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바르트의 신학은 인간의 한계를 !!
그러니 저는 칼 바르트의 이런 철학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신학에 대해서, 인간이 죄인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발상 중에 하나라고 보는데, 그의 신학전체를 말이다. 즉 인간이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갈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저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언약부터 출발해야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인간위주가 아니라 언약위주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칼 바르트는 결국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다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그의 후반부의 신학을 보게 되면, 이웃사랑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 신학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즉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되고, 그런 인간에게서 전혀 선은 나올 수 없다고, 그렇게 유명한 '로마서 강해'에서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를 참으로 복음적이고 보수주의라고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런데 점점 후기에 가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기에 관심을 좀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인간 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혹시 치매증세?)
* 질문 - 그러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언약은 무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것인가요?
언약은 우리 소관이 아닌데, 즉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약속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시편 110편에 나오는데, "주(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예언이 나온다는 말이다.
◈ 주(主)께서 내 주(主)에게 !!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러니 주님이 두 분이라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유일신 사상에서 이것은 참으로 엉뚱한(?) 것인데, "어떻게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면 족하지 싶은데, 그런데 하나님 옆에 또 한 분의 하나님이 계셔야만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옆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졌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루심의 결과에 의해서 모든 일이 다 진행된다는 것이다. 마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영향으로서 파도가 치고 물결이 밀리면, 그 밀린 물결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듯이 말이다. 즉 주님께서 하신 일에 삼킴을 당해서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그냥 길을 걸어가는데,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흙탕물을 치고 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렇게 온통 주님의 피로, 즉 십자가로 뒤집어씌워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다.
* 질문 - 칼 바르트는 여전히 인간의 기대치를 가지고 있지만, 목사님은 난데없는 은혜라는 것이죠?
칼 바르트가 그런 주장을 하는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에 교회가 너무나도 윤리와 도덕적으로 강조해서 이야기를 하니, 제발 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윤리와 도덕으로 결코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동문서답??)
* 질문 - 그러면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의 차이점은 어떠한가요?
소위 이들을 '신정통주의' 라고 해서 다 같은 그룹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부르너는 대부분을 칼 바르트에게 동의를 했는데, 그런데 그는 소위 '자연신학'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즉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에 있어서 부루너는 일반 자연세계에도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칼 바르트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해서 왜곡이 되어서 자연을 보아도 거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엉터리이지 참된 하나님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이 아닌 인간이 왜곡?) 그러나 부루너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이때까지만 해도 칼 바르트는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의 신학이 대부분이 복음적인데, 특히 고백교회를 주장하면서, 교회는 교회이기에 교회가 아니라, 고백하는 그 순간에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학원에서 모이면 학원이 교회가 되고, 식당에서 모이면 식당이 교회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무슨 고백을 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인식론'을 이미 하고 있는데, 이런 고백을 통해서 인식론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런 고백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통해서 지금 인식론에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고백을 주체를 말이다. 전에도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은혜로서 사랑했다는데,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라고 말이다. 그런 것이 인식의 문제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께서 아무리 나를 사랑했어도, 내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이 도로묵이 되잖아" 라는 것이다.
◈ 네가 네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야 !!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라는 것이 계속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데, 즉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물건에 바코드가 다 내장이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 바코드를 어디에서 찍는가?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 찍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물건이 인형이라고 한다면, 그 인형은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 인형의 바코드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그런 것들이 모두 들어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창조될 때 바코드처럼 박혀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절대로 네가 네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인간의 '바코드'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에덴동산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번 들어보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나무가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또한 이렇게 옆에 있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 '선악과'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그냥 인간을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왜 거기에 선악과가 세워져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 생각에는 없어도 되지 싶은데 말이다. 아니,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말씀과 더불어서, 즉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에 갇힌 채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인간은 '죽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
바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무엇을 해도, 즉 그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죽음' 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무엇을 해도 죽음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하늘이 참 푸르다" 라고 해도, 그렇게 하늘이 푸르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새로 오신 선생님이 아무리 날씬하고 예쁘다고 해도, 그렇게 날씬하고 예쁜 상태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무엇을 해도 죽음과 끊어진 체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 김태희는 그렇게 예쁜데 왜 죽는가?
