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를 절대 잊지 말자 1
淸汀 李秀一
우리 민족의 비극(悲劇) 6.25 사변(事變) 때인 1950년 겨울
우리 (國軍)은 전쟁(戰爭) 초기(初期) 북괴(北傀)의 기습(奇襲) 공격(攻擊)으로
절대적(絶對的)으로 열악(劣惡)한 조건(條件)아래에서 낙동강(洛東江)까지 밀려
조국(祖國)이 풍전등화(風前燈火) 의 고비를 맞았으나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 1964) 장군(將軍)의 역사적(歷史的)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의 성공(成功)에 이어 북진(北進)을
계속(繼續)하면서 통일(統一)이 눈앞에 왔다는 것을 의식(意識)한 국군(國軍)과
유엔(UN)군이 서쪽에서는 압록강(鴨綠江)으로, 동쪽에서는 두만강(豆滿江)을
목표(目標)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올라가던 당시(當時)의 이야기다.
1950년 영하(零下) 40℃를 밑도는 혹한기(酷寒期)인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개마고원(蓋馬高原)의 장진호(長津湖)에서 피아간(彼我間) 처절(悽絶)하게
진행(進行)되었던 장진호 전투(戰鬪)는 제2차 세계(世界) 대전(大戰) 때
소련군(蘇聯軍)과 독일군(獨逸軍)이 싸운 스탈린그라드(Сталингра́д
현재 명칭은 볼고그라드 Волгогра́д)전투와 함께 세계 전사상(戰史上)
2대 동계(冬季) 전투(戰鬪)로 유명(有名)하며 미군(美軍)의 전사(戰史)에서
'역사상(歷史上) 가장 고전(苦戰)했던 전투'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본 전투의 작전명(作戰名) 장진(長津)은 장진호 지명(地名)에서 비롯되었지만
영어(英語)로는 왜어(倭語) 독음(讀音)을 따서 Chosin(JA;ちょうしん)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韓國語) 지도(地圖)가 없고 왜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11월 함경남도(咸鏡南道) 장진호까지 선봉(先峰)으로 진격(進擊)했던
10군단(軍團) 산하(傘下) 미 7사단(師團) 3개 대대(大隊)가 장진호 주변(周邊)에서
은밀(隱密)하게 숨어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中共軍)의 매복(埋伏)에 걸려
궤멸(潰滅)위기를 맞았으나 이는 중공군이 개입(介入)할 것이라는 첩보(諜報)를
무시(無視)한 채 무모(無謀)하게 내린 상부(上部)의 북진 명령(命令) 때문이었다.
개마고원의 겨울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중공군 3개 사단에게 고전하고 있던
미 1해병(海兵)사단(師團)에게 또 다른 복병(伏兵)으로 나타나 앞에는 눈이
가로막고 뒤에는 중공군이 쫓고 있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이었다.
악전고투(惡戰苦鬪)를 거듭하면서도 12월 초에는 사단 전체(全體)가 하갈우리에
집결(集結)할 수 있었다.
또한 미 제7사단 31연대도 합류(合流)했으며 이들 병력이 장진호 협곡(峽谷)을
빠져나가야만 아군(我軍)과의 재편성(再編成)을 할 수 있었다
11일 유엔군 사령부(司令部)는 서부전선의 붕괴(崩壞)로 동부전선의 고립(孤立)을
피(避)하기 위하여 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의 철수를 결정했다.
유엔군사령부 터너 수송참모가 철수(撤收) 하기 전 스미스 미 제1해병사단장에게
모든 장비(裝備)를 버려야만 병력만이라도 수송기(輸送機)로 철수할 수 있다"고
제안(提案)했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 같은 치욕(恥辱)은 없었다며 정중(鄭重)하게
거절(拒絶)하면서 온갖 고난(苦難)이 기다리는 육상 철수(撤收)를 택했다.
미 해병대의 일상적(日常的)인 구호(口號)인(semper Fidelis= Always Faithful
항상 충실 하라는 의미의 라틴어)처럼 평소(平素) 항상 최악(最惡)의 상황(狀況)에
대비(對備)해야 한다 는 소신(所信)을 갖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은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補給品)을 남겨두고 야전(野戰) 활주로(滑走路)도 닦아 만약(萬若)의
사태(事態)에 대비하면서 상부의 지시와는 달리 진격 속도(速度)를 늦춰
지공(遲攻)으로 북진(北進)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