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지친 삶의 행보를 다시 한번 자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불어오는 바람의 흔적을 내 가슴속에 녹여내며 새롭게 만들어져가는 나를 만나는 과정인듯 합니다.
적어도 그랬습니다. 제게는 말이죠. 오늘은 사진작가 샤히둘 알람의 장구한 프로젝트 4년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강을 따라 걸으며 3개의 국경을 넘어 포착한 그의 인간과 풍경 사진 프로젝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행은 끊임없이 경계 너머의 삶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정치적 공간 그리고 인종과 언어의 문화적 장벽을 넘고 종교또한 초월해 가는 과정이지요. 바로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강'이라는 대상을 선택합니다. 물리적인 장대함과 흘러넘치는 유량의 힘속에 유려하게 녹아있는 역사의 시간들을 밟아가기로 한것이죠. 바로 동아시아의 장대한 강들 중의 하나인 브라마 푸트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이 여정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엮어가는 데는 바로 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신비의 원천을 찾아 가는 그 여정에서 바로 강의 시원지인 체마융동 산의 빙하지역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티벳을 넘어 급강하하는 남쪽산맥을 끼고 걸어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넘어가는 이 장구의 여행.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미욱한 세상, 깨달을 것이 너무 많아 그 깨달음 하나로 눈물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어 슬픈 영혼을 닦아내 보라고,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 영혼이 있고, 내 생명 무거운 육신을 벗어 공중을 나는 새가 되라고, 살아 있는 티벳인이 되라고 한 밤중에도 하얗게 내린다. 히말라야 삼나무숲을 흔들며, 말 울음 소릴 내며 이렇게 고요하게 지금 첫눈이 내린다. -송수권의 '첫눈'-
히말라야의 눈덮힌 정상에서 뱅갈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의 움직임과 그 거대함을 넘습니다. 폭포와 모래의 둔덕, 황량한 암반의 흔적과 겨자빛깔로 가득한 평원을 건너 갑니다. 살을 에이는듯한 방글라데쉬의 여름과 티벳의 동토를 넘어 가는 여행. 낙하하는 진홍빛의 가을 낙엽과 생동하는 초록빛의 몬순을 넘어 히말라야의 눈덮힌 능선을 터벅터벅 그렇게 걸어갑니다.
티벳을 넘어 중국으로 그리고 방글라데쉬라는 장구한 3개국의 국경을 넘어가는 그들에겐 시간이란 이미 사멸해 버린 규정의 힘을 가진듯 합니다. 시간이란 거대한 힘앞에서 삶의 모든 물상들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바로 이 거대한 여행자의 발걸음 아래 즈려 밟혀지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무상의 세계를 다시 한번 긍정의 땅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들을 되살리고 복원시키는듯 합니다.
저 태고의 산맥보다 더 오랜 시간을 흘러가는 유동의 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의 형상들. 작가는 이러한 강의 모습 속에서 시간의 형성력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의 대지를 다시 한번 그려내고 있는듯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이 강을 Yarlung Tsang Po 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바로 '정화수'라고 하네요. 인도에서는 이 강을 Brahmaputra.즉 우주의 신 브라만의 아들이란 뜻으로 명명한다고 합니다.
강 위에서 펼쳐지는 삶은 끊임없는 '변화'란 자장의 힘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유동적이고 현세적입니다. 거대한 강을 써래질 해대던 수많은 돗단배들은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강을 건너면서 그들이 불러대던 '바티알리' 부족의 노래는 이제 기계화된 엔진의 소음으로 대치된지 오래입니다. 지나친 남획으로 점점 더 어부들의 삶은 식민화 되고 경작을 위한 씨앗들은 말라가지만, 그러한 인간의 난폭한 움직임에도 착한 대지의 힘은 인간을 먹이고 양육합니다.
위의 사진처럼 티벳의 작은 카페 벽위에 걸려 있는 노방 포스터는 이제 갓 시작된 서구의 시선들을 조금은 보여주는듯 합니다만 여전히 고졸한 미는 녹녹히 그들의 삶 면면에 녹아 있는듯 합니다.
일몰의 시간은 고요하고 정치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현재 진행형의 움직임속에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소멸과 낙하의 형태를 빚어냅니다. 스러지는 것들은 모두다 그 속에 '강력한 삶의 파성추'들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대지의 깊이 속에 그 빛을 전하는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선상에서의 삶이 고단한 것은 물질적 풍요로 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적인 삶의 유연한 형태속에 이질적인 서구의 시선과 힘들이 푸르른 틈새를 밟고 들어오기 때문은 아닐까요?
은빛 여울의 형상에 어우러지는 인간과 자연의 조우. 내가 자연인지 자연속의 내가 참인지를 더 이상 현상학적인 언어로 설명하기란 불가해 한 것임을 알기에, 무언가를 해명하려는 인간의 언어는 부족한 우리 내 삶의 짐과 같은 것임을 다시 한번 아게 하려는듯. 뱅골만의 일몰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길게 찟어진 구름 틈으로 흘러오는 한가락 빛의 형질들. 차를 키워내는 사진속의 티벳의 한 차 농원의 고적한 숲 위에도 여전히 내려옵니다.
나그네에겐 '바람'은 친구와도 같은것. 강 주위에 외롭고 처연하게 놓여진 앙상한 나무들의 연회속에 진홍빛 구름과 겨자빛깔의 모래를 밟으며 걸어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살펴봅니다.
물고기를 낚는 방글라데쉬의 어부들의 모습을 봅니다. 남루한 그들의 고깃배 위에 원색으로 물들여진 화려한 돗의 형상들. 마치 한편의 타피스트리 처럼 초록빛깔의 평원과 황토빛 강물 위에 새로운 심상들을 짜깁어 냅니다.
그의 사진을 보는 동안 눈을 감을수 없었습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 모든 벡터의 차원을 통과하는 시간이란 상수가, 적어도 끊임없이 걸어감으로서 초월의 길을 향하는 나그네에겐 아무런 부질없는 힘의 차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이면우의 '그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전문- |
첫댓글 아마도 있는 그대로의 삶은 숭고하고 경건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무엇인가가 섞이어 들어가는 과정의 혼탁함이란 추해보이는 시선을 만드는데....그것은 아직 섞이지 못한 이질감에서 오는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