람이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르쳐주거나, 어른이 아이를 돌보거나, 젊은이가 늙은이를 돌보거나,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돌보거나, 이런 행위들은 선행이라고 말해요. 동물의 생태계에는 없는 이런 행위들은 모두 인위적인 행동이며 선행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선행은 의무 사항이 아니고 선택 사항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연생태계에서 모든 동물이 본능적으로 하는 행위이므로 의무 사항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를 돌보지 않는 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악한 행위는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고 해서 선은 권장하고 악은 징벌하여 멈추게 했습니다. 선행은 권할 뿐입니다. 선행을 안 했다고 해서 나쁜 짓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선행은 자연생태계의 본능이 아니고 인간의 교육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선행을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자식은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마음속에 죄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뇌에 있는 기록을 싹 지워서 망각해 버리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웃음)
그런데 우리는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선행을 학습했기 때문에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죄의식은 실제로 죄를 지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성을 만나서 하룻밤을 잤다고 해서 죄의식이 생기나요? 서로 원해서 잤다면 죄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승려나 신부가 본인을 좋아하는 이성과 하룻밤을 잤다면 죄의식이 생깁니다. 왜 똑같은 행위에 대해서 죄의식이 생기기도 하고, 안 생기기도 할까요? 그 이유는 계율이라고 해서 ‘어떤 행위는 하면 안 된다’ 하는 기준을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계율을 지키기로 약속한 사람은 계율을 어겼을 때 죄책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돌보지 않아서 죄책감이 드는 것도 교육에 의해 학습이 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생태계를 기준으로 하면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이다 보니 학습에 의해 죄책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선행을 하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화라도 드리고, 용돈이라도 보내드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내가 덜 괴롭기 위해서입니다. 미래에 올 괴로움을 막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나를 먹여주고 돌봐주었잖아요. 부모도 자신이 힘드니까 자식에게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때리기도 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요. 동시에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골치 아픈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남이면 미울 때 안 만나면 되는데, 부모는 안 만난다고 해서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받은 은혜가 있으니 돌봐드리면 되는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또 상처가 덧나요. 옛날에 혼났던 기억, 맞았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목소리만 들어도 상처가 올라와요. 만나면 싸우고, 헤어지면 후회하고, 또 만나면 싸우고 헤어지면 후회하고,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책감을 안 가지려고 해도 이미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기준이 교육에 의해 무의식 중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죄책감을 덜 느끼려면 지금이라도 전화를 드리거나, 용돈을 드리거나,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가끔 찾아뵙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후회를 덜 하게 됩니다. 옛말에 부모 돌아가시면 불효자가 제일 서럽게 운다는 말이 있듯이 장례식장에서 많이 우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제대로 못 챙겨준 사람들입니다. (웃음)
질문자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해외에 살다 보니 공통된 고민을 갖고 있을 겁니다. 한국에 있어도 실제로 효도를 못하는데, 여러분은 마치 내가 해외에 있어서 효도를 못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더 많이 괴로운 거예요. 막상 한국에 가면 며칠 같이 살지도 못하고 보따리 싸서 돌아올 사람들이 말이에요. 공연히 고향에 있는 부모를 생각하면서 울고 불고 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감정 낭비를 하기보다는 부모님께 전화 한 통이라도 해드리고, 용돈이라도 조금씩 보내드리는 게 서로에게 좋아요.
아버지가 화를 잘 내는 것은 청각장애로 인해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시골에서 ‘낫을 들고 싸우는 사람은 귀머거리 밖에 없다’ 하는 말이 있어요. 왜냐하면 소리가 안 들리니까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리를 못 들으니까 답답해서 화가 많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어릴 때는 그게 상처가 되었지만,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부모도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잖아요. 미워할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쌍한 존재도 아니에요. 그리고 호주처럼 한국에서도 장애 등급에 따라 연금이 나와요. 노령 연금도 나오고요. 부유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는 정부에서 지원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첫째, 질문자 본인부터 잘 사는 것이 중요해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자식이 잘 사는 게 제일 좋아요. 둘째, 조금 여유가 있으면 작은 용돈이라도 마음을 담아서 보내드리고, 전화라도 드리고, 또 한국 갈 일 있을 때 잠깐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부모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결국 나를 위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가볍고 유쾌한 질문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한 분은 강아지를 집에 데려왔는데 강아지가 자신보다 집안에서 서열 순위가 높아졌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강아지가 집안 서열이 저보다 높아요, 왜 그럴까요?
“최근에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집안에서 서열 순위가 저보다 높아졌어요. 얘는 도대체 뭘 잘하길래 저보다 대접을 잘 받을까요? 강아지가 저보다 나은 점이 뭐가 있는지 납득이 안 됩니다.”
“강아지는 잔소리를 안 하니까요. 주는 대로 받아먹고 가만히 있잖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잔소리도 하고, 주장도 하고 그러니까 밉상이지요.” (웃음)
스님의 한마디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나이가 들수록 웃을 일이 줄어든다며 권태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권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꼭 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스님은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텐데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런 권태를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님의 빅데이터에 기반한 답변이 궁금합니다.”
