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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名 개념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해석
이태호(대구가톨릭대학교)
Ⅰ.
노자의 『도덕경』 81장 중 名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章은 10개(1장, 14장, 21장, 25장, 32장, 34장, 37장, 41장, 44장, 47장)이다. 이 章들을 분석하면서 고대 동양사상가인 노자가 생각한 名이 무엇인지를 현대 서양사상가인 화이트헤드의 언어로 말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화이트헤드의 언어가 동양과 서양뿐만 아니라 옛날과 지금도 함께 소통시킬 수 있는 유기체적 우주론(organic cosmology)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이름하여 유기체 철학(organic philosophy)이라고 했다.
유기체 철학은 모든 존재자(entity)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사고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substance)의 존재를 부정한다. 동양의 사상들은 대부분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적 관점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 하는 화이트헤드 철학은 유기체적 관점을 바탕에 두고, 서양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다듬어 온 논리적 정합성을 지닌 범주로 우주론을 구축하였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우주론은 부동(不動)보다 유동(流動)에 우선성을 주고 있다. 그래서 부동의 세계를 포착하는 추상성보다 유동의 세계를 드러내는 구체성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큰 주류는 추상성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마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실체(substance)가 존재론의 중심에 자리 하는 등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말한다. 이 오류가 철학의 난맥상을 만들어왔다고 지적한다. 추상적인 것 중 하나가 이름(名)이며 여기에 과도한 지위를 부과한 오류를 발견하고 지적한 면에서 화이트헤드와 노자는 시공간을 넘어 사고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범주로 노자의 名 개념을 해석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의(意義)가 있다. 첫째는 노자의 名 개념이 노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道 개념을 아는데 지릿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지금까지 노자 해설가들 중 상당수가 名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고, 이것으로 인해 道 개념까지 잘못 해석하도록 오도(誤導)해 온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名 개념의 불분명한 해석으로 인해 노자를 지나치게 신비스러운 사상가로 만들어서 오히려 그의 주장을 희석시키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서양철학자의 언어로 고대동양사상가의 글을 해석하는 이 작업을 통해 동서고금의 장벽을 없애고 소통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우선 노자 도덕경에서 名 개념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알아보자. 14장을 보면 ‘이름’과 ‘이름붙이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이,희,미)는 개별로 따져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섞여서 일자(一, 無)가 된다. 그 위(하늘, 陽)는 밝지 않고 그 아래(땅, 陰)는 어둡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어 이름 붙일 수 없다. 만물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만물이 없는 모양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황홀”하다고 한다. 이것은 맞아들이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 가려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옛날의 도(道)를 갖고서 지금의 유(有, 음과 양)를 헤아리면 옛날의 시작(無)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道의 실마리라 한다.
14장에서 제시된 것처럼 名 개념이 명사(名詞)로 쓰일 때는 ‘이름’이고, 동사(動詞)로 쓰일 때는 ‘이름붙이다’가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夷), 듣기지 않는 희(希), 잡히지 않는 미(微)로 각각 이름붙이지만, 섞이어 하나인 무물(無物)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 무물의 세계는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다.(不可名) 어떤 것이든 그것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한정이 되어야 한다. 한정이 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시작과 끝을 제시할 수 없다면 이름으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름에 사용할 수 있는 존재범주(categories of existence)를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이라고 하며, 이것을 한정형식(form of definiteness)이라고 풀이한다.
한정해서 구분할 수 있으면 이름 붙일 수 있고, 한정해서 구분할 수 없으면 이름 붙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이(夷)는 보이는 것, 듣기지 않는 희(希)는 듣기는 것, 잡히지 않는 미(微)는 잡히는 것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세 가지가 섞이어 하나가 된 것은 밝고 어두움의 구분이 없고,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게 이어지고 이어지니 이름 붙일 수 없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렇지만 한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는 이것을 한정되지 않는다는 자체를 하나의 한정으로 보고 이름 붙여야 한다. 그래야만 한정되지 않는 이것과 한정되는 많은 다른 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21장에서 한정되지 않아 이름 붙일 수 없이 황홀한 것을 도라고 말하면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이것으로 만물의 시초를 살핀다고 하였다.
