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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예술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미얀마를 다녀와서
김석환 추천 0 조회 38 05.11.14 18:4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오늘은 미얀마를 가는 날.

전에 방글라데시를 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비교적 짧은 날이라서 어제 밤 가방을 싸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고 가방도 텅 비어서 뭔가 미진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 날씨도 27도 안팎이라니 별달리 옷도 준비할 것이 없어서 더욱 헐렁한

가방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제일 먼저 테니스 라켓을 챙겼다.

라켓이라는 것이 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길이가 긴 것이기에 기내 가방에 넣으려면 손잡이

부분이 가방 밖으로 나오는 통에 가방에 넣기가 애매하다. 그렇다고 큰 가방을 가지고

가자니 불편하기만 해서 가방을 찾으니 마침 중간 크기의 것이 있어 라켓을 비스듬히 가방

속에서 대각선으로 뉘어서 억지로 넣으니 아주 일 미리의 오차도 없이 빡빡하게 들어가기에

기쁜 마음으로 다른 것들도 그 밑과 위의 사이에 넣었다.


일전에 와이프가 인터넷에서 사 준 아직 신지도 않아서 꼬리표가 달린 채인 테니스 신발하

고 방글라데시에 갔을 적에 산 슬리퍼하고 테니스 양말과 테니스 여름복장을 먼저 챙기고

속옷 두어 벌하고 일반 양말하고 튜브 고추장 남은 거 두개하고 세면도구 세트하고 책 몇

권을 챙겨 넣으니 가방에 공간이 넉넉하기만 하다.


이어서 둘 째 놈을 달래서 그 놈이 게임할 때 주로 쓰는 노트북을 챙기고 또 그 애의 가방을 챙겼다.

배에 차는 보통의 여행 백으로는 학생들 여권이며 표 챙기기에 적어서 좀 넉넉한 것으로

하기 위해 그 놈 것을 빌렸다.

가방이야 그렇지만 노트북에 관하여서는 그것이 없는 동안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누나하고

컴퓨터 사용권을 놓고 씨름을 해야 하는 상황을 예감한 녀석은 여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놈이 용돈이야기를 슬쩍 비쳐서 나는 얼른 용돈을 건네서 약간 튀어

나온 입을 원위치 시켰다.


그리고는 디지털 카메라인데 깜박 작업실에서 배터리 충전기를 잊고 오는 바람에 마침 우리

것하고 기종이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먼저 살던 집 앞집에 갔다.

그 집에 가니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충전기만 남았다면서 아예 그것을 가지란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 버렸으니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얼른 챙겨왔다.

단지 그게 일본서 사온 것이라 100볼트용인 것이 걸렸다.

모름지기 후진국은 모두 200볼트를 사용하는 통에 미얀마에 가면 아마 좀 고생을 할 것

같다.


그리고 알람을 6시 25분에 맞춰 놓고 잠에 들었는데 이상한 개꿈을 꿨다.

공항에 갈 시간이 겨우 45분밖에 안 남아서 부랴부랴 차를 달려가는데 옆자리에는 하필

3년 전에 죽은 친구가 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좀 달려가는데 길에 사방에 만 원짜리가

날라 다니고 이 친구는 바빠 죽겠는데 내려서 만 원짜리를 줍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좀 가니 경찰이 우리를 잡아 그 만 원짜리를 뒤지는데 난 마침 한 장도 안 주워

떳떳하게 주머니를 내 미는데 '우주의 침공' 알람 소리가 '난리 브루스'를 추는 것이

아닌가?


개꿈치고 참으로 희한한 개꿈이었다.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그래도 후다닥 일어나 이 닦고 얼굴 물 묻히고 옷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마침 날 데리러 오기로 한 이 감독님과 만나 막 고속도로로 들어서면서 학생들 여권을

건네받는데 아뿔싸!  그 사이사이에  어제 미안마 대사관에서 준 쪽지들이 끼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자만 있으면 되지 이 영수증 같은 것도 필요한가요?"

