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 / Epaksa.003 2003/11/10
싼티멘탈
이박사
"신바람 이박사 3집"이 나왔네요^^.
테크노와 뽕짝은 가미시킨 테크뽕이라는 새로은 장르로
온 국민을 유쾌하게 만들었던 이박사의 신보
3집은 테크뽕이외에도 70년대 펑키디스코와 자메이카레게,
그리고 라틴의 둠바등 세대의 구분없이 누구나 흥겹게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반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는듯.....
괜찮네요
E Paksa
이박사
본명 이 용석.
1954년 10월 5일 경기도 마석 태생.
음악인인 부친의 영향과, 모친에게 민요와 판소리를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뒤이어 곧 모친도 별세하자
서울로 올라와 20 여종의 직업을 전전했다.
유원지에 세워둔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괜찮은 직업이 되겠다고 생각,
불현듯 마음이 동해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뜻하지 않게 관광버스 가이드가 되었다.
손님들을 집합시키려고 입으로 "우리리히~!"
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내는 것을 비롯해서
전주, 반주, 간주등에 입으로 애드립을 넣어
여러 곡들을 메들리로 부르는 스타일로
관광버스 가이드 가운데서 독보적인 존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레퍼토리의 곡을 잘 안다고 해서
지금의 예명이 된 "이박사"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여러 레코드사에서 레코딩 제의가 있었으나,
1989년 가을 우연히 버스에 탄 레코드 기획자로부터
자신의 스타일대로 노래해도 좋다는 제안을 받고 의기투합,
그대로 스튜디오로 직행해 2 시간만에 레코딩을 마치고
카셋트를 내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트레이드 마크인 독특한 애드립과 경쾌한 디스코 메들리로
"신바람 이박사 1집"을 발표,
순식간에 운전수를 중심으로 중, 장년층의 폭발적 호응을 얻어
백만장 이상의 카셋트 판매고를 올려
장안의 화제의 가수로 떠올랐다.
1 집의 빅히트에 힘입어 같은 해 19개의 카셋트를 연이어 발표,
수 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현재까지 25개의 카셋트를 냈다.
다소 경박하다거나 저질스럽다는 부정적 이미지때문에
도외시되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뽕짝 디스코 메들리 가수
이박사가 일본에 진출하게 된 것은
해외 직배사로서 국내가수들의 해외진출을 모색해 오던
소니뮤직 코리아에서는 가장 공략하기 용이한 시장이
일본이라고 판단,
지금까지 어설픈 일본 진출 시도로 기존의 가수들이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한국에서 밖에 볼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가수를
찾고 있던 차에
1995년 가을 일본의 조그만 인디 레이블에서
월드 뮤직의 한 장르로서 한국의 디스코 메들리 카셋트를
CD화해서 수입판으로 소개한 것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조금씩 화제가 되면서
여러 음악전문 잡지에 기사가 실리자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봐 온 이박사를
본격적으로 일본에 소개하고자 생각하고
전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한국 대중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일본 소니뮤직의 자회사인 'Ki/oon SONY' 레코드 사장도
이박사의 음악을 듣고서
다른 디스코 메들리 가수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노래하는
이박사의 음악에 매료되어
일본에서의 음반 발매를 생각,
결국 한일 공동사업의 일환으로
이박사의 앨범을 일본에 발매하기에 이른다.
이박사가 한국의 뽕짝 디스코의 제 1인자로 널리 알려진 점과
일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점을 감안,
일본 젊은층들에게 사랑받는 최신 히트곡을
그의 독특한 뽕짝 스타일로 된 한국어 앨범을 제작,
앨범 발매 몇달 전부터 융단 폭격에 가까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펼쳐
이미 이박사는 일본내 각종공중파 방송및 유선 방송,
주요 인쇄매체에 커버나 톱기사로 여러 차례 실린바 있다.
이박사는 96년 3월 21일에 일본에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
4월 1일에는 앨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에 이어
특히 젊은층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역시 젊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있는
"덴키 그루브"가 믹싱한 "이박사 덴키 그루브 : 열려라 뽕짝"을
발매했다.
일본 톱가수들도 꿈의 무대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무도관에서 데뷰공연을 가진 이박사는
1만여명의 일본팬들이 한국말로 "사랑해요, 이박사!"라고
외쳐대는 열띈 호응 가운데 성공리에 첫공연을 마쳤다.
특히 이박사라는 가수가
현지에서도 깜짝 놀랄만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소니뮤직측에서 음반기획 당시부터
조용필이나 계은숙 같은 기존의 경우처럼
한국에서도 레벨이 있는 기성가수를
일본 중장년층팬들을 겨냥해
일본식 음악훈련과 일본식 편곡과 작곡으로
일본말로 앨범을 낸것이 아니라,
한국의 뽕짝 디스코 메들리 스타일 그대로
한국말로 한국의 전통 민요와 일본의 최신 히트곡을
적절히 안배해 일본 젊은이들에게 맞는 취향으로 음반을 기획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발전한
일종의 월드 테크노 뮤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켜
소개한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덕분에 일본 현지에서는 때아닌 한국 가요붐이 일어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말 연구회나 한국가요 연구회등이
결성되기도 하고,
일본 최고 연예인들도 방송에 나와 어설프기는 하지만
한국어로 한국노래를 부른 것이 대히트를 기록할 정도였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박사를 모르면
최신유행에 민감한 친구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최첨단의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라이브에서 카리스마적 매력과
끼를 십분 발휘하는 이박사는
2000년이 시작되어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갑자기 이박사 붐이 일어나기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인터넷 정보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된
그들 사이에서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일명 테크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접하게 된 것이다.
폭발적인 인터텟붐이 가져다준 새로운 홍보가 아닐수 없다.
모 교실에 것을
옮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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