(텅 빈) 큰 덕의 모습은 오직 道 이것을 따른다. 道의 사물(物)이 되며, 오직 어슴푸레(恍)하고 오직 흐릿(惚)하다.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그 속에 형상(象)이 있다.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그 속에 사물(物)이 있다. (道는) 그윽하고 어둡지만 그 속에 정수(精)가 있다. 그 정수는 지극히 진실하여 그 속에 믿음이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道로써 만물의 처음과 끝을 살펴 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초를 알 수 있겠는가? 道의 오묘함 속에서 알게 된 것이다.
만물의 시초를 살필 수 있으면서 사라지지 않는 ‘道’라는 ‘이름’은 한정되지 않는 황홀한 것으로서 정의(定義, definition)된다. 무엇으로 정의되든지 정의가 되면 그것은 한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라는 의미가 바로 ‘뜻을 한정해서 분명히 하다’는 것인데, 道라는 이름은 ‘한정되지 않는 황홀한 것’으로 한정되어 분명하기 때문이다. 21장에서 노자는 道와 관련된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은 형상(象)과 사물(物)이다.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그 속에 형상(象)이 있다.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그 속에 사물(物)이 있다.’(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여기서 두 가지가 구분되어야 한다. 道라는 ‘이름’과 道의 ‘대상’이다. 道라는 이름은 형상(象)이 있기 때문에 한정되어 분명하다. 그러나 道의 대상(物)은 한정되지 않고 흐릿하고 어슴푸레(황홀)하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범주에 따르면, 황홀한 상태에 있는 道의 대상(物)은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ies)에 대한 느낌인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이다. 그리고 道라고 한정해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s)에 대한 개념적 느낌(conceptual feeling)이다. 화이트헤드가 둘 다 느낌(feeling)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주체의 경험에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언급은 주체적 직접성을 결여한 공허한 현실태(vacuous actuality)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에 부정한다.
공허한 현실태가 아니라 경험주체에게 느껴진 대상은 일반적으로 물리적 느낌을 야기하는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ies)와 그것을 한정하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s)이 결합된 채로 느껴지게 된다. 이때 느낌이 일어나는 흐름의 방향은 대상에서 주체 쪽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물리학 용어로는 벡터라 하고, 화이트헤드의 용어로는 인과적 유효성(causal efficacy)이라 한다. 인과적 유효성은 과거가 현재에,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성질이다. 그 영향이 연장적 관계 속에서 감각에 주어지지 않아 그 지각대상은 모호해서 의식적으로 선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해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지각대상은 명석판명하고, 동시적 세계가 감각에 주어지는 것이며, 연장적 관계의 연속체로서 의식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현시적 직접성에 의한 지각은 스칼라적 성격이 강하다.
고등동물의 경우에는 인과적 유효성과 현시적 직접성의 두 양태를 하나의 지각으로 융합하는 종합적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상징적 연관(symbolic reference)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상징적 연관에 의한 “상징작용은 보다 높은 수준의 생활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상징작용의 오류는 결코 완전히 회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가 상징작용의 오류는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가 발생하는 고등동물에게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는 지각후기의 보완국면에서 일어나고,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는 지각초기의 호응국면에서 일어난다. 호응국면은 주어진 여건에 그대로 주체가 호응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그리고 순수한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도 오류는 없다. 감각주체가 감감여건을 있는 그대로 직접 수용하기 때문이다. 오류는 두 지각양태가 연관되는 과정에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지각은 구성요소에 대해 의식에서 가장 명석하게 지각하기 때문에 ‘해석’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예를 들면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 속에 보이는 사물은 거울 뒷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로 지각된 것이다. 벡터성질을 갖고 있는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로 지각된 것은 거울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지각을 연관 짓는 상징적 연관에 오류가 발생한다.
