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도둑
삼하15:1-6
(삼하 15:1, 개역)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삼하 15:2, 개역)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삼하 15:3, 개역)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삼하 15:4, 개역)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삼하 15:5, 개역)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삼하 15:6, 개역)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마치 일리 있는듯하나 판단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취지를 역이용해, 자기와 대면하는 것으로 자신의 명성을 쌓는 방식을 이용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엄연히 이스라엘에는
다윗왕만이 유일한 왕입니다.
그런데 왕과 같은 세력을 쥐고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왕과 가까운 사람이고
남도 아닌 왕의 아들입니다.
바로 압살롬입니다.
잘생기고,
교육잘받고,
인품좋고,
사회성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교육이나 인품의 문제가 아니며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왕의 권위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마치 자신이 더 훌륭한 왕인 양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가담되어 있었다는 말이고
부화뇌동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압살롬의 권력의 일등공신들이
예전 다윗을 따르던 신하, 장군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말은 곧, 다윗 권력에 누수가 생겼다는 뜻이고,
장기화될수록 압살롬에게로
권력이동이 가시화 될 시급한 상황입니다.
반역이 발생한 것입니다.
권력의 판도가 바뀌었기에
백성들은 구지 다윗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압살롬에게 수월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이 된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고민은
권력누수가 세상 권세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다윗자신의 불신앙 때문인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왕의 존재의 의미를
세상권세가로서의 왕에 있었을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자라는 사실을
감도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왕이니까 세상권세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는
전혀 무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다윗왕이 하는 일을
비슷하게만 하면
얼마든지
왕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백성들도 역시
그 차이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신하로 있다가
압살롬에게로 변절한 장수들 대다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왕은 사람들이 옹립해서 세운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체적으로 법적으로 인정 받으려합니다.
즉 법대로 하면
자신이 옳은 사람이 되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울 때는
힘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세워진 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법을 들고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을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십니다.
법과 언약의 차이점은,
언약에는 십자가, 즉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있지만
법에는 규칙에 대한 준수 여부만
있을 뿐입니다.
희생이 없는 겁니다.
희생을 발견하지 못하면,
사람은 법적인 보상만을 고대하며,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에서
익히 알게된 사실입니다.
즉 착하면 착한대로 보상이 있어야 하고,
악하면 악한대로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기 내부에
법적 의식에 따른 보상 기대를
그대로 유지한채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착하고 의로움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기준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기준에서 나온,
선과 의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난 처지에
착하다고 해서 착한 보상을
하나님은 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자신이 죄인것을 직시하고
죄인으로 사는 것에 있지,
하나님도 인정하시지 않는
인간적 선과 의로는
불가능하다는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여전히 심판가운데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받은자들이
아무리 신앙좋다고
스스로 믿음을 말하고
의를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죄인된 사람들을
바르다는 이유때문에
죄가 용서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보다 정확히는,
죄를 용서하실분에 의해
죄인임을 자인할때
그분에 의해 죄용서의 은혜가 함께하실
뿐입니다.
그분이 바로 죄의 구속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댓가를 다 치루신
예수님이십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파국으로 치닫을때
가게문 닫고 교회에 나온다고해서
그 다음날 손님이 더 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 왔다가 안 나오는 이유는,
믿음 운운하지만,
법적인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는
거짓 성도들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비성경적 모방범죄, 공적 범죄가
바로 다윗이 품고있는 하나님의 언약은 무시하고 세상의 권력으로 몰리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만큼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아무런 행운이나 기적이 따르지 않기에
교회를 쉽게 옮기거나,
하나님주신 직분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재미도 시들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런 인간들의 법적인 감각을
정죄해 버리십니다.
그리고 보상보다
하나님의 희생하심에
눈길을 돌리게 하십니다.
압살롬은 일반 백성들이
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단지 외적으로 힘이 있는것 같고,
자신의 열정에 합당한
보상이 따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찬양에 쉽게 빠지고,
사업에 빠지고
말씀에는 무관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 앞에 나서서
백성들의 마음을
가로채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찬양으로 혼동케하는 것과,
신유은사로 혼미케 하는것과
말씀이 상실된 선교로 마음을 빼앗는 것과
말씀을 멀리하는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희생에 눈길돌리지 못하게 하고
각자 신자로서의 법적인 보상을 챙기는 식으로
노선을 틀어서
자기 개인에게로 쏠리게 만듭니다.
이는 교회를 실제로 세우시는 분이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들입니다.
교회는 힘의 단체가 아닙니다.
목사의 목회력으로 교회가 달라지지 않으며
찬양으로 세련되는 것도 아니며.
번지없는 선교로 새롭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힘이 세질수록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해야 할 것입니다.
실권자로서의 목사나 장로가 중심이 되면
필히 무너지는 그런 조직일뿐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그곳은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이미 무너진 곳입니다.
그 한계에 돌입하면,
학벌따지고,
기여도 따지고
돈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돈으로 문제가 쌓이고
여성, 남성으로 문제가 폭발하며
세상정치로 분탕질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면
오로지 ‘새언약’으로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작용하십니다.
결코 인간이 만든 법을 통해서
사람들과 교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교회는
오로지 새언약으로 세워지고
새언약으로 유지되는 교회 뿐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의로움에 입각해서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거나
보상을 챙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희생 앞에
자신의 법적 태도인 죄인됨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오늘날 큰 교회 목사들처럼
힘을 원했고, 돈을 원했고, 여자를 원했고
조직을 원했습니다.
왕의 자리가 희생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의 자리, 돈되는 자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힘이 모아지고 쏠리게 되면
그 때부터 그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벗어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될수 밖에 없습니다.
삼손의 경우,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주신 힘을 가지고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3명의 여인을 위해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세 번째 여인으로부터도
버림받고 맙니다.
이 버림받음이
곧 삼손으로 하여금
언약적 행위를 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하여 힘을 사용하므로서 다윗왕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언약적인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틀어막은 꼴이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 때문에
잠적해버리는 목사,장로도 있고,
세속의 법에 호소하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해서 자기를 내세울 돈이없다는 이유로
모든직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천국이
인간의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고,
이미 주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지옥의 문을 확장하는 데에 쓰임받는
사단의 회라느 것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희생 앞에 놓인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천국을 만들려하며
희생없는 천국을 꿈꿉니다.
우리는 그 희생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장애물을
애써 지우려하는 법적인 칸막이가
철거되고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따라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십자가 복음을 외면해버리면
그 사람은 본인의 자존심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셈이 되어
천국은 못들어가는 자가 됩니다.
이는 곧 압살롬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여전히 유지하겠다는
속셈밖에 안됩니다.
사무엘하 14:25-26에 보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좋아할 만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새언약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이사야 53:2-3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발 교회에 예수님 없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오시라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오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때에만 알수가 있습니다.
교회란 사람중심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 중심,
새언약 중심,
하나님의 희생 중심이 될 때만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란 자존심들이 모여 뭉쳐있는
절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