그러니 질문을 하더라도, "야, 정말 예쁘네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쁘게 될 수 있나요?" 라고 하면 안 되고, "그렇게 예쁜데 왜 죽는가?"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달리기를 잘 하는데 왜 죽는가?", 혹은 "나는 설교를 잘 하는데 왜 죽는가?" 라고, 그렇게 항상 죽음의 조건과 관련을 시켜서 이야기를 해야, 즉 "하나님이여, 나는 왜 만들어졌습니까?" 라고 해야, 그렇게 해야만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 상담은, 자신의 죽음과 결부가 되어야 !!
아까 상담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최고의 상담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 그 사람의 죽음을 결부시키면, 그렇게 하면 모든 해답은 다 나온다는 것이다. 죽음과 결부를 시키면 말이다. 그런데 죽음이 아닌 영원히 산다고 하는 그런 삶과 관련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서, 수학공부에 대해서 상담했다고 해도, 그렇게 산다는 것과 관련시켜서 상담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은 며칠이 지난 뒤에 또 오는데, "선생님, 그렇게 해도 수학학습이 제대로 안 되던데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세요"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지 않고 천년만년 산다고 여기니, 수학을 잘하는 체로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 선악과를 배제한 인간은 없어 !!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선도 알고 악도 아는데, 그런데 영원히 살지 않고 어디로 가는고 하니,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도 알고 악도 알면서 영원히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즉 수학을 잘하면서 영원히 살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선악과 앞에서 그 따위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인간이라고 만든 적이 없기에 말이다. 그것이 곧 창세기 2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자기가 엄청난 부자라고 해도, 그래서 "하나님, 저는 부자인 체로 영원토록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영원한 삶과 연관된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짓이고 말이다.
이 선악과 문제를 그대로 제대로 설명을 하려고 제 나름대로는 노력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만족스러운지 모르겠는데, 일단 여기서 창세기 3장 22절을 보자.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신이시여, 왜 안 됩니까?
저는 사실 이 구절을 고민하면서 제대로 해석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래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하는데, 아니 선악과를 따먹고 난 상태에서의 인간은, 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을 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여러분은, 인간이 왜 선악과를 따먹고 영원히 살면 안 되는지, 그런 것은 따지고 싶지 않은가요? 저만 그렇나요? 무슨 말인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선도 알고 악도 알고, 그렇게 똑똑하게(?) 되었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면 제대로 일도 더 잘하지 싶은데, 그런데 왜 그러한 사람은 왜 영생을 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 아무튼, 선악을 알았으면 영생은 안 돼 !!
그런데 이 본문에는 왜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고, 무슨 말만 있는가? "선악을 알았으면, 영생을 하면 안 돼" 라는 조건만 붙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창세기 2장 17절 말씀에 어긋난다는 것인데, 인간을 만들 때 이미 인간 옆에다가, 즉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어놓은 하나님의 선악과를 만든, 그런 하나님의 창조취지를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공연이 심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이유가, 즉 그 값을 한다는 말이다. 마치 여자가 얼굴이 예쁘면 그 값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즉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유가 유명무실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그런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값을 찾는데, 인간을 보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죽는데,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도 자꾸만 살려고 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죽음에 갇혀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180도 바뀌어서 영원히 살자는 쪽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 그래도 '내'가 믿지 않으면 ??
