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늬도, 이효리도 한단다. 내 친구 수애도 한다네? 유행처럼 번지는 채식 열풍 속에 에디터도 25일 동안 슬며시 발을 담가봤다. 슬며시 담근 발, 이젠 뺄 수 없을 것 같다.
VEGAN
비건에 도전하는 에디터 양열매의 기본 사항
- 좋아하는 음식 : 초콜릿, 떡, 우유, 빵, 플레인 요구르트, 장어 소금구이, 갈비, 멸치, 고구마, 치즈 등
- 싫어하는 음식 : 채소(고기 먹을 때 쌈도 싸 먹지 않음), 김치, 회, 시금치 등
- 평소 식습관 스타일 : 현재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아침 반찬으로 갈비를 먹을 만큼 육식을 좋아한다.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밥상을 떠나지 않고 저녁 약속이 많아 늘 과식한다. 가방 속에 파우치는 없어도 소화제는 항상 들어 있고, 매실 달인 물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소화불량으로 고생 중이다. 식탐이 있다 보니 맛있는 것이 눈앞에 있으면 참지 못하고 먹어 매일같이 후회하곤 한다. 마른 체형이나 체지방률이 높아 마른 비만이다.
1일_ 냉장고 비우기
비건이 되기로 한 이상 ‘반(反) 채식 체제’인 냉장고는 가차 없이 정리되어야만 했다. 매일 아침 먹던 갈비부터 우유, 치즈, 자취생 ‘잇(eat)’ 아이템 멸치까지. 휑해진 냉장고에 현미와 고구마를 다부지게 채워 넣었지만 마음의 허전함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지금 나에게 채식이란 아침마다 그 좋아하는 갈비와 장어 소금구이를 먹을 수 없다는 것으로밖에 와 닿지 않는다.
2일_ 진상 양열매
직장에서 맞는 점심시간. 식당에서 메뉴 고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된장찌개 한 가지. 그런데 된장찌개 역시 멸치로 육수를 내지 않던가. 진상 손님을 자처하며 육수에 대해 물었고 맹물로 끓여달라는 초절정 진상 멘트를 날렸다. 국물 문화인 대한민국에서 비건으로 산다는 건, 먹을 게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다. 채식은 죄고 난 만인을 피곤케 하는 죄인이었다.
3일_ 채식주의자들과의 첫 만남
외로운 비건의 삶에 한 줄기 빛을 얻고자 인터넷을 뒤져봤다. 채식주의자들은 어디 있나 했더니, 채식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한울벗채 식나라, 한국채식연합 등에 모여 있었군. 채식주의자들끼리 공감대를 나누며 동지애까지 느끼는 곳이다. 하소연할 곳 없는 채식의 힘겨움을 나누고 싶어 그들의 정모에 참석했다. 고작 비건 3일째인 내 앞에 5~20년 차의 채식 선배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가움과 그들의 고충, 채식주의자로 쌓아온 내공을 전수한다. 정보는 물론 격려와 조언이 함께하니 감동의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4일_ 굳이 왜 비건이냐고 물으신다면
굳이 왜 비건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동물과 환경을 위해서요”라는 대답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왕 하는 거 가장 높은 단계 정도는 해줘야 “나 채식했어요”라는 ‘가오’가 살 것 같다는 심리가 작용했음을 부인하지도 않겠다. 일단 채식의 마음가짐부터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채식의 기본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진정 나를 위해, 더 나아가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해보자며 각종 동영상과 책을 찾아봤다. 진정한 채식의 의미를 나에게 설득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5일_ 커피, 안 마시고 만다
평소 달달한 걸 좋아하다 보니 커피 역시 마키아토나 라테만 마셨는데 이제 우유도 금기시되어 버렸다. 이제 이런 음료를 마시려면 커피에 들어가는 우유를 두유로 대체해야 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디야, 던킨도너츠, 파스쿠찌, 커피빈 등에서는 대체 불가! 매뉴얼 자체가 없단다. 오로지 스타벅스만 두유 대체가 가능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커피, 안 마시고 만다. 에잇.
6일_ 어느새 생긴 습관 하나
음식을 구입할 때 성분 표시를 뚫어져라 읽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행여 달걀, 우유 성분이 들어 있을까 봐서다.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제품을 손에 들면 자연스레 뒷면부터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이 행위 하나하나가 건강한 먹을거리를 의식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
7일_ 전 정말로 괜찮다니깐요
막상 하고 있는 나는 별로 힘들지 않다. 힘든 거라면 주위의 시선과 비아냥, 점심에 ‘눈치만빵’ 본다는 것 정도(많긴 하네). 일단 우리 엄마부터 “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쏘아붙이고, 직장 선배들 역시 “너 그러다 쓰러진다”며 걱정의 말들을 쏟아낸다. 채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보는 듯하다. 아직 내 몸이 다이내믹하게 좋아진 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기력이 빠지는 것도 없다. 일주일째, 생각보다 할 만하다. 비건, 별거 아닌데?!
