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사기 / 태사공서(史記 / 太史公書)
太史公曰: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역술(歷述)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24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유일한 통사(通史) 다. 고대~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서의 틀을 만들어낸 책으로 손꼽히며,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이자 중국 24사의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중국 전한의 사마천이 상고 시대의 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했다. 본격적인 저술은 기원전 108년 ~ 기원전 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대에서부터 자료가 준비되었으리라 본다면 저술에 들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사관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승하고, 아울러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는 것'으로 각각 설명하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 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사기라는 이름 자체는 한나라 사람들이 사마천의 사기 이전에 쓰이던 역사를 부르던 명칭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로, 후한 말에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바뀌었다가 이후 사람들이 사기라 줄여 사용했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드물다.
『사기(史記)』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기’에서의 ‘기記’는 글자 그대로 기록하다는 뜻이며. 그리고 ‘사史’의 원래 의미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기사자(記事者)’라고 하여 ‘문자를 이용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history)’ 개념이 아닌, ‘직무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사기’는 ‘기록하는 직분을 가진 사관(史官)이란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다’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출전
단, 분량 자체는 편수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많지는 않은 편인데, 현재 원문만 번역하여 낸 것이 대여섯 권 정도 분량 정도, 원문은 글자수로만 따지면 52만 6500여 자로 24사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송사의 1/4 수준이다. 참고로, 역시 통사인 《자치통감》(총 294권)은 번역본이 서른 권이 넘는다. 물론 사기를 실제로 읽어 보면 결코 분량이 적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책의 한 '권' 또는 '편'은 요즘 책의 한 '장'(章) 정도 분량이다. 분서갱유와 초한전쟁을 거치며 원사료들 다수가 소실된 원인도 있지만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이라서 필연적으로 부피가 큰 간독에 기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적절한 부피로 나눈 각 '편'의 분량은 적음이 당연했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쓴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고자로 만든 한무제를 비판했다. 사실 한무제에게 공격이 집중되긴 했지만 역대 중국 왕조와 비교하며 한나라 자체도 매우 비판한 편이다. 다만 현재의 황제를 비판한 부분은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초의 기전체 사서
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닌,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따로 기술하는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역사서다. 이후 분열기를 통일한 통일 왕조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 기전체의 장점이 부각되어, 중국 정사 24사를 비롯하여 고려의 《삼국사기》, 조선의 《고려사》 등이 모두 기전체로 쓰였다. 특히 사기는 사서로서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력도 뛰어나 문학작품으로서 완성도 역시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민중과 사회에 대한 생동감 또한 대단하다. 중국에서 사기에 나오는 직업군에 대해 통계를 내 봤는데 총 1300여 가지 직업들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서 인물에 대한 기록은 본기, 세가, 열전이다.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및 전한대의 제후들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마천은 하 - 상 - 주 - 진 - 한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보아 하, 상, 주, 진시황 일대기를 모두 본기에 서술하였다.
서술 태도
후대의 역사책과 비교하여 특기할 점은 명분보다 실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항우는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하였다. 또한 한의 2대 황제인 혜제와 그의 뒤를 이은 3대 황제 소제, 4대 황제 소제 모두 허수아비 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본기는 아예 없고 대신 여태후 본기가 들어가 있을 정도다. 사기가 전한의 7대 황제인 한무제 시기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단히 과감하게 처사한 것이다. 그만큼 항우와 여후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한조 아래 살던 당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혹은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 왕조에 대해 심사가 좋지 못했던 점을 반영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 왕조의 찬양을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는데, 항우의 격을 너무 낮추면 그에게 항상 패했던 고조 유방의 격도 덩달아 낮아지기 때문에 항우의 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를 패사시키고 한 왕조를 창시한 유방의 격을 높이게 된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 것이다. 여후는 유방의 아내이고 2대 황제의 어머니로 정치 쪽에서는 확실히 간섭을 많이 했으니 이걸 완전히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가 역시 실제로는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와 진승을 세가에 넣은 것도 특이하다. 공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세가가 아니라 본기에 서술된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이니 세가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추시된 것이 전한 말기였으니, 꽤나 선구적인 태도임은 분명하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점은 유학이 전한의 국가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로 유교의 정치 사상인 '명분론'이 확립되던 때였다. 사기가 모델로 삼았던 《춘추》가 역사비평서라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유교적 명분론을 담은 정치철학서로서 독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색적인 서술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 역시 춘추를 대단히 고평가하긴 하였다. 