그건 나의 무지함을 확인 사살 하는 거였다.

"당연히 필요하죠"


나의 두 마디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핸들을 180도로 트신다.

아니 필요 없는 것에 사진을 왜 붙인단 말인가?

그건 나의 어리석음의 총체적 들어남이었다.

마침 고속도로 들어가기 바로 몇 미터 전이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핸드폰이 울리는데 "여보! 큰일 났어요. 당신 서류 빼놓고 갔어요"

참나! 나의 어리석음을 합창으로 확인사살을 하다니......

세상의 모든 일은 왜 나의 촉수를 벗어나서 흐르기만 하는지 기이할 정도고 이제까지

커다란 탈 없이 살아온 내가 신기할 정도다.


결국 20분이 넘는 시간을 까먹고 서류를 받아 들고 러시아워를 뚫고 공항을 향하니

감독님한테도 체면이 말이 아니고 애들한테도 첫인상을 완전히 구겨버렸다.

그래도 다행이 외곽도로라서인지 거의 막히지 않았고 마음이 급한 감독님의 날쌘 운전과

훌륭한 내비게이션 덕분에 한 10분은 당긴 1시간 정도의 시간을 길에 뿌리고 공항에

도착 했다.

그런데 공항서도 자꾸 헛돌기만 했다.


타이 항공을 다른 항공으로 알고 헤매고 환전도 헤매고 이미 없어진 공항 이용세 때문에 또

헤매면서 어째 자꾸만 헛손질만 되었다.

그래도 무사히 심사대를 통과해서 우리는 비행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자리가 한 사람은 떨어져 있어서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건 말건 졸리면 자고 주면 먹고 가지고 들어간 신문을 읽으며 옆자리 파키스탄 친구와

어쩌고저쩌고 하니 비행기가 착륙한단다.


나는 거기가 방콕인 줄 알았더니 홍콩이란다.

그러니까 두 곳을 들려서 목적지에 가야하는 글자 그대로 이코나미 표인가 보다.

비행기에서 나오는데 멀리 떨어져 앉았던 한 학생이 안 보인다.

먼저 나갔겠지 하면서 커넥션 룸까지 가니 그 애가 그림자도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분명 비행기 복도에서도 보였던 애가 하늘로 날랐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통 보이질

안했다.


방송을 하고 난리를 부리는 중에 시간은 자꾸 흘러 탑승이 시작되건만 도통 그림자가 안

보인다.

불안한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코딱지만 한 공항에서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오로지 비행기 좌석표 쪽지만 있으니 밖으로 나가지는 못 할 것이고 오겠지 하면서 방송을

두 번이나 했다.

"이현희 44번 출구로 와라! 모르겠으면 직원한테 물어봐라"

방송은 이층만 된다니 아무래도 홍콩에 도착하는 승객들을 따라서 일층으로 갔고 거기서 내

애달픈 육성을 못 듣는 모양이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탄다고 감독님이 그랬는데 그 녀석은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오히려

안쓰러운 생각에 성질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래도 다행으로 승객들이 거의 탑승할 때 쯤 직원이 오더니 찾았고 이층으로 데려 온단다.

나는 조바심에 참았던 볼 일을 화장실에 가서 보고 비행기에 올라 나르니 이번에는

방콕행이다.

완전히 비행기 '수제비 뜨기'다.


또한 주는 기내식이며 이것저것 뒤적이다 방콕에 도착해서 역시 연결 방에서 기다리면서

나는 노트북을 꺼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허겁지겁 출구로 가니 '라스트 콜'이란 빨간 글씨가 선명했다.

아마 몇 번 불렀고 이번에도 안 오면 비행기가 그냥 날아갈 판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난 6시가 탑승시간인 줄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그게

출발시간이었다.