8일_ 콩 소시지 맛나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채식 전문 쇼핑몰이 운영 중이다. 더욱더 놀라운 건 콩이나 밀로 못 만드는 게 없다는 것. 콩으로 만든 ‘베지 후라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몇 개를 ‘겟’ 해본 결과 콩으로 만든 소시지, 돈가스, 장조림을 제외하고는 사실 먹다가 다 버렸다. 맛이 없기도 했지만, ‘내가 굳이 이 맛도 없는 걸 먹어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이런 대용품이 필요할 정도면 그냥 고기를 먹고 말지….
9일_ 마감과 채식
스트레스를 받으면 늘 입에 무언가 넣고 씹는 행위로 풀어왔던 지난 나날들. 그러나 비건으로 지내면서 먹을 수 있는 게 극히 제한되다 보니 가장 힘든 게 스트레스가 한껏 고조된 마감 날을 보내는 거다. 초콜릿과 과자를 한 움큼씩 쥐어 먹던 걸 못하게 되니 아주 ‘미추어’ 버리겠다. 미리 사두었던 비건 포를 과자, 초콜릿 대신 질겅질겅 씹으며 심신을 안정시켰으나 초콜릿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10일~11일_ 회식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법
회식은 철저하게 채식주의자를 소외시키는 자리다. 회식 메뉴라는 것이 삼겹살, 회, 치킨 등이니까. 태어나서 이렇게 굶주려본 회식은 처음이다. 사실 여기서 내가 마음껏 못 먹는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난 비건이지만 여러분의 술맛을 떨어뜨리지 않을게요’라는 자세를 공표해 폐 끼치지 않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만큼 젓가락을 놀렸으며(먹을 게 없어서 애꿎은 단무지만 계속 먹었다) 함께 마시는 술잔은 절대 내뺄 수가 없었다. 난 회식 내 진상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회사에선 내가 비건이라는 사실보다 조직의 충성스런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12일_ 시식 코너, 그 치명적인 유혹
비건 생활 중 복병을 만났다. 바로 마트 시식 코너! 예전에 빠짐없이 돌던 시식 코너인데 지나치려고 하니 영 어색하다. 그보다 더욱 애간장이 타는 건 시식 코너에서 풍겨 나오는 각종 냄새들. 삼겹살, LA갈비, 떡갈비… 이렇게 고기 냄새가 진동했나 싶을 정도로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자극적인 냄새들이 코끝을 찌른다. 훨씬 더 예민해진 감각에 내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
13일_ 월남쌈이 짱이야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최적의 메뉴를 발견했다. 바로 월남쌈! 쌈 재료 중 고기만 넣지 않는다면 이보다 완벽할 순 없다. 새싹채소, 양배추, 파프리카, 파인애플, 당근 등이 어우러진 메뉴는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정말 확실히 다르다. 같은 배부름이라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늘 더부룩해서 소화제로 연명했다면 채식은 기분 좋은 배부름이다. 아무리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진다. 이거 참 신기하네잉.
14일_ 절규의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에 환장하는 내가 잘 버티나 했는데 밸런타인데이가 도래하고 말았다. 미치도록 먹고 싶었지만 먹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끝내 먹지 않았다. 나 자신을 뛰어넘었다고 혼자 격려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초콜릿이 나에게 주었던 그 달콤함, 환희… 초콜릿은 채식하는 동안 날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일을 마친 후 ‘아름다운가게’에서 나온 초콜릿을 사 먹었다. 공정무역제품으로 달걀, 우유 등 어떤 첨가물도 없어 채식주의자도 먹을 수 있는 초콜릿. 그러나 당연히 달지 않아 뭔가 심심하다. 홀로 아그작 씹어 먹으며 ‘이렇게 사는 게 과연 행복한 걸까?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며 되뇐다.
15일_ 채식을 해도 탈이 날 수 있다는 거
채식을 할 때 부족할 수 있는 영양소가 지방이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견과류. 견과류의 지방은 동물성 지방과 달리 불포화지방산이라 인체에 유용하다. 비건이 된 이후 과자를 안 먹는 대신 견과류를 먹기 시작했다. 호두, 아몬드, 잣, 땅콩, 해바라기씨 5가지 견과류를 섞어 하루 두어 번 한 움큼씩 섭취하는 게 적정량인데 땅콩 한 봉지를 다 먹었다. 나처럼 들이붓듯이 먹지만 않으면 탈 날 걱정은 없으니 꼭 먹도록 하자.
16일~18일_ 채식 임상 실험 결과
아침마다 화장실에 잘 간다
먹는 양이 줄어들어 변비 걱정을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예전엔 매일 유산균 음료를 먹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 거짓말 같지만 진짜 변비에 채식만 한 게 없더라.
여드름이 안 난다
피부 트러블을 숙명같이 여기며 살아왔건만 채식하는 동안 놀랍도록 단 하나의 여드름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살이 빠진다 먹는 게 많이 제한적이긴 하다. 그래도 그렇지 16일 만에 2kg이 빠졌다. 과자와 초콜릿, 빵, 고기를 먹지 않은 게 이렇게 큰 은혜로 다가올 줄이야.