춘추를 두고 천자, 신하, 아비, 자식 모두 통달해야할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는 유교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며, 공자가 세상만사를 포폄함으로써 세상에 큰 가르침을 남기려 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마천은 도가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태사공자서에는 각 제자백가에 대한 견해가 실려있는데, 도가에 대한 편애가 느껴진다. 사마천은 가의 가르침을 따르면 만물의 실체를 통달할 수 있으며 도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군주가 지켜야할 법도라고 명시하고 있다. 유가, 법가, 묵가 등을 다룰 때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사정없이 드러내지만, 도가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고 있지 않다. 한 초기에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에 반해 과진론이 유행하고 무위의 치를 높이 사는 도가가 유행하였는데, 사마천 역시 이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형을 받는 것 역시 사마천이 유학자였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형벌이다.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실상 허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고제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의 시기 중에서 유교가 정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 시기는 없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실제 정치를 포함한 의식 세계의 본질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11대 황제인 한원제 시기에 이르러서인데, 11대 원제는 젊어서 유교에 심취했다가, 아버지 한선제가 이러다가 나라 망치겠다고 하여 황위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 한원제 이전의 한나라 유학은 우리가 아는 유학과는 다른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이다. 단적으로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동중서는 오행설을 들고 나왔는데, 유가와 별개의 학설을 무제의 지배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유가에 끌어다 붙인 것이다. 사마천은 한대 유학이 내세운 미신적인 믿음은 혐오하였다. 이런 미신과 같은 유교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스며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신을 세운 왕망의 영향이다.
다만 사마천이 한대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선진(先秦)의 '유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했다. 젊어서 유학을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며, 공자의 춘추를 높게 평가한 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본다면, 사마천은 어느정도 유가적으로 《사기》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한나라의 유교는 이후의 유교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명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하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돈을 들여 관리 감독하는 책의 경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구성되지만 국가가 본격적으로 감독한 것은 수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법가 사상에 대한 비판이 지배적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법치주의 비판이라기보단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항상 들어있다.
신뢰도
사기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상나라(은나라) 관련 기술이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천 년 가까운 간격이 있던지라 사기에 서술된 상나라 기술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이고, 거기 사기에 나오는 왕이나 사건들은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나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나 전설을 사마천이 집대성한 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가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상나라/계보 문서 참조. 즉, 이런 각 부분부분에서의 실제 사실과의 일치가 종합적으로 모여 사기 전체의 신빙성/신뢰도를 높여 주는 것이다.
춘주전국시대에 즉위한 일부의 군주들의 재위 기간의 오류 문제와 기록이 누락된 군주와 공자세가 등 몇몇 부분에서는 일부 기사가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하나, 으레 그렇듯이 교차검증에서 걸리는 부분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높은 신뢰도에 대한 반박도 있다. 예컨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진시황의 후계를 두고 작당을 하고 음모를 꾸밀 때 유서조작 같은 자세한 내용까지(사구정변) 사기에 적혀있는데 대체 그 둘이 음모를 꾸미는 걸 어떻게 100년 뒤에 적힌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알고 그런 글을 실었겠는가? 이 외에도 각종 사건에 마치 소설같이 서로의 대화 내용까지 적혀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분명히 비판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마천의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마다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 다소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해서 '소수설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것은 현재 학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최근에 관련 연구서를 종합해서 낸 Yuri Pines와 로타르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등이 말하듯, 현재 학계의 잠정적 합의는 "사기의 왜곡과 오류에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사기와 사마천의 커다란 공헌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도이다. 고고학과 출토문헌을 빼고, 전래 문헌만으로 중국 고대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서구 사학계의 의고 성향이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님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의 성과와 출토 문헌의 활발한 활용은, 기존 전래 문헌의 신뢰성을 많은 부분 입증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래 문헌의 오류들을 상당 부분 입증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평가와 번역본