고등동물인 인간의 지각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언어로 표현한다. 이때 그 사물이나 사태는 상징이고, 그것을 표현한 단어는 의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종이에 쓰인 단어를 읽거나 볼 때는 단어가 상징이고,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태가 의미이다. 언어로 소통을 하는 인간경험의 행위 속에 상징적 연관이 있을 때 지각자의 전체적 구조는 상징(symbols)인 한 쌍의 구성요소로부터 의미(meaning)인 다른 한 쌍의 구성요소로의 상징적 연관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언어 중 형용사가 현시적 직접성과 명사가 인과적 유효성과 관련된다. ‘회색 돌’을 예로 들었을 때, 회색은 현시적 직접성으로 명확하게 국소화(localization)되어 감각지각에 드러나지만, 돌은 모호하게 국소화되어 동일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왜냐하면 ‘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직접적 미래의 예상과 결부되어 있는 직접적 과거에 있어서의 인과적 유효성에 대한 특정한 느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돌’이라는 단어에 대한 지각을 인과적 유효성과 관련된다고 언급한 것은 특이하다. 돌이라는 단어에 대한 지각에서 돌이라는 단어가 상징이라면 그 단어가 가리키는 사물로서의 돌은 의미이다. 이때 돌이라는 사물은 화이트헤드의 범주로는 결합체(nexus)이다. 이 결합체는 지각하는 주체에게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고 있는 존재자(entity)이다. 이 존재자는 모호하게 국소화되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일한 것으로 지각자에게 추정될 뿐이다. 여기에 비해 그 돌의 색깔인 ‘회색’은 지각자에게 명확하게 국소화되어 감각지각에 드러난다.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난 회색은 화이트헤드 범주로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이다. 영원한 대상은 사물이나 사태를 한정하는 형식(form)인 존재자(entity)이다. 이 한정형식(forms of definiteness) 때문에 지각자는 그 사물이나 사태를 다른 사물이나 사태로부터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현실적 존재자나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는 현실태이다. 여기에 비해 영원한 대상은 가능태이다. 경험주체에게 개념적으로 인지될 가능성으로 있는 비시간적 대상이다. 최종근거가 항상 현실적 존재자(넓은 의미에서는 현실태)여야 한다는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에 따라 영원한 대상은 현실태에 진입해서 실현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계기하는 현실태에게나 혹은 다른 현실태에게 진입할 수 있는 가능상태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능태이다. 임의의 현실적 존재자에게 반드시 진입해서 그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경우를 실재적 가능태(real potentiality)라고 한다. 어떤 현실태에게 진입될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를 순수 가능태(pure potentiality)라고 한다. 어떤 상태로 있든지 영원한 대상은 임의의 현실태를 한정해서 다른 현실태와 구분 짓게 한다.
이 세상에 한정형식인 영원한 대상이 없다면 모든 사물이나 사태는 구분되지 않고 혼돈상태에 있게 된다. 영원한 대상이 진입함으로써 제각각 그 사물이나 그 사태가 된다. 이때 모든 결합체는 그 사물 그 사태로 이름 붙이게 되면서 만물이 된다. 물론 한 결합체에 하나의 영원한 대상만 진입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영원한 대상이 진입해 있다. 돌이라는 결합체에는 회색 이외에도 돌의 모양(시각의 대상), 단단한 정도와 매끈한 정도(촉각의 대상), 뚜드렸을 때 나는 소리(청각의 대상), 돌이라는 이름과 숫자(사고의 대상) 등이 패턴(pattern)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한 사물이나 사태에 진입하여 패턴을 이루고 있는 영원한 대상(한정형식)들의 다발들이 그 결합체를 규정하는 요소들이 된다. 이 다발들 중 임의의 한 개(회색 등)로 그 결합체를 인식할 때 그 인식에 관여하는 영원한 대상을 한정특성(defining characteristic)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한정특성으로 각각의 사물이나 사태를 인식한다. 이때의 지각작용을 변환(transmutation)이라고 한다.