우리는 맨 꼴찌로 비행기에 올라 드디어 마지막 기착지 미얀마 양곤을 향했다.


비행기가 적당히 고도를 잡으니 갑자기 기내가 시장통으로 변했다.

겨우 한 시간 남짓 날라 가는 시간에 음료수며 식사를 내 줘야 하는 승무원들로서는

고도를 잡기도 전에 바쁘게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고 승객들도 서둘러 먹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기착지가 두 곳이지만 그래도 좋았던 점은 매번 나온 기내식이 너무 맛이

있어 내 맘에 쏙 들었다는 것이다.

맛도 좋고 간도 알맞고 양도 적당해서 참 좋았고 매번 하늘에 오를 때 마다 주는 통에 결국

오늘 우리는 본의 아니게 네 끼의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또한 열심히 입국서류를 작성하는데 무슨 쓸 것도 많고 또한 학생들 것도 다

써야 하고 글씨는 작아서 비행기의 흔들림에 그나마 노안인 눈의 초점이 완전히 뭉개져서

도통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대충 감으로 쓰느라 여간 시간이 더딘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반 밖에 못 쓰고 비행기가 착륙하면서 시골 버스 대합실 같은 곳에 우리를 토해 냈다.

이미 방콕을 떠날 때의 기내에서 부터 가지고온 후덥지근한 더위가 우리를 얼싸 안는 것

같았다.

다행히 현지 테니스 관계자들이 나와서 우리의 수속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안내로 수속을

마치고 무사히 숙소로 향했다.


한 4-50분을 미니버스에 실려서 어디론가 끌려갔지만 야경은 도통 이렇다 할 것이 안

보였다.

무엇보다 사람이나 차가 적고 자전거가 거의 눈에 안 뜨이는 것이 특이했다.

방글라데시의 공항에서 다카시내로 들어갈 때와 비슷하게 도시의 야경이랄 것이 없이

시골만 같은 점은 비슷했다. 그래도 그보다는 뭔가 모르게 정돈이 되어 있었고 안정감이

깃들여 있어 보였으며 바로 옆 나라 치고는 확연히 차이나는 것이 먼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안개로 착각을 했던 그 많던 먼지는 바로 옆 동네인

이곳하고는 전혀 남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을 해서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아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하고 또한

환전도 하고 방의 키도 받았다.

그런데 한결같이 사람들이 친절하기만 한 점이 특이했다.

마치 여러 번 만난 사이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다감한 표정들이 참으로 특이하기만 했다.

몇 군데 다녀온 동남아 사람들을 통틀어 비교해 보면 유별난 것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생긴 모습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제일 많이 닮은 것만 같다.


모든 면에서 오로지 우리들을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것은 참으로 의외였다.

우리가 환전을 하려고 3백 불을 내 놓으니 그건 많고 2백 불이면 충분할 것이라면서 백

불은 돌려주고 '짯'이라고 하는 미얀마 돈을 한 뭉치 주는데 방글라데시 같았으면 아무 말

없이 다 바꿔 주었을 것이다.

여기도 달라가 귀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셈보다는 정이 앞서는 나라인가보다.


방에 들어오니 더블침대가 둘인 너무나 혼자 자기에는 미안한 널찍하기만 한 그런

방이었다. 한 방에서 넷은 잘 수가 없는 바람에 난 어쩔 수 없이 독방 신세가 되었다.

시설들도 좋고 편하고 화장실도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머리통을 디밀고 샴푸로 머리카락을 빠는데 얼떨결에 조그만 샴푸 통을

세게 잡았는지 그냥 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계란처럼 깨트려서 쓰는 샴푸 통도

아닐 텐데 희한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미얀마 공산품은 그처럼 부실한가보다.

대충 씻고 짐을 정리하고 꾸무럭대다 10시가 넘으니 한국시간으로는 한시에 가까운

시간인지라 피곤한 몸이 잠을 자잔다.

