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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13)
헌상이란 무엇인가?① : 올바른 헌상
한국교회 예배 순서 가운데 헌상(獻上)하는 일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 헌상의 보편화와 함께 헌상에 대한 오해도 우리 주변에 난무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신학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의 목회가 진정 성경에 근거한 바른 목회가 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헌상을 다시 생각하여 바르고 성경적인 헌상이 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먼저 용어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 헌상하여 드리는 순서를 흔히 ‘헌금(獻金)’이라고 불러왔다. 좋은 용어이지만 이를 오해하면 돈이나 재물만을 드리는 순서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예배 때 드리는 폭넓고 바른 의미의 헌상이 가진 풍성한 뜻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또한 ‘연보(捐補)’라는 용어도 사용되는데, 이것도 ‘의연금(義捐金)’같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연금(捐金)’이라는 뜻을 전달하므로 헌상되어진 것의 사용에 대한 한 성격에 대해서는 좋은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우리의 헌상의 폭넓은 의미를 다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런 뜻에서 진정 성경적 헌상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헌상’(獻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41) ‘헌상(獻上)’이라는 말은 ‘위로 헌신하여 드림’, ‘바치어 올려 드림’이라는 뜻을 지닌 용어로 결국 헌상의 대상이 우리 자신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좋은 용어라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용어는 우리 말 성경에 ‘연보’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가 ‘코이노니아’이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교제’라는 말인데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이 용어를 써서 사용하고 있다(고후 8:4; 9:13; 롬 15:26). 헌상은 성도들 사이의 구체적인 교제의 표현의 하나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은 우리의 교제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또한 넓은 의미의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는 것이 성경적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다른 용어인 성도들에 대한 ‘섬김’이기도 하다(행 11:29, 30; 고후 8:4; 9:1, 12, 13).42) 그러나 용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헌금’이라고 하든지, ‘연보’라고 하든지 그러한 전통적인 용어 사용에 친숙한 분들은 그렇게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를 ‘교제’와 ‘섬김’의 의미를 지닌 헌상으로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헌상이란 무엇인가?
헌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개념 정의와 함께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헌상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 헌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헌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헌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1) 헌상은 죄를 씻어 주신 것을 보상하기 위한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헌상에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구속받은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헌상이 죄 씻음에 대한 대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헌상하는 것으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상을 함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갚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2) 헌상은 영적인 복을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돈을 드려서 영적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단호히 돈과 함께 망하리라고 선언한다.43) 그러므로 헌상도 영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헌상은 더구나 이 세상적 의미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돈을 많이 내는 이에게 이 세상적인 복을 더 주시고, 적게 내는 이에게 복을 덜 주고 하는 이 세상적인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헌상은 무엇을 얻기 위해 드리는 수단과 도구가 아닌 것이다.
3) 헌상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시편 50:9-1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9-13).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과 염소와 소로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사실 제물은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구약의 십일조도 하나님 자신이 필요해서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도록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시 50:12). 하나님께서 주리실 리가 없다. 또한 주리신다고 하더라도 짐승과 가축과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들을 잡아드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 헌상은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헌상은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5) 헌상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와 연관해서 말라기 말씀을 잘 인용한다. 말라기 3: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다. 이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행하여 자신들의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을 다 행해야 할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6) 헌상은 나의 것 중 일부만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 사상에 의하면 헌상된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어 수확할 때 첫 열매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서 하나님께 드린다. 그것은 밭에 있는 나머지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을 그 전체의 대표로 주께 드린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첫 열매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헌상할 때도 헌상한 것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7) 헌상은 자신의 부족한 삶을 보충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 위해 드리는 수단이 아니다. 다른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때 곧 전도나 교회를 위한 헌신이나 이런 것이 부족할 때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헌상이 아니다.
8) 헌상은 교회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영향을 더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명예나 체면을 위해서, 교회에 자기 과시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헌상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헌상을 멸시할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현실 속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의미로 헌상이 많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 헌상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헌상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올바른 진정한 헌상(참된 헌상)
헌상이 위에서 설명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연 진정한 헌상은 무엇인가?
첫째, 헌상은 구속받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상징적 행위다. 헌상에서 드려지는 것은 재화나 다른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나 자신’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킴을 받은 나 자신을 구속하여 주신 주님께 다시 드리는 일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성도만이 헌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헌상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헌상할 수 없고 혹시 헌상 예식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헌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가치 하지만 주께서 불쌍히 여겨 구속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제는 온전히 주께 속한 삶으로서 온전히 주께서 주관하시는 가운데 자신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드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헌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헌상이다. 그렇게 할 때 그 헌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속사적인 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공동체와 구속사의 진행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구속사에 속한 일원으로 인정하면서 드리는 것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의미가 헌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헌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한 헌신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인 진행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온전히 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헌신이 없는 헌상은 헌상이 아니다. 온전하지 않은 헌신도 헌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에서는 흠 있는 것을 주께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흠 있는 것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흠이 있는 존재인데, 우리는 어떻게 주께 헌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항상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 제사에 의존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헌상만이 참된 헌상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히 주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 의존하는 우리의 헌상은 영적인 일(신령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의 공로 없이는 헌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구속에 근거해서만 헌상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드린 헌상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항상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없이는 헌상이 없다. 그러므로 헌상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 하나님께 둘러 싸여진 우리를 기꺼이 받으시는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헌상에서 드려지는 나 자신은 매일 매일의 삶과 그것이 합하여 이루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의 진전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헌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헌상은 헌상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있는 헌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왜 드려야 하는 지도 모르고, 또는 헌상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무조건 많이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하나님께 의존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헌상한 자 답게 사는 일이다. 따라서 예배 때 헌상 드리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받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노력과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주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분리된 헌상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며, 그런 헌상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상에 있어서는 돈을 얼마나 많이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나 자신을 주께 드렸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 가려고 하시는 바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결적인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들답게 하나님의 뜻의 수행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수행하며, 재화를 드려 그런 일이 잘 수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헌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헌상은 삶과 관련된 헌상이어야 한다.
둘째, 헌상은 교회의 지체인 우리를 함께 주께 올려 드리는 상징적 행위다. 헌상은 결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다. 헌상은 교회 공동체적 행위다. 헌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그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주께 드려 주께서 시키시는 일을 다 수행하겠다고 드리는 행위다. 교회가 주께서 불러 시키시는 일을 잘 감당하도록 주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은 주의 뜻에 온 교회를 온전히 바쳐 드리는 행위다. 헌상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 자체를 위한 것도, 우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드러내는 교회의 각성과 의식의 표현이다. 따라서 개개인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그 교회의 일부로 주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상은 교회적인 일이다. 개인적으로 헌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상은 항상 교회의 예배 중에 그 온전한 교회적 의미를 담아서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우들이 다 참여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 교회적 행위에서 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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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헌상’이라는 용어는 김홍전 박사님이 사용한 용어이다. 특히 김홍전, 『헌상에 대하여』 1,2 (서울:성약)를 참조하라.
42) 이 용어에 대한 논의로 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서울: 이레서원, 2001), 101을 참조하라.
43)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행5장), 행전8:18-24(시몬사건)을 참조하라.
44) 이 점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Archibald Robertson and Alfred Plummer, First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ICC, second Edition (Edinburgh: T. & T. Clark, 1914), 384를 보라.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