우리의 지각과정은 변환을 포함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의식적 지각에 이르게 된다. 의식적 지각은 인간을 포함한 고등동물만 가능하고, 그 동물에 있어서도 지각의 후기 단계에만 가능하다. 우리들 의식 속에 명석판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우리 경험의 요소들은 경험의 기본적인 사실이 아니며 오류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경험의 기본적인 사실은 모호한 지각 속에 있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많은 난제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 이러한 의식에 의해 추상된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지나치게 신뢰한데 기인하고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이다. 철학은 독단의 오류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어왔다. 이 오류란 작업가설의 원리는 명석판명하고 개혁불가능하다는 신념에 있다. 그래서 철학은 이러한 오류에 대한 반발로서, 방법을 포기하는 오류라는 별개의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이런 오류는 모두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의한 지각을 원초적인 지각으로 상정한 데 기인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의한 지각을 원초적인 지각으로 상정하고 있다.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의한 지각의 대상은 아직 이름이 붙여지기 전의 사물이나 사태이다. 왜냐하면 이름이 붙여진 대상은 현시적 직접성과의 만남을 통해 상징적 연관이 일어나서 상징과 의미로 분리된 뒤에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의 대상인 사물이나 사태를 실재(reality)로 본다면, 그 실재로부터 우리들 감각지각에 주어지는 감각여건이나 의식에 주어지는 이름 등은 현상(appearance)이 된다. 진리는 실재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는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참이냐 아니냐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재가 현상으로 드러났을 때 그 현상이 실재에 순응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참이냐 거짓이냐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실재가 현상으로 들어나는 과정을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실재가 현실적 존재자들의 결합체일 경우에는 경험하는 주체 쪽으로 에너지가 전이되어 물리적 느낌으로 주어진다. 그 물리적 느낌에서 개념적 느낌이 파생되는데, 이때의 개념적 느낌은 경험하는 주체가 그 실재를 한정하는 형식인 영원한 대상을 느끼는 경험이다. 경험하는 주체가 생명체인 경우에는 개념적 느낌에서 다시 부분적으로 같고 부분적으로 다른 개념적 느낌이 발생한다. 그래서 새로움이 있게 되고 창발적 진화가 있게 된다. 동물로 올라가면 그 결합체를 한정하는 특성으로 결합체가 변환되어 느끼게 된다. 고등동물로 올라가면 그 결합체를 주어로 하고 그 결합체의 한정특성을 술어로 하는 명제적 느낌이 발생해서 그 명제와 결합체를 비교하게 된다. 이때 사실(in fact)과 (사실)일 수 있다(might be)는 긍정-부정의 대비가 이루어지면서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으로서의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의식은 경험의 불가결한 토대가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얻어질 뿐인 경험의 왕관(crown)이다. 의식은 복잡한 통합의 후기에 속하는 파생적 국면(phase)에 나타난다. 그리고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파악을 희미하게 조명하고,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파악은 생생(명석)하게 조명한다. 이렇게 의식은 근원적 요소가 아니라 파생적 요소에 불과하며 오류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의식을 지각에 있어 근원적 요소로 인정하는데 철학상 난제들의 대다수가 발생한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의식의 오류에 대해 과학 쪽에서도 밝히고 있어 이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토요섹션(2016.5.28.)에 기사화된 자료에 잘 드러나고 있다. 타이틀 글은 “착각하는 뇌. 보고 듣는 게 전부가 아냐… 실제 세상은 느끼는 것과 달라. 뇌와 감각기관은 주어진 현상을 적응·생존에 도움 되도록 재구성”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서양 속담도 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니 당연한 말로 들린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흔히 눈·코·입·손 등을 통해 느끼는 감각과 뇌에서 이를 인식하는 것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우리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것과는 다르다. 감각기관의 기능은 우리가 처한 세상을 ‘정확하게’ 감지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살펴보면 감각기관이 왜곡(歪曲)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생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아이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언어에만 집중한다. 다른 소리는 자연스럽게 무시한다. 'R'과 'L'의 구분이 중요한 영어권의 아이는 이 시기에 'R'과 'L'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한다. 반면 한국, 일본 아이는 생후 1년이 지나면 두 발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두 발음을 구분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데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유전자의 차이가 아닌 후천적인 결과이다. 한국이나 일본 아이라도 영어권에서 태어나 살면 두 발음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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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현상이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주변 환경에 많은 것’ ‘과거에 경험한 것’ ‘기대하는 것’ ‘변화하는 것’일수록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화장실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처음 들어갔을 때 코를 쥐게 하는 악취라도 1분도 지나지 않아 무감각해진다. 