그래서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인식론'과 관련해서 말이다. 즉 예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그까짓 것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제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해도, 또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데, 사실은 그런 말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가만히 있어라. 누가 뭐라고 해도 믿는다고 하지 말거라.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구원이 된다" 라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것을 네가 믿는가?" 라고 한다면, 사실 그런 요구조건이 전혀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해도, 그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해도,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이 없다고 하면, 즉 "예,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저는 바빠서 시간이 너무 없네요. 사실 관심도 별로구요" 라고, 그렇게 자기 쪽에서 믿지 않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멀쑥하겠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아이 참, 내가 니 한테는 도저히 못 당하겠다. 니는 고집이 나보다 엄청 더 세네. 니에게는 정말이지 졌다. 지금부터 니가 알아서 해라. 잘 있어라" 라고 하면서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이렇게 되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고 하니,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 '믿는다' 라면, 도대체 어디 어느 순간까지?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때, 도대체 어느 것까지 믿어야만 믿음이냐는 말이다. 어디까지 끊어서 말이다. "예수님의 피" 까지 인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다" 라는 것까지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서 영생을 얻었다" 라는 것까지인가? 도대체 어디까지냐는 말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예수님의 피" 까지 믿은 것이 5시 정각이고, 또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다" 라는 것이 5시 10분이고, 또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서 영생을 얻었다" 라는 것이 5시 20분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순간 어디까지 믿어야 제대로 된 믿음이냐는 말이다. 인간의 속에는 모두들 자기 의지가 다 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물이 있다고 하면, "여기에 물이 있다" 라고 했을 때, 도대체 어느 순간까지 이야기해야 그것을 '내' 의지로 물로 인식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물" 까지 말했을 때인지, 아니면 "여기에 물이 있다" 라고 말했을 때에 물인 줄로 알았는지, 아니면 그렇게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보기만 해도 물인 줄 알았는지 말이다. 또 보더라도 그냥 대충 보는 것인지, 아니면 자세하게 보는지, 그것이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들으면 마치 무슨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자기 의지가 도대체 어느 시점에 끊어서, 자기의 의지가 그것이 물인지 인식을 했느냐는 말이다. 어느 시점에서 말이다.
◈ 라이 - 인간의 인식은 허구에 불과 !!
그런데 이 문제가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영국의 '라이(?)' 라는 유명한 철학자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그러한 모든 것이 허구라고 말이다. 그 양반의 주장에 의하면, "뭐,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고? 웃기지 마라. 인간에 그런 의지는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인간에게는 그러한 의지가 없는데, 그냥 자기 몸이 땡기는 것을 가지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냥 '의지(意志)' 라고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의지만 믿어 !!
그러니 그때 물을 보고서 "야, 물이다" 라고 했고, 또한 예수님을 보고는 "주님, 믿습니다" 라고 자기 의지를 동원해서, 그렇게 "내가 나의 의지를 보고 믿는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느 시점인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믿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5시 10분인지, 아니면 15분인지, 어느 시점,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한번 딱딱 끊어서 말해보라는 것이다. 사실 답변이 불가능한데, 그러니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 시점은 자기 중심으로 볼 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자기 중심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즉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예수까지 알고 믿으라고 하니, 어떻게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타타타 / 김국환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 어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 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어허허허허허~~~어허허허허허허허 -----------------------------
◈ 부부도 서로의 마음을 몰라 !!
부부가 같이 살아도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데, 사실 알아도 좋을 것은 없지만 말이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서로서로 적응하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어떤 양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누군가가 새장가를 들면 좋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동안 이렇게 9년을(?) 힘들게 서로 맞추어왔는데, 다시 그런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이 또 드느냐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아내가 남편에게 몸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데, 자기가 줄만큼 주는데, 즉 알아서 딱딱 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가 아무리 똥폼을 잡아도 몸을 허락하지 않을 때도 있고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서, 마누라가 쓰레기통을 좀 비워달라고 하면 물론 그 정도는 비워주지만, 그런데 거기에다가 빨래도 좀 해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가? 한번 째려보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또 다시 빨래를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런 '적응' 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싸우면서도 균형을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므로 결국 이 말은 남편은 아내를 모르고, 아내는 남편을 모른다는 말이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말들은 곧잘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남녀가 서로 데이트를 하고 또 결혼을 해서 살아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에 불과한데, 그러니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그런 사랑의 막대가 부딪치게 되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결코 인간은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칸트 -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신을 !!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 인식론에 있어서 칸트(Immanuel Kant, 1724.4.22~1804.2.12)가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부터 칸트 이야기를 좀 하겠는데 말이다. 칸트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나도 내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어떻게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렇게 거울을 보면 자기가 보이는데,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거늘, 하물며 자기를 만든 신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신이 만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인가? 신은 자기의 오성(悟性)과 직관(直觀)이 조립한(?) 것이란 말이다.
다만 여기에서 칸트가 이야기한 것은, 인간에게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먼저 데카르트가 그런 말을 했는데,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그 주체는 의심할 수가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 그러나, 의심하는 주체도 의심을 해야 !!
