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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 삼각산 흥천사(三角山 興天寺)를 찾아서 ①
-일주문(一柱門)에서 대방(大房)까지, 그리고 편액(扁額)-
지난 2월 12일 삼사순례 중 첫 번째 순례지인 경국사에 들어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영산전 등 전각을 찾아 참배하고 관음성전에서 베풀어진 지관대종사의 6재에 동참한 다음 공양을 한 연후에 12시 30분 물러나와 경국사 입구에서 세 대의 택시로 흥천사로 향했습 니다.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는 그 동안 존재를 잊고 살다가 정월 삼사순례를 계기로 새롭게 인식 된 사찰입니다. 이 절이 정릉의 원찰로 유명한데도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니 그 존재조차 희미해 있었습니다.
오후 1시경 흥천사에 도착했는데 웅장한 일주문이 먼저 맞이합니다. 실은 순례에 앞서 1 주일 전 답사차 집에서부터 걸어서 정릉과 흥천사를 탐방했던 터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이 절은 그간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50년간 태고종에서 관리해 왔는데 조계종 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 해인 불기 2555년(2011) 10월 21일로, 그간 사찰을 관리하던 태고 종의 법운스님과 낙산사 주지였던 정념스님이 인수인계 절차를 밟고 흥천사 주지로서 사 찰운영권을 되찾았습니다.
불교정화운동 당시 통합종단에 가담한 대처승인 ‘화동파’ 스님들이 자리를 잡고, 일반인 들까지 경내지를 점유해 민가를 형성하면서, 종단은 그 동안 실질적인 운영권을 행사하지 못했었고, 특히 전 주지가 종단의 승인 없이 무단으로 토지 매각을 시도하면서 존폐 위기 를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년 6월 21일,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종책특보단장 정념스님을 주지로 임명하 여 사태 수습에 나서서 전 주지가 모 건설사와 맺은 토지매매계약을 백지화하고, 사찰 토 지를 점유한 22가구의 주민들을 설득해 원만한 합의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정념스님 이 주지에 취임한 지 단 4개월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합니다.
근현대의 이러한 역사를 가진 흥천사가 이제 조계종 사찰로 강북권에서 포교의 거점 역할 을 다하리라 생각하면서 일주문을 들어섭니다.
삼각산흥천사(三角山興天寺) 일주문
일주문 편액. 유계 황하수(柳溪 黃河水 1910~1978) 선생 글씨
임자년(壬子년) 11월 15일이라 되어 있으니 임자년은 1972년입니다. 유계 황하수(柳溪 黃河水) 선생은 경남 통영시 태평동 310번지에서 만석군 황태문의 3대독자로 태어나 경성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유계서실(柳溪書室)을 개설 하였으며 개인전 24회, 성공회에서 서예 지도를 하였습니다. 전서와 예서 반초서를 잘 쓰고 1980년에는 유작전이 열렸습니다. 유 일한 비국전파(재야작가)로 알려진 분이라 합니다. 작품으로 병풍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 병풍 반야심경, 병풍 소동파의 적벽부. 병풍 굴원의 어부사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부도전(浮屠田)
일우당(一雨堂)이란 부도탑 1기와 부도탑을 중심으로 좌측에 일우당대선사부도비(一雨堂 大禪師浮屠鼻) 우측에 만일회창립주김운파대화상송공덕비(萬日會創立主金雲坡大和尙頌 功德碑)와 그 옆에 청신녀이법장화송공덕비(淸信女李法藏華頌功德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일우당(一雨堂) 부도탑
스님은 운파스님과 1959년, 칠성각, 1967년에 용화전, 그리고 1970년대에 연화대를 중수 하고 신축하는 등 흥천사를 일구는데 기여하신 스님이신데 상세한 정보가 없어 잘 알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도 옆의 비문을 보면 알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흥천사 전경
삼각산 흥천사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입니다. 흥천사에서 발행한 팜플렛에 있는 내용을 우 선 옮겨 봅니다.
『흥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조선 1395(태조 4) 신덕 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능지(陵地)를 정릉(貞陵)에 정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하였다.
1447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하였다. 1504년(연산 군 10) 12월에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 5)에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 고, 다만 대종(大鐘)만은 덕수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1569년(선조 2)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853년(철종 4)에는 법당을 중수하고 1855년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865년(고종 2)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 하 였다.
1891년에 42수(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 1895에는 대방(大房)을 중 수하였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 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ㆍ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흥천사 모습
흥천사가 신덕왕후의 원찰로 170여칸이나 되는 대찰로 세워졌는데 이에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하는데 연유합니다. 사랑하는 왕비가 죽자 그 애틋함이 더하여 도 성 안 궁궐 가까이 정릉(貞陵)을 쓰고자 하여 크게 정성을 다하여 왕비의 능을 조성했습니 다. 도성 안에 능을 쓴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정릉은 원래 지금의 정동(貞洞) 에 있었습니다.