코가 냄새를 맡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해한 냄새라고 뇌가 인지했기 때문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냄새가 변하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경험하지 않은 다른 냄새는 빨리 알아채야 위험한지 판단할 수 있다. 경험은 무의식중에 감각기관을 지배한다. 조명을 쳐다보라고 말하면 누구나 위쪽을 먼저 바라본다. 태양, 달 등 밝은 것은 위에 있다는 선천적인 경험과 인공적인 조명도 위에 있다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착시현상은 감각기관의 왜곡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주변 배경에 따라 색을 조절해 다르게 받아들이고, 한 색상이 피곤할 정도로 지속되면 다른 색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나에 집중하도록 선택하면 다른 것들은 지워주기도 한다. 한 사람을 집중해서 보면 시야 안에 있어도 다른 사람은 저절로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소리 역시 한 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하면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감각기관과 뇌의 지각은 주어진 현상들을 적응과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적절하게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아닌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시각은 모든 색의 가시광선을 만드는 3원색인 빨강·파랑·녹색에 민감하다. 가시광선 중 일부에 최적화돼 있다. 이와 달리 뱀은 적외선을 보고, 나비는 자외선을 본다. 각자 생존에 적합하도록 일부만을 받아들이게 돼 있다. 사람의 감각기관과 뇌는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고,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다. 받아들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개성도 생긴다. 흔히 ‘착각’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람의 뇌와 감각기관은 착각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지막 문장 “흔히 ‘착각’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람의 뇌와 감각기관은 착각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셈이다”는 말은 화이트헤드가 착각과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창조성을 위한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감각지각이나 의식을 지각의 근원으로 보거나 오류가 없는 최종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는 『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갖 관념들과 같은 추상적인 구조들은, 이들을 구현하고 있는 개체적인 합성물을 떠나서 특출한 실재성을 지닌 것으로 상정되어 왔다. 이러한 추상적 구조들은 그 본성에 있어 창조와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과정은 망각되어 왔던 것이다. ⋯⋯ 그래서 궁극적인 지혜는 불변하는 실재에 대한 정적인 명상으로 묘사되었다. 행위로부터 추상되어 있는 인식이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名의 개념은 당연히 의식의 대상이고 추상적인 구조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인식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 있어 노자도 같은 입장이다.
Ⅲ.
노자도 화이트헤드처럼 의식적 지각을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개념규정은 더욱 망설인다. 그것은 의식에 선명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궁극적 실재에 대해 이름 붙이기를 망설이는 상황이 25장에 나온다.
(개별화되기 전의) 만물이 뒤섞인 채(chaos, 혼돈상태)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고, (소리 없이) 고요하도다! (형체 없이) 공허하도다! (對比 없이) 홀로 있고 (逝, 遠, 反의 일정성이) 바뀌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가(미치)면서도 (만나는 모든 것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만물을 낳는 모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냥 도(道)라고 부르겠다. 억지로 이름하여(그 이유를 설명하면) 그것은 크다(大)고 할 수 있고, 크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逝)이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멀리 근원에 이르는 것(遠)이라 할 수 있고, 근원에 이른다는 것은 다시 되돌아가는 것(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역시 크다. 세상에는 4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의 하나이다. 사람(왕)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는 한정특성으로 개별화되기 전의 상태를 혼돈으로 상정하고, 이것을 천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것은 당연히 天地보다 먼저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라 불리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한정특성으로 개별화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해 있는 많은 별들과, 땅에 속해 있는 산과 바다 등은 더욱 개별화된 자식으로 ‘손자’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의식에 명석하게 드러난 대상들이다. 의식에 명석하게 드러난 대상은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노자는 궁극적 실재는 한정형식이 들어가 있지 않아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吾不知其名)고 말한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道라고 하며 大라고 한다.