물론 사기는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전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표제가 사마천이 실제로 붙였던 '태사공서'가 아닌 '사기'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정(正)·부(副) 두 본(本)으로 써서 정본(正本)은 명산에 보관하여 사라질 것에 대비하고, 부본은 경사(京師)에 보관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130권 가운데 <효경본기>, <효무본기>, <예서>, <악서>, <병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삼왕세가>, <부근괴성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10권은 이미 전한 후기에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褚少孫)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보충했다. 예를 들어 저소손은 귀책열전을 시중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해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 보충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못 되어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사기의 초기 역사는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 유송 때 배인(裴駰)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130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당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났다. 당나라 때는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을 짓고 또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만들어 이에 주석을 붙였으며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를 통틀어 사기 삼가주(三家注)라고 부른다. 2020년 한가람역사연구소 신주사기에서 3가주, 3가주석 포함한 완역본이 처음 나왔다. 다만 한가람연구소는 그 유명한 악명 높은 이덕일 소장의 연구소로, 환빠적 민족주의 논리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고 실제로도 서문에 강단사학 운운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사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는데, <항우본기>, <위공자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꼽았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전범(典範)으로 평가하고 사기에서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한 열전 27편을 뽑아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삼국지의 왕윤은 채옹을 죽일 때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분명 보수적이고 정통주의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그랬겠지만, 오히려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주는 장점이 되었다. 사기는 당나라부터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나라에서도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당송팔대가인 한유(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남)’이라고 평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그것을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나라 당시에는 잠시 주춤했으나, 청나라에서는 기윤(紀昀)과 조익(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량치차오(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장병린(章炳麟)도 사기와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魯迅)은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군주에 대한 기록을 다룬 <본기(本紀)>보다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룬 <열전(列傳)>이 좀 더 재미있고 읽기 쉽다는 평을 받는다. 본기는 천자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고 있어서 연표에 따라 조금 딱딱하게 구성돵반면에, 열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을 다루고, 연도에 그리 얽매이는 편도 아니라 본기에 비해 덜 지루하며 더 생동감이 넘친다. 현장 답사 위주로 쓰여진 열전들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단 평가를 받는다. 흥미로운 일화나 사마천의 생각, 인물평 또한 열전에 가장 잘 드러나 가르침 역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한국어 번역본
한국에 소개된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중요한 편만 추려내서 뽑은 것이 많다. 국내에 사기와 관련된 책을 보면 열전에서 추려낸 책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사기 완역판을 들면 까치글방에서 여러 학자들이 함께 전편을 완역해 낸 7권짜리 사기
정사 삼국지를 번역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가 혼자 완역한 것을 민음사에서 출판한 것이 있다. 다만, 오역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고전 번역가 신동준이 2015년에 완역본 사기를 냈다.
사기 연구자인 김영수가 완역본을 출간 중이다.
글항아리에서 2012년 수호전(김성탄본) 완역본을, 2019년 삼국지 완역본을 출간한 송도진이 2019년 3월부터 2020년 8월 18일까지 중화서국에서 나온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과 비교하면서 원전 번역하였다. 또한 현재 국내에 번역된 사기열전 중에서 가장 많은 주석을 달아서 연재하였다. 주석은 삼가주만이 아니라 자치통감, 한서, 제자백가 등에서 중요한 내용과 실제 역사 고증, 출전, 현재 지명과 비교 등 엄청난 양의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20년 8월 26일에 출판을 위하여 삭제되었다.)
2020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가장 유명한 주석 3가지, 삼가주, 3가주석 포함한 신주사기 완역본 출간했다. 현재 가장 자세한 한국어 번역본이지만, 사기 본기만 번역했고, 값이 비싸다. 도서관에 김영수 번역본과 함께 구매 신청하자. 2021년 4월 연표와 서까지 번역을 완료했다.
이외에 2005년 교수신문에서 고전 번역본들을 추천하는 기획 시리즈에서 서울대 이성규 동양사학과 명예교수(당시 동양사학과 교수)가 편역한 《사기: 고대 중국사회의 형성》이 완역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번역본으로 추천받기도 했으나, 완역이 아니고, 발췌본이라서 가치가 떨어진다. 번역도 지금 읽어보면 오류가 꽤 있다.
현재 시중에 번역 출판된 사기는 중역본이나 표절이 아니라면 보통 1949년 중화서국에서 낸 표점교감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낸 표점교감의 불완전성이 지적되어 최근에 중국에서 '점교본 24사 및 청사고 수정공정'이 진행되어 최종본 정사를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 결과 2014년에 사기 수정본이 나왔는데, 현재 시중에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이 수정본이 반영된 판본은 개정된 김영수, 한가람 번역본으로 보인다. 혹 현재 완역본의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판본 수정에 따라 새롭게 번역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예 사기를 발췌 번역한 뒤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조화한 번역본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 초한지. 엉터리라고 욕 먹는 삼국지와는 달리,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을 충실히 번역했다. 소설보다 정사에 가까운 번역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