시작부터 헤맨 먼 여행이 그래도 별 탈 없이 하루를 마감한다는 안도감으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2일 째(11월 4일)

먼 곳에서의 첫 날밤 치고는 전혀 흔들림 없는 깊은 잠을 자고 눈을 뜨니 5시 30분쯤이고

창문은 어슴푸레한 미명을 보이는 지라 나는 벌떡 일어나 이를 닦고 엉클어진 머리를 물로

다듬고 밖으로 나와 옥상을 찾았다.

딱히 옥상으로 가는 통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겨우 헤매면서 올라간 옥상은 커다란

닥트시설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나는 억지로 건너뛰고 기면서 올라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이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흐려서 해돋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점은 아쉬웠지만

이국에서 맞는 해돋이는 그런대로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도시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고 그냥 우리나라 중소도시만 한 느낌이었지만

꽤 높은 현대식 건물도 있고 교회의 뾰족탑도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로는 전형적인 미얀마

금탑이 보이는데 아마 그것이 '쉐다곤 파고다'가 아닌가 싶다.

적당히 사진을 찍고 나는 호텔 정문을 나와 좀 걷다가 자전거를 탔다.

여기서는 이름이 뭔지 모르지만 그 모습이 또한 특이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뒤의 높은 위치에 둘이 탈 수 있는 좌석이 있어 시내주변을 조망 할 수

있었고 베트남에서는 의자가 앞에 있어서 비록 낮았지만 시야의 가림 없이 앞을 볼 수가

있었는데 여기는 옆에 의자가 달려 있고 앞뒤로 한 사람 씩 앉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앞 사람은 앞을 보고 뒷자리는 뒤를 보게 되어 있는 좀 특이한 구조였고 다른

나라처럼 장식이 요란하지 않은 것도 한 특징이고 또한 방글라데시의 그 엄청난 자전거

물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길에 세워져 있는 것도 없는 것을 보면 여기는 다른

동남아처럼 자전거나 오토바이 문화가 일반화되지 못한 것 같다.


비교적 거리는 한적하고 그런대로 정돈 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여기는 거지가

눈에 안 띄는 것이었다.

집단 수용소라도 있어서 모두 잡아 갔는지 분명 있어야 할 도시의 그늘이건만 눈에 안 띄는

것이 신기했다.

한적한 거리는 경적소리가 없었고 자전거가 이리 저리 굴러가는데 특별히 불편할 점이 없을

정도로 이른 아침의 도시는 조용했다.

공기도 시원했고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움직임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대충 한 바퀴를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식당의 식사는 내가 들렸던 동남아 그 어느 식당의 아침 식단보다 좋았고 내 입맛에도 잘

맞아서 아침이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을 먹은 후 우리는 아침운동을 위해 픽업트럭을 타고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테니스장은 방글라데시에서 본 바로 그 시멘트 포장의 테니스장이었다.


그런 테니스장에서 운동하는 것이 처음인지 아이들은 영 낯설어 하고 연결구를 못 치고

자꾸 공을 죽이기만 해서 내일부터의 시합이 좀 걱정이 되었다.

대충 애들이 공 치는 것을 보고 물도 사다 준 후에 바로 옆 코트에 마침 백보드가 있는지라

나도 백보드를 토닥여 봤다.

의외로 온도에 비해 습도가 많아서 땀이 금방 났다.

적당히 치다 공이 넘어가는 통에 그것을 주우러 갔다 그만 '꼬랑탱이'에서 미끄러져 발이

시궁창에 빠지고 손바닥과 엉치뼈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 멀리까지 와서 그냥 무게나 잡고 있을 것이지 괜 실히 토닥이다 다치기만 한 내 꼴이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이 스쳤지만 냄새나는 몸을 이끌고 연습을 좀

더 하고 운동이 끝난 애들과 함께 아까의 그 트럭을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긁혀서

쓰라린 상처부위를 무릅쓰고 샤워를 하고는 쉬다 점심을 위해 다시 호텔로비로 나갔다.