정릉을 조영(造塋)한 태조는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동쪽에 태조 5년(1396) 당대의 유 명한 건축가 김사행(金師幸)으로 하여금 흥천사를 건립하는 책임자로 명하여 태조 6년 (1397) 정월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그해 8월에 170여칸의 대가람을 완성하고 성대한 낙 성식을 베풀었습니다.
창건과 함께 흥천사는 조계종의 본산이 되었고, 승당을 설치하여 항시로 선(禪)을 주관하 는 참선도량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후 태조는 절의 북쪽에 사리전(舍利殿)을 조성하 였는데 3층규모라고 합니다. 이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는데 사리전 건립에 태조 의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사리전 건립은 김진(金溱)이 맡아서 건립하 였는데 이 사리전 조성 중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 게 양위하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사리전을 완성토록 재촉하여 정종 원년(1398)년 낙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은 이렇게 정릉과 흥천사와 사리전 건립에 온갖 정성 을 기울였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게 지어졌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태조가 승하한 후 어떻게 되었는가! 태조가 승하한 후 정릉은 파헤쳐져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어 일개 묘로 강등되었고, 연산군 10년(1504) 흥천사 는 완전히 불이 탔고 중종 5년(1510)에는 사리전마저 유생들의 방화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 으니...
흥천사의 원래 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원래 흥천사는 정릉의 동쪽이라 하였는데, 서울시민회관별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서울시의회의사당(서울市議 會議事堂)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그 자리이며, 사리전은 코리아나호텔이 있는 자리라 하는 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H자 형태의 건물인 대방(大房) 만세루(萬歲樓)의 모습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입니다. 계단을 오르자 흥천사라는 편액이 두 개 걸 려 있는데 글씨에 대하여 문외한인 저로써도 글씨에 흐르는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합니다.
흥천사(興天寺)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예서체 글씨. 정릉을 북한산 아래로 옮긴 후, 그곳 능 가까이에 있는 신흥암(新興庵)이란 조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현종 10년(1669) 송시열(宋時烈) 등 대신의 청원으로 신덕왕후의 제삿날을 기리 면서 능을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흥암이 능과 너무 가까이 있다 하여 조금 떨어진 함취정(含翠亭)터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릉의 원 찰이던 흥천사는 신흥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후 정조 18년(1794) 성민(聖敏)ㆍ경신(敬信) 등의 스님이 새롭게 중창하면서 오늘날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후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전각을 세우고 중수하는 등 노력이 있 었는데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절을 중창하게 되었 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원래의 이름인 흥천사로 복원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흥천사 (興天寺)'라는 사액(寺額)을 내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글씨입니다. 또 하나의 흥천사 편액. 중국에서 온 어느 사신의 해서체 글씨입니다. 이 글씨는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이 썼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 인물은 잘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 건물안으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아미타불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고종 27년(1890)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원칙적으로 사찰에 가면 주법당부터 참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대방부터 찾게 되 었습니다. 주법당인 극락보전은 대방의 뒷편에 있습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긍조(亘照)스님에 의해 고종 27년(1890)에 조성. 제석탱화(帝釋幀畵) 긍조(亘照)스님에 의해 고종 27년(1890)에 조성. 제석탱화는 신중탱화와 나란히 북쪽 벽에 모셔져 있는데 신중탱화의 일종입니다. 중앙의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제석천은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 神)입니다.
대방 만세루의 옆모습
만세루와 종각
만세루(萬歲樓)
만세루(萬歲樓) 편액 송종헌(宋鍾憲 ? ~ 1949)의 글씨.
이 만세루의 글씨는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하였고, 일진회(一進會)를 이 끌며 고종(高宗)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인 송병 준(宋秉畯) 아들인 송종헌(宋鍾憲)의 글씨랍니다. 이 글을 쓴 해는 병인년(丙寅年)이라 하 니 일제강점기인 1926년입니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야전종헌(野田鍾憲)이며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합 니다. 1921년 송병준이 설립한 조선소작인상조회에 20명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 였으며, 1925년 송병준이 사망하자 그의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1945년 3월 일본 귀족 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 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송종헌의 손자 등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에 송병준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여러 곳의 토지와 관련하여 수차례 소송을 낸 바 있는데, 2007년 대한민 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종헌과 송병준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 정했습니다.
서선실(西禪室) 흥선대원군 글씨.