(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그것(근원적 실재)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놓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은 대화의 소통을 위해 이름을 사용하지만 그 이름에 매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궁극적 실재를 道와 大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크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逝)이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멀리 근원에 이르는 것(遠)이라 할 수 있고, 근원에 이른다는 것은 다시 되돌아가는 것(反)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궁극적 실재는 서, 원, 반(逝, 遠, 反)의 괘도를 따라 움직이는 길(道)인데, 이 길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大로 이름 붙인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실재(reality)를 과정(process)으로 본 것에 대비된다. 합생과정과 이행과정을 거치면서 일자와 다자가 창조성에 따라 끊임없이 창조적 진전을 하는 모습을 떠나서 더 궁극적인 실재가 없다는 화이트헤드 존재론의 골격을 보는 것 같다. 노자는 이 현실세상에서 道처럼 큰 것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天地人을 들고 있다. 이때 큰 순서대로 하면 道⟩天⟩地⟩人이다. 그래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道는 무엇을 본받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대답이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누구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창조성은 누구(혹은 무엇)를 본받느냐고 물으면 아마 스스로 그러(自然)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밝힌 名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 등 노자의 핵심사상을 집결한 것으로 보이는 1장을 검토해보자. 1장은 가장 오래된 죽간본(竹簡本)에 보이지 않고 백서본(帛書本)부터 보인다. 따라서 1장은 노자가 직접 적은 것이 아니고 후대에 존재론과 인식론에 밝은 해설가의 해설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해도 1장은 81장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도덕경의 키(key)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1장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名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여기에 제시한다.
道라고 말할 수 있는 道는 항상의 道가 아니다. (왜냐하면 道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래서) 항상 이름 붙이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그 묘(한 실재의 세계)가 보이고, 항상 이름 붙이고자 함으로써 그 요(현상의 세계)가 보인다. 이 (묘와 요)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서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이 같은 곳을 일러 현(모호한 세계)이라 한다. 모호하고 모호하니 (이곳이) 여러 묘한 세계의 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해석에 따르면 “道라고 말할 수 있는 道”는 道라고 불릴 수 있는 대상(對象)이 있고, 그 대상을 지칭하여 ‘道라고 말할 수 있는 道’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道이다. 예를 들면, 집 근처에 있는 큰 길을 보면서 ‘그 길(道)’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권도(跆拳道) 도장(道場)에서 관장이 무도(無道)에 대해 말하는 ‘그 道’일 수도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道는 그 대상이 변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여기에 비해 “항상의 道”(常道)는 항상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구체적인 대상 없이도 사유 가능한 추상적인 道이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둘은 같지 않고 다르다. 그래서 “道라고 말할 수 있는 道는 항상의 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렇게 두 가지가 다른 이유는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차이 때문인데, 이 차이가 바로 이름에서 발생한다는 점이 다음 문장에서 밝혀지고 있다.
다음 문장은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이다. 이때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이름 붙일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즉 구체적인 대상과 결합된 이름이다. 따라서 이 이름은 대상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이름이다. 여기에 비해 ‘항상의 이름’은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된 이름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의 변화와는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성을 지닌 이름, 즉 항상의 이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대상과 결합된 이름으로 ‘팔공산’이 있다. 이 산은 왕건이 견원에게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후 위기에 물렸을 때, 신숭겸을 포함한 8명의 신하가 왕건의 복장을 하고 팔방으로 도망가면서 포위망을 뚫어 왕건을 살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전의 산 이름은 ‘공산’이었는데 8명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팔공산은 그런 유래에 따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이지만, ‘항상의 이름’은 아니다. 팔공산으로 불리기 전에 공산이라는 이름에서 바뀌었다는 것도 있지만 앞으로도 다른 이유로 충분히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한 ‘산’은 항상의 이름에 속한다. 따라서 구체성을 지닌 이름(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과 추상성을 지닌 이름(항상의 이름)은 다르다.(名可名 非常名) 이것을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해석하면 구체성을 지닌 이름은 실재적 가능태로서의 영원한 대상과, 추상성을 지닌 이름은 순수가능태로서의 영원한 대상이 된다.