그런데 칸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렇게 의심하는 주체도 항상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의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오늘 아침에 의심을 했던 것이 오후에는 의심이 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그때그때 오는 것을, 그것을 '감각' 이라고 하는데, 그런 그때그때 오는 감각을 자기 속에 있는 오성이, 그리고 그 오성을 직관이라고 하는데, 즉 직관이 재구성을 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에 따라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같은 여자라도 데이트를 해보면 어떤 때는 너무나 좋고, 커다란 얼굴도 둥근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어떤 때는 무슨 꼭 호박 덩어리와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을 해도 그렇고, 하지 않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 그것이 신의 명령이고, 절대선 !!
그래서 칸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신을 어떻게 조립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윤리와 도덕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즉 '그것은 나쁜 짓이야. 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은 '나' 말고 또 다른 '나'가 있어서 명령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신의 명령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이것을 신의 명령이라고 하기보단 '절대선(善)' 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곧바로 신의 명령이라고 해버리면 주위로부터 불신자라고 공격을 당하니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이유도 없이 착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인데, 즉 선한 힘이라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왠지 착해지고 싶은 마음이 !!
그러니 칸트는 이런 면에서 사람을 굉장히 도덕적이고 착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심지어 내일아침에 처형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라고 해도 왠지 착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마음이 자기에게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사형수들이 62명이 대기하고 있는데, '유영철' 이라는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그도 반성을 하는데, 자기가 죽인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하라고 강제로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속이고 속여도 착한 것은 착하다고 말이다. 착한 것은 그냥 이유 없이 착한데, 수학에서 말하는 '공리(公理)'와 같다는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은 지정의(知情意)이다 ??
또한 철학에서 말하는 공리에는 3가지가 있는데, 즉 "인간의 마음은 지정의(知情意)이다" 라고 말이다. 지식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3가지는 왜 그렇게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는데, 공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라이' 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부정해버렸는데, 즉 '지정의' 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분류가 안 되는데, 그래서 분류가 되는지 한번 해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식적인 것과 감정적인과 의지적인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비빔밥이 먹고 싶다" 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지식인지, 아니면 감정인지, 또한 의지인지 어떻게 분류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그런 것을 배워서, 우리 인간 속에는 지정의가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말이다. 신학교나 교회에서는 그것을 하나님 형상이라고까지 가르치고 말이다.
◈ 인간은 온 몸으로 사건을 따라가는 !!
아무리 분류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래서 그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냥 우리 인간은 온 몸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사건화가 되게 하는 그 사건이 발생되면 말이다. 즉 그런 사건에 우리 인간은 온 몸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신세라는 것이다.
남자들이 술이 한잔 들어가면 마누라가 어떻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지만,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가면 고개를 숙이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의지로서 마누라에게 큰소리를 치고 싶다고 한들,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싶어서 지정의를 동원해도, 막상 현장에서 사건에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고양이 앞에서 쥐에 불과한데, 그래서 마누라가 현관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 양반이, 또 늦게 들어왔어? 그런데 돈은? 아니, 이것밖에 없어. 또 조사를 좀 해봐야 되겠네. 그냥 조용히 잠이나 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걸리면 혼이 나고 말이다. 이렇게 사건이 터지면, 자기가 예상했던 지정의는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그냥 자기가 큰소리를 친 허구만 남는다는 것이다.
◈ 이근호 - 인식론 자체가 허구 !!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러한 인식론 자체가 허풍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 같은 경우에는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계시사건'을 말이다. 그의 신학에서 있어서 바로 이것이 하이라이트인데, 즉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건으로 되는 것이지, 자기가 배고픈 것도 사건이고 말이다. 그러니 따져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 정작 칸트는 '사건'을 몰라 !!
아까 제가 칸트가 신이 어떻고 한다고 욕을(?) 했지만, 그러나 정작 칸트는 이러한 사건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알기는 알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자기 어떻게 할 수 없고,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칸트는 사건을 절대 선으로 보았나요?
그렇다고 볼 수가 있는데(?), 도덕적 사건으로 말이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착하지도 않는 사건들이 왔을 때, 그것은 두고 어떤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건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 우리 인생은 안개이니 !!
그러니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의 사건으로, 즉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그냥 기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은 안개와 같다고 했으니, 그러니 그런 인식론 자체가 시간이 남아서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즉 일종의 취미라는 것이다.
