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칭찬과 '잘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먼저 해주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넌 왜 그 모양이니?' 소릴 칭찬보다 많이 듣고 자란 우리 세대 어릴 적과는 사뭇 다르다. TV에서도, 서점에 즐비한 서적 속에서도 칭찬에 관한 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그야말로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인색할 이유는 따지고 보면 없다. 칭찬이 꾸중보다 아이들에게 더 자신감을 갖게 하고,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밝으며 더 진취적이라는 데도 별반 반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칭찬보다는 꾸중을, 그리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더 듣고 자란 우리 세대가 진취적이 아니었다거나 주눅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며칠 전 낮시간에 전철을 탔다. 맞은 편에 앉은 아이가 얼마나 앙칼진 소리를 질러대는지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한 이십여분 지속되는데, 못 견딜 지경이었다. 아이 엄마는 호통은커녕 아이를 달래고만 있었다. 참다 못한 한 아저씨가 시끄럽다며 '애를 어떻게 그렇게 키우느냐'고 심한 말을 해댔다. 아이 엄마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사실 나도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혹시 아이에게 어떤 심리적인 장애가 있지는 않나 싶어 참았던 터다. 실제로 아이에게 그런 장애가 있는지 혹은 버릇이 잘못 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쨌든 전철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칭찬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칭찬 못지 않게 매질도 중요함은 당연한 일이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속담도 있거니와, 어쩌면 핵가족화한 요즘에는 칭찬보다 꾸중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아쉬운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 아이만 중요하다고 가난한 아이를 친구 삼지 못하게 하는 부모, 공부 못한다고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 임대주택에 산다고 편을 가르는 아버지.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같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우열반을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말이 길었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비판을 받는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때론 근거없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 때론 거기에 대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판은 참 무서운 것이지만, 그러나 비판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제 길을 잡아 갈 수 있을까.
좀스럽거나 논리가 부족할수록 비판을 두려워한다. 맞받아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불편한 말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의 저변에는 두려움이나 피해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듣지 못한다. 아니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가로막고 혹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도 한다. 설혹 제 주장이 틀렸더라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웃기는 건 MB정부다. 이 정부는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아마도 고래가 되어 춤추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언론의 바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언론은 '씹어야 사는' 사회의 公器다. 언론이 감춰진 걸 들춰내지 못하고 칭찬을 해대기 시작하면 나팔수 소리를 듣는다.
얼마 전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기자들에게 '잘 써달라'고 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잘 써달라.... 부정적으로 말고 긍정적으로 써달라는 뜻이다. 그것 참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만 쓰면 되는 것인데 잘 쓰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언론에 대고 네편과 내편을 가른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언론이 두려우면 正道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언론의 발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근거를 대고 반박하면 되는 것이다. 언론에 네편과 내편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의적이다(물론 알아서 기거나 혹은 아예 한쪽에 짝 달라 붙어서 나팔수 노릇을 자처하는 언론사가 있다. 이런 부류들이 내편과 네편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KBS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이야기인가. 그건 국정홍보처장을 뽑는데 필요한 자격요건이지 공영방송 사장을 선택하는 요건은 아니다. 국민이 시청료 내고 보는 방송을 정권의 홍보처로 삼겠다는 저급한 발상은 비판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참여정부에도 비판적이었다는 정연주 사장을 해임하려 하고, 신태섭 이사를 전광석화처럼 해임한 것은 누가 봐도 웃기는 일이다. 도대체 알랑방귀 뀌는 언론으로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모든 걸 감추고 가리면서 무슨 짓을 하려고.....비판 기능을 상실한 언론을 꿰차고 할 수 있는 일은 부도덕하거나 설익은 정책들 뿐일 터.
칭찬을 받고 싶다면 칭찬 받을 짓을 해야지, 칭찬하는 사람을 가려서 쓰겠다면 그건 망조로 들어가는 일이다. 사회생활하며 그런 조직이 오래 가는 걸 보지 못했다. 17.8%의 추락한 지지율은 언론 때문이 아니다. 익지도 않고 국민적 합의도 없는 정책들을 들고 나오거나 혹은 쇠고기 협상처럼 민의는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때문이 아닌가.
비판이 두려우면 비판 받지 않을 짓을 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깃발을 내릴 일이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건가. 국정철학이 언론에 재갈 물리기이고, 기조가 침묵의 강요라면 이미 싹수가 없는 것이다. MB식 소통에 쌍방통행은 없는 것인가. 아무리 입을 막아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어찌 그리 하는 짓마다 그모양이냐.
언제나 집권초기 새 정부는 의욕과 개혁의지에 넘쳐 무언가 앞선 정부보다 나은 차이와 업적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정책 결정은 전문가주의와 기술관료주의의 범위 안에서 순환되는 내부투입(within-put)에 중심이 두어졌다. 핵심은 국가영역 밖의 사회로부터의 투입(input)이다. 정책 결정이 아래로부터의 투입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란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의 고위결정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정책을 만드는 산출(output) 과정을 의미하기보다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의 광범위한 요구들이 정책과정으로 투입되는 과정을 더 중심에 두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와 정책의 결합이 그것이다. 이 양자를 결합하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적 상상력이 뒷받침된 대통령 리더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