노자는 의식적으로 추상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와 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이 다음과 같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래서) 항상 이름 붙이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그 묘(한 실재의 세계)가 보이고, 항상 이름 붙이고자 함으로써 그 요(현상의 세계)가 보인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이름 붙이지 않은 세계는 한정형식이 진입하지 않아 모호한 상태로 있으니 며(妙)를 보게 되고, 이름 붙인 세계는 한정형식이 진입하여 만물이 뚜렷하게 구분되니 요(徼)를 보게 된다. 이때의 요(徼)는 변방을 가리키는 말로 경계가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결국 묘의 세계와 요의 세계의 차이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가, 붙여지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름은 우리 인간의 의식이 붙인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실재세계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거나 붙이지 않거나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동일한 곳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이 “이 (묘와 요)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서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이 같은 곳을 일러 현(깊은 세계)이라 한다. 깊고 또 깊으니 (이곳이) 여러 묘한 세계의 문이다”(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로 되어 있다.
Ⅳ.
이번에는 32장의 해석을 통해, 이름이 발생해서 많아지는 이유와 그렇게 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노자의 생활 자세를 살펴보자. 노자의 책은 道와 德이 합쳐진 도덕경이다. 노자의 이름에 대한 생각은 이론에 머무는 것을 넘어 생활에 적용하는 실천 철학을 담고 있다.
道는 늘 이름이 없다. 오직 통나무 같이 (쓸모가) 작아서 천하에 신하로 삼아 거느릴 자가 없게 된다. 만약 군왕이 (통나무의) 道를 지킨다면 세상 만물은 모두 스스로 그에게 손님처럼 따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감로(甘露)가 내리게 될 것이며, 백성들은 명령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따를 것이다. 마름(재료를 필요한 규격대로 베거나 자름)을 시작함으로써 이름이 있게 된다. 또한 이름이 이미 있더라도 무릇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출 줄 알면 위태하지 않게 된다. 비유하면 道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골짜기와 시내의 물이 강과 바다와 더불어 함께 있는(흘러들어가는 것)것과 같다.
통나무를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그 판자를 잘라서 책상, 의자 등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통나무에서 여러 두께의 판자들을 만들면 1㎝ 판자, 2㎝ 판자 3㎝ 판자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판자들로 책상이나 의자 등 가구를 만들면 이름은 더욱 많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이름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세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의 생각은 이름이 많이 생기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반대방향으로 가서 이름이 하나도 없는 통나무 상태로 가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이것을 존재론으로 확대하면, 이름 없음(無名)이 天地의 시작이 되고, 이름 있음(有名)이 萬物의 어미가 된다. 道는 당연히 이름 없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32장의 첫 문장이 ‘道는 늘 이름이 없다’(道常無名)로 시작된다.
47장에도 이름이 많이 생기는 방향으로 가지 말고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인간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우주운행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인간세상의 이치나 우주운행의 이치를 알려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인위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자신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이나 해야 하는 일에서 멀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인간세상의 궁극적 이치)를 알고 , 보지 않고도 (각 사물이나 사실을 구분하여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신경을 써 억지로) 하지 않고도 (인간세상의 이치와 우주의 궁극적 이치를 알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름이 많이 생기는(지식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적어지고, 반대방향으로 가서 통나무처럼 무지한 상태에 이르면 오히려 많은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34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남기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오히려 잘못되고, 이름을 높이거나 남기려고 하지 않아야 크게 이룬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이유는 육신은 쉽게 늙어가고 죽지만 이름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는 염원 때문이다. 이것을 명예심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도 이름이라는 영원한 대상(추상적인 것)을 현실적 존재자들의 결합체(현실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생활에 적용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해당할지 모른다.
큰 道는 넘쳐흘러 좌우 어느 쪽도 가능하다. 만물은 道를 믿고(道로 말미암아) 태어 낳지만 道는 말(간섭)하지 않는다. 공을 이루고도 명성을 바라지 않고 만물을 입히고 기르고도 주인행세를 하지 않는다. 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므로 작게 불릴 수 있다. 이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곳이라 주인행세를 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크게 불릴 수 있다. 道는 끝내 스스로를 크게 여기지 않으니 능히 큰 것을 이룬다.