만약에 지금 지진이 일어나서 불이 나고 지붕이 내려앉는다면, 그냥 걸음아 날 살리라고 하면서 마구 도망을 치기에 바쁘지, 인식론적으로 그것을 따지겠느냐는 말이다. "아니, 왜 지진이 났지? 지붕은 왜 내려앉고, 불은 왜 나는 거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인식론적으로 따지는 것도 하나의 사건으로
그러니 이렇게 인식론적으로 따지는 것도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는 것인데, 즉 인간이 뿜어내는 사건으로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인간은 죽음과 연계되어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똑똑해도 죽고, 나쁜 짓을 해도 죽고, 또한 너무 착해도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너무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라고, 즉 "적당하게 살아라" 라는 상당히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잠 24:24)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잠 24:25)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잠 24: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그런데 신약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따지고 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의 사건일 줄도 모르고서, 즉 우리는 그런 사건의 아들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 사건을 지배해버리면, 우리가 복음의 사건들을 방해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은혜를 받은 것을 따지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 나는 은혜, 니는 강요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돌아서서 "저 사람은 복음을 전하니 믿던데, 그런데 너는 왜 믿지 않는가?" 라고 해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그만 강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구원을 받은 사건을 믿어놓고는, 그런데 자기가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는 따져서, 즉 지정의를 동원해서, 그렇게 납득이 되도록 하면 구원이 되는 줄로 착각을 한 것이란 말이다. 바로 이런 것 자체가 주님의 복음사역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해를 받을 분이 아니지만 말이다.
◈ 목사님, 이발을 하니 너무 핸섬해요 ??
지금 제 헤어스타일이 어떠한가요? 방금 이발을 해서 나풀나풀한 풀잎과 같은데(ㅋㅋ), 미장원을 하는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미장원에 있으면 전도를 하려고 오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남묘호렌게교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오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존교회에서 전도를 하려고 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아주 간단하게 답변을 해주었는데,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전도하는 것은 주님의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교회에 나오라는 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나쁜 일이라고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주었는데, 예수님은 지금도 쉬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이다.
◈ '전도가 무엇인가?' 라는 것도 하나의 사건 !!
그렇다면 이렇게 "전도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장원에서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배용준이 어떻고, 또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어떻고, 그리고 자기 아이들 선생님이 어떻고 하지, 그들이 무슨 전도에 대해서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서 전도를 하면 천 원을 주어서 그냥 보내는데, 마치 중들에게 시주를 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전도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도 하나의 사건인데, 즉 하나님께서 일을 꾸미시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신앙이 깊어지면(?) 그것이 바로 주께서 주신 은혜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 당시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데, 그냥 전도하는 것이 왠지 짜증이 나고 힘이 들지 말이다.
아무튼 주께서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보고 "일을 하세요" 라고 해서 주님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말이다. 미장원뿐만이 아니라, 학원에서도 일으키고, 직장에서도 일으킨다는 것이다. "어, 이상하다. 나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저런 일이 생기지? 정말 이상하네" 라고 말이다.
◈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결부해서 !!
그런데 그런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자기가 지배하려고 한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는 그 복음전파에 자기가 훼방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처음 사랑을 이야기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데, 즉 '선악과' 라는 죽음이 주시하고 죽음이 관찰하는 그 죽음의 모포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어!" 라고 하시는 가운데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인간은 죽은 것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너무 너무 맛있어 보이는 과일이 있으니 그냥 따먹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어떻게 하셨는가? 가차없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켜서 죽음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셨는데, 영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는 천사를 두어서 지키도록 하시고 말이다. 물론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무한대로 질문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죽음과 결부해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 결론은, 십자가의 죽음 !!
그러니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죽음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들은 죽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때 십자가의 죽음이 마중을 나오게 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께서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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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에베소서를 !!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다음주 10월 7일 오후 7시에 우리교회에서 교회사 특강이 있어서 공부시간이 중복이 되는데, 아마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추후 서로 협의해서 시간을 다시 조절을 하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교회에서도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가 마음이 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이야기한 인간의 주체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나 그 주체는 허구라는 말이다. 그런 허구에 우리가 마음이 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
이제 에베소서를 시작하겠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에베소서를 한번 해보겠는데, 이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여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분명히 성부 하나님은 아닌데,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통일된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절의 중들이나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 안에서 통일이 된다" 라고 하면 모두가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자기가 이렇게 존재해 있는 것은, 자기를 창조한 그 어떤 신비롭고도 절대적인 분이 계시다고 여길 것이니 말이다.