대방의 모습
대방(大房) 즉 만세루(萬歲樓)는 사찰행정을 돌보는 종무소와 수행처가 함께 있는 H자 형 건물로 앞면은 팔작지붕을 올리고 뒷면의 돌출부는 맞배지붕형태를 특이한 구조입니 다. 건물 앞면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사액(寺額)이 2점이 걸려 있고 정면 양쪽 돌출부 중 건물중심으로 좌측 돌출부 안쪽 측면에는 옥정루(玉井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우측 돌 출부 정면과 안쪽 측면에는 각기 만세루(萬歲樓)와 서선실(西禪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 습니다.
옥정루(玉井樓)
옥정루(玉井樓) 흥선대원군 글씨랍니다.
범종각모습
범종각 모습
종각(鐘閣) 독립운동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친필.
종각의 편액이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의 글씨라 하니 저 대방의 만세루 글씨를 쓴 송종헌 과 비교되어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을 위해 싸웠고 한 사람은 친일 행각을 벌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선생에 대한 백과사전을 옮겨 봅니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아버지는 중국어 역관으로 초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경석(慶錫)이다. 아버 지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으며, 김옥균ㆍ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했다. 1886년(고종 23)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ㆍ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 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897년(광무 1)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 면서 도쿄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 으로 일본에 망명, 이미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 고, 이후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3월 장지연(張志淵)ㆍ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ㆍ식산흥업 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 에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ㆍ언론활동에 주력했다.
대한자강회의 활동과 영향력이 커져 이에 불안을 느낀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ㆍ장지연ㆍ윤효정ㆍ권동진(權東 鎭)ㆍ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 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 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 동했다. 그러던 중 1918년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 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ㆍ권동진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 를 발의했다. 1919년 1월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 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ㆍ최린ㆍ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 여, 운동의 3대기본노선을 대중화ㆍ일원화ㆍ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ㆍ불교계 인 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ㆍ최린ㆍ권동진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서화에 전념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1918년 서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서 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서화는 물론 그 감식(鑑識)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 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서화가ㆍ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 자료를 모아 집성한 〈근역인수(槿域印藪)〉,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엮은 〈근역서 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 등은 모두 서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이다.
글씨는 특히 전서ㆍ예서에 능했는데,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ㆍ고전(古 錢)ㆍ갑골문 형태의 구성적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 8·15해방 후에는 〈서울신문〉 초대사장ㆍ명예회장, 민주의원,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 언론ㆍ사회단체의 원로로서 활동했 다. 6·25전쟁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천사에는 이렇게 대비되는 사람이 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 게 됩니다. 다음은 주법당 극락보전으로 향합니다.
☞ 다음은 제2부 극락보전과 명부전 여러 가지 당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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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_()_
지난 번 앞서 다녀오셨으니 환하시지요 감사합니다. _()_
조선의 역사 그리고 근대사를 다시금 알수 있게 하는 고찰 이기에. 원만한 불사 이루어 지도록 불자님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할곳 으로 생각 되내요. 처음 가본 흥천사 느낌이 좋았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시절인연이 이루어져천사를 함께 찾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으로 강북의 불자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안락한 의지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_()_
지나온천사의 발자취가 법우님의 지극한 불심으로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보고 새기며,,,. _((( )))_
사찰을 순례함에 있어 그 역사의 대강을 알면 사찰을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다소 길지만 하나라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아픈 역사를 읽고 보았습니다. _()_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비껴 가니 언제 함께하시려나 _()_
역시 백우님의 사진솜씨 해설법문은 명쾌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천사는 역사를 알아야 설명이 되는 사찰입니다. 또한 편액이 볼거리가 많습니다. 다음에 있을 극락보전의 영친왕의 5세 때 글씨, 명부전의 고 글씨도 눈여겨 보세요. _()_
오늘은천사에 대하여 많이 배웁니다. 대원군의 현판글씨, 오세창의 각글씨, 송헌의 루글씨를 잘 보았습니다. 도무지... _()_
그런데 어찌하여 독립운동했던 사람의 글씨와 반대로 친일파의 글씨가 다함께 있는 것일까요
감사합니다. 일주문에 붙어 있는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문 안에 들어 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일주문 밖이 세간(世間)이라면 그 안은 출세간(出世間)입니다. 출세간에는 시비분이 떨어진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미추호오(美醜好惡)도 없고 선악분(善惡分別)이 없는 세계입니다. 이런 눈으로 중생을 보는데 여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친일파를 하였던 이 문안에 들어온 자는 가엾게 여길 뿐이며 발보리심하기를 바랄 뿐 아니겠습니까 불교는 자비문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글이 존재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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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글씨에도 황제나 대원군(실세)의 기(氣)에 의해 쓴것과 일반인이 쓴것은 보는이로 하여금 글씨에 느낌이
다르다 하더군요,흥선대원군의 흥천사 예서 글씨는 무게의 느낌이 달랐습니다ㅎ_()_
대원군 글씨 앞에서 감탄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대원군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지요.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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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사진이 몇 장아났네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