37장에서도 ‘이름 없는 박(樸)’의 상태로 갈 것을 우리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道는 항상 무위로 행하되 하지 못함이 없다. 왕이 만약 이것을 지킨다면 세상 만물은 장차 스스로 잘 길러 질 것이다. 만약 따르면서도 욕심을 부린다면 이름 없는 순박함을 주어서 욕심을 누를 것이다. 이름 없는 순박함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한 상태에 들게 되고 천하는 스스로 편안하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순박함’의 반대 방향은 명성(名聲)을 얻는 것이다. 노자는 3장에서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라’(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고 말한다. 노자가 현실적인 배와 뼈를 의식적인 마음과 뜻보다 중요하게 여김을 볼 수 있다. 12장에는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마라’(爲腹不爲目)고 한다. 여기서의 배는 자신의 의식주 생활을 의미하고, 눈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명성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는 자신의 소박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노자의 생활철학이다.
노자는 41장에서 도는 이름이 없다는 말을 하며, 이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높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행하고, 보통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낮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을 것이니, 낮은 선비가 비웃지 않는 도는 도라 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전진하는 도는 후퇴하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산처럼)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은 것 같고, 가장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좁은(덕이 부족한) 것 같고, 건실한 덕은 빈약한 것 같고, 꾸밈없이 진실한 것은 변질되고 흐려지는 것 같다.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져 완성품이 잘 보이지 않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도는 숨겨져 있어 이름이 없는데, 무릇 오직 도만이 잘 베풀고 또 잘 완성한다.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많은 저서에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대해 언급하고 있듯이, 노자도 많은 장(章)에서 무명(無名)을 강조하고 있다.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올바른 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44장에는 명예와 몸, 몸과 재물을 비교하면서, 몸의 중요성과 제명대로 사는 것의 가치가 언급되고 있다.
명예와 몸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몸과 재물과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을까? 얻는 것과 잃은 것 중 어는 쪽이 사람을 더 병들게 할까? 그런 까닭에 재물을 지나치게 아끼면 반드시 크게 소비 하게 되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을 면하게 되고, 그칠 줄 알면 위험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것은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노자가 67장에서 자신이 지니려고 노력하는 세 가지 보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자애(慈), 검소(儉), 겸손(不敢爲天下先)이다. 이 중에서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즉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고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다.
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육체는 사라짐을 피할 수 없으니 자신의 영혼에 해당하는 작품이나 이름이라도 남기고자 하는 행위로 이끄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욕구가 이끄는 대로 ‘이름’(名)이라는 추상적인 것에 과도하게 존재론적 지위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있어 시공을 넘어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일치한다. 노자는 무명(無名)을 강조했고, 화이트헤드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지적했다.
효경(孝經)의 개종명의(開宗明義) 章에 “신체발부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이것들을 훼손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며, 입신하여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려 이로써 부보님을 빛나게 함이 효의 완성이니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는 말이 있다. 자식이 사회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하여 이름을 날리면 부모님은 살아온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한 이름을 구체적인 뼈와 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오히려 이름이야말로 바로 인생의 실체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공자가 노자에게 “자네는 공명심(功名心)이 강하다”고 꾸중을 듣는 장면이 눈에 비치는 것은 기우(奇遇)인가?
노자와 화이트헤드는 둘 다 의식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이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노자는 의식에 의한 것을 인위적(人爲的)이라고 비판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自然的)인 상태를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에 의해 인식된 것(현시적 직접성에 의한 지각)에 오류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초적 지각(인과적 유효성에 의한 지각)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학자답게 이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점을 자신의 방대한 저서를 통해 정치(精緻)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에 비해 노자는 도덕경이라는 짧은 글 속에 함축적인 언어로 제시하면서 無名의 생활에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노자의 名 개념을 화이트헤드적 언어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특히 1장의 名可名 非常名을 순수가능태로서의 영원한 대상(常名)과 실재적 가능태로서의 영원한 대상(名可名)으로 구분하면 사변적으로 어렵게 여기거나 신비롭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道可道 非常道의 문장이 해독된다. 노자 도덕경 1장이 해독 가능하면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양의 고대사상과 사양의 현대철학의 대화가 가능해져 동서고금의 소통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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