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국난(임진왜란)을 극복했다는 점 보다는 전쟁을 자초한 부정적인 평가쪽에 무게가 실렸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서 공이 많은 임금으로 재평가되면서 ‘선종실록’이 ‘선조수정실록’으로 바뀌었다. 종(宗)은 덕(德)의 상징이며 조(祖)는 공(功)의 상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초반에 외척들의 전횡으로 일어났던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상흔을 씻어내고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하게 예우해 침체된 정국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당시 과거제도가 문장능력을 평가하는 데만 치우치자,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각 고을을 순행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난, 국론 분열 등 나라에 화(禍)도 많았지만 역사상 인재가 가장 많이 배출됐던 때가 선조 때였다.
---> 신 봉승씨의 식견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선정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 '투철한 경영 마인드'가 있는 임금이었다면 어찌
정 여립 같은 사람이 봉기했겠으며 종친이라는 이 몽학이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겠습니까.
똑같이 인재가 많았어도 히데요시의 인재 활용과 선조의 인재 활용을
비교해보면 결과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인재가 많이 쏟아진 것은 그가 잘 해서라기보다 시대의 도움을 많이
얻어서인줄로 압니다.
일본의 경우도 선조와 비슷한 시기에 인재가 많이 쏟아졌지만 그
인재 활용도에서 명종과 선조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따르지
못했음이 솔직한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이 당시만 해도 비교가 아니 되었던 양국의 문화 격차가
임진왜란 후 '어느 정도는 해 볼만한 격차'로 줄어들었는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구나 선조와 히데요시의 그릇 격차는 이미 이이화 선생께서도
분명히 지적하신 바 있는 마당입니다.
신봉승씨가 뭐라 강변을 한다해도 선조는 설령 왕조를 유지한데는
성공한 왕인가는 모르겠으나 역사 앞에서는 분명히 크게 실패한
왕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3.광해군-패덕의 이름을 남긴 연약한 군왕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연산군과 함께 쿠데타 세력들에게 밀려나는 오명을 남긴 왕이다. 총명함을 타고났지만 온갖 콤플렉스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해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부왕의 적자를 죽였다. 그의 폐덕은 네 명의 형제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능수능란한 실리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 장막으로 인해 판단이 흐트러졌다. 인재 기용에도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했다.
---> 물론 광해왕은 성공한 왕은 아닙니다.
하나 엄청난 시대적 한계 속에서 그나마라도 행보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광해왕은 앞뒤의 선조나 인조는 물론 조선 왕조 전체로
보더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왕인줄 압니다.
더구나 광해왕을 사사건건 방해한 세력이 기득권층인 서인 특히
후대의 노론 계열에 속하는(다시 막강한 친일파로 연결되는)
당파였으니만큼 광해왕에 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표면상의 성공과 실패만을 논함은 진정한 의미의 성패가 아니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무조건 승자의 역사만을 높이 사던 19세기 역사학은 이미
종언을 고한지 오래인 마당에 21세기에 19세기 역사학을 재탕삼탕
반복함은 온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