점심은 호텔에서 해결이 안 됨으로 안내자를 따라 밖으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 달리다 들린 식당은 중국식당으로 주로 연인들인 듯한 사람들이 눈에 띄는

자그마한 호반을 끼고  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차에서 내려 보니 호반 저 너머에 쉐다곤

파고다의 황금 탑이 번쩍이고 있었다.

얼마인가를 기다리니 대여섯 종류의 음식이 나오는데 나는 계속 나올 줄

알고 젓가락질을 아꼈더니 그게 아니었다.


요리가 더 나오지도 않고 더 주지도 않고 오로지 '푸석밥'만 더 퍼주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없이 다시 허겁지겁 남은 음식들을 긁어모아 남겨두었던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양이 적은 나는 먼저 허겁지겁 먹다가 정작 나중의 맛있는 것을 놓치는 통에

이번에는 조심을 떨었더니 아예 그 작은 창자마저도 못 채울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여기

사람들은 원래 적게 먹나보다.

하긴 거리의 사람들도 보면 대부분 홀쭉한 것이 뭐 많이 먹을 것 같게 보이지를 안했다.


밤 먹는 중에 온, 천둥번개 속의 소낙비 덕분에 후덥지근한 날씨는 덜하였다.

호텔에 돌아와 낮잠을 한 숨 당기고 우리는 다시 테니스장으로 연습과 선수 등록을 위해

나갔다.

아침과 달리 선수들도 많고 행사 연습하는 학생들도 있고 그런대로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에 다친 엉치뼈도 있고 내가 ‘낑겨서’ 토닥거릴 틈이 없을 것 같아 라켓은 접고

그저 애들 뒷바라지며 등록이나 도와주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호텔에서 먹는 뷔페식인데 역시 먹을 만한 것이었다.

대부분이 육식이지만 채소도 맛이 있었고 주스라든지 빵이라든지 뭐 특별히 나무랄 것이

없었고 여기식의 스프도 맛이 있어서 꼭 우리나라 음식을 먹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밥만은 예외로 볶은 밥이었던지 백미 던지 모두가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밥보다는 다른 것으로 주로 먹었다.

밥이나 국수는 당연한 것이지만 신기하게도 여기 음식은 고기라고 하더라도 막힘이 없이

소화가 잘된다.

먹을 때는 좀 과하게 먹은 것 같기만 한데 좀 돌아다니다 보면 배가 금방 가벼워지는 것이

참으로 특이하기만 했다.


대충 저녁을 들고 일찍 올라와서 텔레비전을 봤다.

일본 방송에 스페인 방송도 있는 것이 온갖 것의 짬뽕이다. 그 중에 한국어 방송도 있으니

아마 우리나라 연속극이 여기서도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한류 바람이 여기서 얼마나 큰

지는 잘 모르지만 이 구석에까지 불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대충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 나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3일째(11월 5일)

나는 일찍 일어나  대충 닦고 6시 30에 학생들과 아침을 먹었다.

먼저처럼 간단하게 밥 몇 숟가락 국수 조금하고 생선 한 조각 계란 프라이에 모닝 빵

한 개에 주스 한잔 홍차 한잔 을 챙겨 의자에 폼 잡고 앉아서 아침을 먹으니  평소의

아침에 비하면 좀 무거운 편이다. 하기는 여기 지금 시간이면 한국의 9시가 넘은 시간이니

아침치고는 늦은 시간이고 그런대로 잘 넘어갈 만해서일 것이다.


호텔버스로 테니스장에 가서 애들은 연습을 하고 나는 또 공이 밖으로 튀어나가 구정물에서

헤매지 않게 어제의 백보드에 조심스럽게 공을 적당히 치고는 땀을 식히고 있는데

마침 서양 사람이 라켓을 메고 얼쩡거리기에 연습공을 같이 치자니 좋단다.