◈ 그런데, 왜 예수 안에서 통일이 되는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종교의 교주(?)인 '예수' 라는 양반으로 모든 것이 다 통일이 되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태어나서 교회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너무 일방적이고 횡포가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경우에 1800년대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죽은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순신 장군도 있고 말이다. 전부가 다 자기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서 산 사람들이지 않는가? 또한 왕건이나 신돈도 있고 말이다. 물론 신돈은 땡 중이라는 말도 있고, 성불한 도사라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기회를 주어야지, 자기들이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를 못한 예수 때문에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억울하냐는 것이다. 도대체가 그런 하나님이 무슨 공평한 하나님이냐는 말이다.
◈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을 !!
그래서 이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을 보면, 인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싶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창세 전에 이미 예정을 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을 불러서 세워놓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예정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 같이 만들어놓고는, "너희들은 선택이 되었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의 예정 자체가 인간의 능력이나 경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정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정되지 않은 자들을 이 땅에 같이 나타나도록 해서, "사실 기회는 다 같이 없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들을 택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 선택되지 않은 자들도 그 기능이 !!
그러므로 예정이 되지 않은 사람은 어떤 기능이 있는고 하니까, 예정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자기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선택이 되지 않은 체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정된 사람이 예정되지 않은 사람이 비해서 착하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자질이 아니라 예수님이 따로 관리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덕분에 구원이 되었고, 또한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런 예수님 덕분에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 통일 - 오직 예수님만이 주(主)가 되십니다 !!
흔히 '통일' 이라고 하면,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주(主)가 되십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또한 온 천하에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만의 통일인데, 즉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통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마지막 날에 다 부활이 되는데, 즉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다 서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들러리도 예수님이 만들어야 !!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냥 '들러리'가 되고 마는데, 하지만 이러한 들러리가 되는 것도, 또한 없는 들러리를 만드는 것도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들도 역시 그 밑바탕에는 예수님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들러리 하나를 만들어도 예수님께서 모두 다 알아서 만든다는 말이다. "나는 들러리가 될 거야" 라고 해서 들러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들은 이미 창세 전에 이런 들러리를 하기 위해서 예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천국에 갈 놈은 천국에 가고, 또한 지옥에 갈 놈은 지옥에 가도록 미리 작정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이 엄청나게 우리의 모든 인생의 염려와 고민과 짜증거리를 마치 고성능 진공청소기로 깨끗하게 빨아드려서 그야말로 시원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북극에 온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성공했기에 말이다.
◈ 성도의 사전에는 실패가 없어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고민하는가? 실패 때문에 두려워서 고민을 하는데, 실패 뒤에 다가오는 그 참혹함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미 성공을 했다면 실패는 아예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 사전에는 실패가 없는데, 그 통일됨이 있는 자들에게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사전에는 실패라는 것이 없는데, 마치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라고 했듯이 말이다. 물론 그에게는 불가능이 차고 넘쳤지만, 그러나 성도에게는 전혀 실패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에, 즉 창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이 선택이 되었기에 말이다.
◈ 요한계시록 - 아예 도장을 꾹, 꾹, 꾹 !!
요한계시록은 이것보다 더욱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는데, 아예 도장을 찍어놓았다는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도장을 찍어서, 그렇게 생명책에 도장이 박힌 사람이 아니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감도장을 찍어놓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던 간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실패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그런데 침신대 학생들은 왜?
제가 대전에 있는 침례교신학대학의 축제에 가서 바로 이런 내용을 강의했는데, "성도에게는 실패는 없고, 오직 성공만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제가 창세 전의 예정을 이미 이야기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런데 그들의 관심사가 신학교를 빨리 졸업해서 목회에 성공하는데 있기 때문에, 즉 성공하지 못하면 자기는 쪽박을 찬다고 하는 실패감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도에게는 성공만 있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즉 복음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데, 아무튼 성도에게는 실패란 없다는 말이다. 이미 예수 안에서 통일이 되었으면 주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야기가 에베소서 전체 이야기인데, 사실 이것으로 에베소서는 모두 다 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성경전체의 내용이기도 하고 말이다.