소화가 잘된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늘 소화가 안 돼 매실 달인 물과 소화제를 달고 살았던 내가 채식하는 내내 소화제는커녕 매실 달인 물도 먹은 적이 없었다(땅콩 많이 먹었을 때 빼놓고). 늘 배고픈 채식, 여기서 빛을 발한다.
19일_ 채식 도시락 싸는 날
채식하면서 사람들 앞에서(특히나 먹을 때) 난 왜 작아지는 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차, 채식은 죄였지…. 어쨌든 직장 선배들의 눈치 아닌 눈치에 도시락을 들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점심에 무엇을 먹을 수 있나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도시락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단체로 식당을 가니깐 나의 진상 짓(식당에서 채식도시락을 꺼내는 것) 정도는 용인될 수 있다. 온갖 총천연색 과일과 채소, 영양소 균형을 맞춘 두부와 견과류까지. 후훗, 팔아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20일~21일_ 채식 패스트푸드점 마오즈
종로에 있는 채식 패스트푸드점 마오즈는 모든 메뉴가 고기를 대체한 콩고기며 빵 역시 호밀&통밀이다. 고기의 맛과 빵을 정한 후 채소는 자기 양대로 채워 먹을 수 있다. 함께 간 친구들 역시 ‘풀때기’만 먹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며 만족해 한다. 오랜만에 고기 식감을 느끼니 룰루랄라 흥에 겹다. 오늘도 채식 예찬을 펼치는 나에게 친구는 정말 피부가 좋아졌다는 말을(빈말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만) 전한다.
22일_ D-3
채식이 끝날 날이 며칠 안 남았다. 다들 내 채식생활에 질렸는지 끝날 날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니 모두 하나같이 채식 끝나면 뭐가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묻는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먹었던 장어구이 혹은 돈가스 등의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다. 솔직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개미 눈곱 정도 될까 싶다. ‘뻥’이 아니라 ‘레알’이다. 그 이유를 추론해 보건대 이게 끝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25일 프로젝트였으니 이제 3일 남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채식을 하고 싶다. 이제 겨우 채식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 나 대신 끝을 준비하고 있는 이 ‘퐝당 시추에이션’은 뭐지.
23일_ 채식의 장점은 비싸고 맛없다는 거
밸런타인데이를 거뜬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초콜릿이 미친 듯이 당긴다. ‘아름다운가게’ 초콜릿은 사기도 힘든데(훼미리마트에 있긴 한데 없는 데도 많다) 오늘따라 가는 곳마다 없다. 사기도 어렵고 가격도 착하지 않다. “이 무슨 개고생이야”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친구가 말한다. “야, 널 보니깐 채식의 장점을 딱 알겠어. 비싸고 맛없다는 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빙고!
24일_ 고기 따위 두렵지 않아
익숙해진다. 남들은 고기를 굽고 생선초밥을 입에 넣을 때, 난 그 냄새(만) 한 모금 쭉 들이킨 다음 내가 직접 싸온 채식 도시락을 꺼낸다. 아그작 씹어 먹으며 쿨한 모습으로, 대수롭지 않은 양 마주 앉아 맛나게 먹는다. 오늘 야근 메뉴는 치킨! 선배들은 모두 내 앞에서 맛나게 치킨 다리를 뜯고 있고 난 양상추를 뜯고 있다. 훗, 이제 고기 따윈 두렵지 않다고.
25일_ D-Day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아침에 과일과 현미밥을 먹고 점심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채식 커밍아웃’을 알리며 양해를 구했다. 그렇다. 지금 위의 상황들은 어느새 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자연스레 내 몸이 비건의 삶을 따라가고 있었다. 달걀과 고기를 뺀 비빔밥으로 내 채식의 마지막은 별일 없이 이렇게 끝이 났다.
채식 체험 25일을 마치고
내가 정해 놓은(아니 편집장님이 정한) 채식 기간은 끝이 났지만 식당에서 여전히 돈가스를 외치지 못하고 오늘도 청국장을 시켰다. 모든 걸 다 먹을 수 있는 해방을 얻었음에도 내키지 않는다. 지극히 나를 위해(그리고 M25의 지면을 위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했던 채식. 덕분에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지녔는데 채식이라는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동물 문제부터 환경 문제까지 더 넓은 시야로 풍요롭게 사는 법에 대해 고찰을 하게 된 것. 채식 체험이 끝난지 두 달째.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비건의 삶은 일단 잠정 휴무 상태. 나 자신과의 타협이긴 하지만 우유까지는 먹는 락토(Lacto) 채식으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 to be continued M25 에디터의 25일 채식 다이어리에 이어 다음 주에는 교양 있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위한 ‘채식 입문서’가 준비됩니다. 개봉박두~!
에디터 양열매 포토그래퍼 김도균 정익환 참고 도서 <채식 영양학> <채식이 답이다> <육식의 종말> <채식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