“권태를 느낀다는 것은 별일이 없다는 얘기예요. 좋은 일입니다. 만약에 갑자기 아이가 병이 나서 차에 실려 가거나,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나에게 암이 생겼거나, 남편에게 암이 발견됐다거나, 회사에 불이 났다거나 하면, 권태를 느낄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권태를 느낀다는 말은 요새 외부적으로 별일이 없고 편안하다는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심심하다는 얘기예요. 이렇게 심심하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심심함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 상태는 무의식적으로 재앙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야 권태로움이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남편도 문제없고, 아내도 문제없고, 사업도 잘 되는 때일수록, 즉 별일 없는 때일수록 수행도 더 열심히 하고, 남에게 더 많이 베풀고, 봉사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재앙이 반드시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나눠 가지는 태도를 가져야 재앙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정진을 하다가 별일 없으면 ‘에이, 정진 안 해도 잘 사네’ 하면서 정진도 그만두고, 봉사도 그만둡니다. 그러다가 재앙이 닥치면 또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매달리면서 다시 절 한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건강하려면 병이 났을 때 치료하는 게 좋아요? 예방하는 게 좋아요?”
“예방하는 게 좋습니다.”
“예방하는 게 제일 좋은 거예요. 예방의 핵심이 뭘까요? 아예 병원균이 없는 상태에 있으면 예방이 되나요? 어떤 병원균이 있던지 나의 면역력을 키워서 능히 이겨내도록 해야 예방이 되나요?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진정한 예방입니다. 그것처럼 여러분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복이 아니에요. 오늘은 여기에서 사고가 나고, 내일은 저기에서 사고가 나고, 이런 일이 생기고 저런 일이 생겨도 이건 이렇게 처리하고 저건 저렇게 처리하고, 그럴 때 면역력이 생깁니다. 어떤 날은 좀 늦게까지 일하고, 어떤 날은 좀 일찍 일을 끝내기도 하고, 이런 모든 상황이 별일이 아닌 인간사의 그냥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바로 면역력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면역력이 없는 사람은 그중에 한 개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난리를 피웁니다. 여러분들이 점 보러 가서 비는 내용들을 보면 대부분이 ‘무균 상태가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겁니다. ‘아무 일도 안 생기도록 해주세요’ 하고 빌잖아요. 그러나 아무 일도 안 생기면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지하수를 파는 기술도 나오고, 댐을 만드는 기술도 나오고, 둑을 만드는 기술도 나온 겁니다. 비가 항상 적절하게 온다면 인간이 문명을 개발할 필요가 없잖아요. 주어지는 대로 살면 되죠. 토인비가 말했듯이 역사란 도전에 따른 응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약간의 자극이 있는 게 좋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게을러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또 아무 일도 없으면 권태를 느끼고 심심해합니다. 그래서 권태기에 들면 여자든 남자든 바람이 나거나 도박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심심하니까 ‘뭐 재밌는 거 없나?’ 하다 보면 사고가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정진을 더 하거나, 교회나 절에 가서 봉사를 더 해야 합니다. 심심할 일이 없도록 책도 보고, 정원도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재앙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1년째 살고 있는 학생입니다. 여기서 일하다 보니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어요. 늦었지만 갑자기 손 놨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살면서 감정을 너무 억압하다 보니 지금은 감정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억압 심리를 극복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혼하고 나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 두 딸을 못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성애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애들 만나는 걸 포기해야 할까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꿈이나 목표가 꼭 필요한가요? 어떻게 하면 꿈이나 목표를 가질 수 있나요?
신문, 방송, SNS를 보면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집니다. 넘쳐 나는 정보들 속에 나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하나요?
결혼 후 아이 세 명을 키우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많이 아프신데, 호주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밤마다 일기를 쓰는데 손해 본 일이 생각나서 화가 나기도 하고 잠을 못 자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네!”
“유익했어요?”
“네!”
“유익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으면 졸립니다. 재미만 있고 유익하지 않으면 강연이 끝나고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진리는 재미도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재미가 있다는 것은 지금 좋다는 얘기이고, 유익하다는 것은 나중에 좋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지금 죽을 고생을 하거나, 지금을 즐기다가 나중에 죽을 고생을 하거나, 이런 상황을 반복합니다. 감정에 너무 치우치면 지금 좋다가 나중에 고생하고, 이성에 너무 치우치면 나중에 좋으려고 지금 너무 힘들게 인생을 삽니다. 수행이란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것입니다. 결과도 좋지만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고 애쓰고 이를 악다물고 살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막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조금 가볍게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곧바로 무대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의 사인을 받고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퍼스!”
청중들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고, 스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사람씩 마이크를 잡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서로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호주에 산 햇수도 다 달랐습니다. 소개를 다 듣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대충 알겠습니다. 여러분이 은퇴하고 나서 할 봉사 일거리를 많이 마련해 둘게요. 부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으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은퇴 후에도 너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10년 정도 봉사하는 것도 좋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정말 많습니다. 인연이 되면 또 뵙겠습니다. 그동안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강연을 총괄해 준 분들과 숙소를 마련해 준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님의 금강경 책을 선물했습니다.
봉사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강연장을 나왔습니다. 퍼스 한인회 회장님이 밖에서 기다렸다가 찾아와 스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 강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출발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퍼스 공항에서 브리즈번 공항으로 이동한 후 저녁에는 브리즈번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