◈ 성도에는 실패가 없기에, 아내와 남편이 서로 !!
그렇게 성도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에 에베소서 5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리고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패라는 것이 없기에 말이다.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런데 만약에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반대급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니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니, 이런 나쁜 년!" 이라고 하면서 사고를 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더욱 커지는데, 즉 "내가 이만큼 사랑했는데, 안 돼,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또한 성도에게는 실패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미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줘도 괜찮다는 것이다.
◈ 이미 성공을 했기에, 모든 것을 다 주어도 !!
다시 말해서,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괜찮고,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이 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것은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해서 못할 짓이지만, 그러나 이미 성공을 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도 자기가 성공한 사람인 줄 모르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었기에 성도에게는 더 이상 실패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 에베소서 2장 4절 말씀부터 살펴보자.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에 6절에 보면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했으니,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것이 어디인고 하니,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렇게 되려면 몸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야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한데,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이미 하늘나라에 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는 실패가 없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
여기 8절 마지막에 보면,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하는데, 여기 '하나님의 선물' 이란 대목만 설명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도 속에 침투해서 내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도저히 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옛날에 '코드명 J' 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비디오 테잎으로 빌려서 보았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말이다. 인간의 머릿속에 모든 정보다 다 입력이 되어있어서, 스캐너를 가지고 훑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것이 싫어서 자기 머릿속에서 빼려고 하는데, 자기가 그만 종이 되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죽음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독자적으로 알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만든 적이 없기에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심겨졌으면 반드시 선물의 형식으로, 그렇게 계획을 따라서 선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 따라오는 선물이 곧 '믿음' !!
그것이 바로 '믿음' 이란 것인데,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분이 결코 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심겨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물은 뒤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이마트에서 김치 냉장고를 하나 사면 선풍기가 하나 따라오듯이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본다는 것이 우발적 사건으로 보면 됩니까?
물론 그것이 우발적 사건인데, 주께서 계속해서 일을 하심으로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결국 그 사건을 우리 인간이 인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본인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밖으로 인식을 시켜준 인식을 해버린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기에 !!
물론 맞는 말인데,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제가 '통일' 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통일이 가만히 있는 통일이 아니라 사건화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태풍이 불면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사건이 밀려오는데, 그러한 사건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선물로 알게 하는 사건, 즉 믿음이란 사건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가지고 "당신은 언제 믿었습니까?",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믿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물론 믿음을 자기가 만든 것 같으면 대답을 할지 몰라도, 즉 "제가 그때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가 일으킨 사건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언제 어떻게 믿었는지를, 그런 것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1일에 이근호 목사님의 에베소서 '통일설교(?)'를 듣고 믿었나? 그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언제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그러니 '인식' 보다는 '사건'으로 !!
하지만 그래도 뭔가가 믿어진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러한 것 자체가 바로 사건의 지배를 받는다고 볼 수 있는데, 굳이 그러한 것을 두고서 '인식' 이라고 하면 인식이라는 말이다. 즉 주님의 사건에서 나온 인식론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론이라고 하기가 좀 곤란한 것은, 그렇게 인식론이라고 하면 그것을 다른 곳에서 사용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인식론은 아침저녁으로 다르기 때문에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론적인 면에서는 가치가 없는 인식론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냥 사건이 사건으로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인식이 아니고 말이다.
◈ 지금부터 아고라(?) 토론방으로 !!
* 질문자 A : 어떤 사람에게 동일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인식을 한다고 치고, 하지만 그것이 믿음에 대한 인식인지, 믿음에 대한 인식이 아닌지, 과연 그것을 인식할 수 있나요? 제 생각에는 못하지 싶은데 말입니다. 칼 바르트도 똑같은 인식을 했지 싶은데, 목사님도 역시 그렇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규정지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 이 근 호 : 제3자의 인식은 거기에 끼어 들 수가 없는데, 물론 규정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질문자 A : 그러니 지금 목사님의 말씀 중에서, 사건화가 된 그 자체를, 즉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알아보고, 또한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인정하시는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런 방식의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 이 근 호 : 물론 인정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지금 이렇게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이 지우개는 사물이라는 것이다. 밖에서 그것을 지우개라고 동의를 하든지 말든지 말이다.