보아하니 코치도 아닌 것 같고 여기 여행객이나 미안마에 온 오퍼상 정도가 얼마나 공을

치랴 싶었는데 웬걸 공 실력이 꽤 되었다.


한참을 열심히 두드렸다. 오랜만에 하는 난타에 마침 몸이 풀리려는데 선수들 시합

시작한다는 방송이 있는지라 아쉽게도 연습공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국에서 그런 훌륭한 연습파트너를 만나다니 역시 지옥에도 부처가 있다는 내가

좋아하는 속담이 여기서도 먹혀드니 참으로 뭐든지 눈만 ‘똘망거리고’ 있으면 없는

것 같아도 기회가 다 주어지는 법이다.

세상이 말 꼬랑지처럼 지나가는 것이고 '아수라장' 같은 것일지언정 반드시 기회가

주어지는 법이고 잡을 수 있는 것이리라.


방글라데시나 이 나라나 길거리의 개들을 보라!

한 결 같이 다 바짝 마른 체격이지만 그래도 용케 이 가난한 나라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테니스장에 나는 참새들도 연신 먹을 것을 쪼아대는 것을 보면 굳이 성경을 안

빌더라도 다 살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국 개나 미얀마 개나 미국 개나 상식만 다를 뿐 다 살게 되어있는 것이고 어느 나라 새나

인간이나 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 기회를 찾고 잡아서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한국 시골구석에서 운신의 폭 없이 낑낑거리고 있지만 그 나름의 즐거움으로 버티다

보면 기회라는 것이 올 것이고 최선의 마음가짐으로 버티다 보면 그것이 나에게 빛이 될

것이다.


애들 예선 경기는 두 명은 예선 2회전 통과 한 명은 예선 2회전 탈락이다.

열심히 싸웠지만 아쉽게도 탈락이다.

강원도에서 용인으로 말하자면  테니스 유학을 온 학생이고 비행기도 생전 처음으로 타고

한국에서 테니스 선수로 입지를 확보하려면 꼭 필요한 국제전 승리점수를 따기 위해

여기까지 어렵게 왔지만 문턱에도 못 올라가보고 탈락이니 보는 나로서는 안타깝기만 하다.

유별나게 착해 보이기만 하는 녀석이 힘없어 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 돼 보이기만 한다.

씁쓰름한 마음을 안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또한 일찍 눈을 붙였다.



4일째(11월 6일)

오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7시 버스를 타고 테니스장에 나갔다.

애들 물을 얼른 챙겨주고 나도 백보드를 토닥이는데 한 20분이나 지났을까 싶은데 다른

나라 선수들이 연습을 하기 위해 내가 백보드 치고 있는 코트에 들어온다.

나는 겸연쩍게 백보드 치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기 테니스장이 아마 오래전에

생긴 것이어서 백보드가 있는 것이 나로서는 여간 다행이 아니지만 그 것이 하필 코트 안에

있다 보니 선수들이 연습을 하거나 시합을 하게 되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보드 인생'은 오나가나 설음뿐이다.


오늘은 오픈식이 있는 날이라 그러잖아도 어떤 공이던지 오래 칠 수가 없는 날이다.

어차피 7시 반이면 다들 모여서 식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학생들로 이루어진 밴드가 연습하느라 난리고 전통 복 입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고 풍선도 떠 있고 자못 축제 분위기다.

좀 있으니 이어서 팡파르가 크게 울려 퍼지고 높은 군인아저씨가 기관총을 든 호위병과

함께 등장하니 사람들도 다 기립해서 맞이하고 밴드 사운드도 더 커지면서 한껏 분위기를

돋구더니 전통복의 피켓 걸을 선두로 각 나라 선수입장에 이어진다. 인사말도 나오고

풍선띄우기도 있고 여러 가지 행사가 마치 올림픽이라도 이우러지는 것 같다.