* 질문자 A :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보는데요. 둘 다 예수님을 고백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둘 다 성도라고 판단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 이 근 호 : 물론 그렇게 규정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 이것이 지우개가 아니고 전두환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악한 마음이라고 우리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은 전두환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이지 말이다. 왜냐하면, 마음자체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3자가 함부로 관여하고 규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질문자 B : 그러니 이것이 관여의 문제로 빠져야 하는데, 그렇게 둘 중에서 한 사람에게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것마저도 부인하고 싶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오늘 정리를 다 해버려야 다음에 다시 질문이 안 나오지 싶은데 말입니다. 사실상 이런 것들이 항상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거든요.
* 이 근 호 : 물론 그런 가능성은 있는데, 가능성은 말이다.
* 질문자 B : 그러니 왜 그런 시도를 하느냐는 말인데, 아예 간섭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놓아두자는 말입니다.
* 질문자 A : 그런 것은 아는데, 그래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보면, "이런 사람들을 두고 성도라고 합니다" 라는 표현이 참 많은데, 그런 규정들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하시는지요?
* 이 근 호 : 물론 성경에 근거해서 그렇게 설교를 하는데, 그것이 곧 칼 바르트가 말한 고백교회인데 말이다. 이 고백교회라고 하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라고 하는데,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말이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그렇게 규정짓지 말자는 것인데, 교회가 어떻게 그 사람이 성도인지 아닌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교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교회 수가 별로 안 되는데, 동의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 질문자 B : 이것은 오늘 제가 하루 종일 고민한 것인데요. 저는 친구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그래서 모여도 항상 세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목사님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는데, 그래서 그들이 이 세상 이야기만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주님은 자기 뜻대로 일들을 다 처리하심을 믿고 말입니다.
* 이 근 호 : 그런데요?
* 질문자 B : 그런데 또 이쪽에 하나의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복음을 듣고, 정말이지 자기들은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말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쪽에 있던 저쪽에 속해있던 간에, 주님은 빈틈없이 자기의 일을 다 처리하시는데, 그러니 제가 어디에 있든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이 근 호 : 그렇지요.
* 질문자 B : 제가 이쪽 교회라는 무리에 꼭 속해있을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쪽 무리에 속해서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그런데 당신은 왜 이쪽 교회에 속해 있어야만 하느냐고, 그렇게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제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 이 근 호 : 방금 이야기한 것도 집사님의 고백인데, 그런데 그러한 고백이 문제가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나중에 또 바뀐다는 것이다.
* 질문자 B :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 내용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 이 근 호 : 물론 문제가 없는데, 사실 집사님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 중에서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야, 교회에 가는 것이 왜 그렇게 재미있지?" 라고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는 것이다.
* 질문자 B : 그러니 교회에 나오는 사건을 두고, 그것이 감정일 수 있지 않느냐고 지레짐작을 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 이 근 호 : 그것은 그때 감정일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 질문자 B : 저는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하는데, 물론 사실이 또한 그렇고 말입니다. 또한 교회를 다니지 않는 무리들 속에서도 주의 일은 빈틈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틀에 너무 묶여 있다가 보니, 사실 전혀 수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이 근 호 : 방금 집사님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교회라는 틀에 너무 묶여 있다가 보니" 라고 말이다. 그것은 집사님의 경우이고, 그렇게 묶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전혀 고민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너무 자유로운 행태라고 공격할 수도 있고 말이다.
* 이 근 호 : 칼 바르트가 고백교회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고백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으로 소급을 해서 주님만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게 되면, 그 사람이 그러한 고백을 했는데, 물론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또 다른 고백이 나오는데,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예수 자체가 싫다" 라고 말이다.
* 이 근 호 :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다가, 또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뭐라고 하든 예수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는데, "베드로야,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봐" 라는 식이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조차도 다 예수님에게 일임을 하자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전혀 걱정하고 고민하지 말자는 것이다.
* 질문자 B : 그렇다면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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