이 나라도 엄청나게 격식을 좋아 하는 가보다.

비록 이번 대회가 청소년 테니스 대회로는 제일 낮은 등급의 대회일지언정 어쨌거나 행사는

행사답게 치르려고 엄청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봐서 이런 대회의 유치가 뭔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아마 그 동안의 군부 통치에서 오는 자신감 결여와 세계의 따가운 시선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 같다.

또한 내부적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을 획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우리나라 6-70년대 상황이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보게 하는 그런 행사

모습이었다.


식이 끝난 후 예선 게임이 있었는데 우리 팀은 2회전에서 한 명이 탈락하고 두 명이 예선

파이널까지 올라가서 결과적으로 두 명이 본선 32강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2회전에서 진

선수는 내일의 운을 봐야 했다.

다행히 본선에 오기로 한 선수들이 많이 오지를 않아서 예선 탈락자들도 뽑기를 해서

합류시킨다니 확률이 반반이다.

이 멀리까지 와서 본선에도 못 올라가고 돌아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스포츠도 몇 명을 위해 나머지는 날개 짓도 제대로

못하고 접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니 그들의 좌절이 얼마나 클까 안쓰러운 마음뿐이다.

테니스를 시작하는 모든 어린 학생들이 모두 다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부분은 결국 남의 성공에 받침대 노릇이나 하다 그만두게 되고 또 여러 가지 조건이

알맞아서 잘 나가 다도 조금의 오차나 상황변수에 의해 또한 큰 선수로 크지를 못하게

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번에 같이 온 어린 선수 중에도 과연 이렇다 할 프로선수가 나올 객관적인 확률은 아마

숫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나 한 포인트 한 포인트에 온 힘을 쏟고 또

점수를 잃거나 실수를 범했을 때의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내가 애달픈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필 테니스란 우리 여건으로 너무도 어려운 종목을 택해서 이 고생들을

하나 싶었고 또한 미래에 대한 보장 없음에 거듭 측은함만 가중되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 저녁 만찬에 참석을 했다.

만찬장은 호텔 내 3층 옥외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전에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의 만찬을 생각하고 별 기대를 안 했지만 여기는 역시 사뭇

달랐다.

아침의 그 군인이 도착하니 식은 시작되고 일정한 격식 하에 진행되는 것은 비슷했지만

음식도 너무 훌륭했고 제대로 된 밴드며 가수들이 여러 명 와서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전혀 와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이처럼 먼 곳에 와서 한 마디도 뜻을 모르는 노래를 듣고

무대 뒤로 보이는 별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저런 잡념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맺은 테니스와의 인연이 날 이처럼 먼 곳까지 몰고 온 것인지 나의 역마살이 그런

것인지 이해도 안 되고 한편 좀 한심한 생각도 들고 두고 온 일들도 잡념에 끼어들어 맴

돌면서 나의 마음을 약간은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런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아마 이곳의 유명 가수들인 모양이다.

한 7-8명 정도가 돌려가며 노래를 부를 즈음 대부분의 선수들은 파티 장을 빠져 나갔다.

우리 팀도 모두 나가고 나만 여기 관계자들과 현지인들과 함께 열심히 음악을 들었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와서 악보를 한 장씩 악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 두곡씩 노래를

부르고는 또한 그 것들을 수거해서 내려가곤 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가수들의 나이와 곡의 종류도 다양해서 경쾌한 것과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 등이 뒤 섞여

있었다.

한 번은 60세 가까이 되 보이는 작달막한 가수가 기타를 가지고 올라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조용필 저리 가라’로 너무도 열창을 해서 감동적이었다. 두 곡을 다 부르고 나더니 무대

밖으로 내려가 자기 기타에 키스를 하고 그것을 일일이 천으로 닦은 후에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더니 무대 앞으로 와서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거듭

날 감동시켰다.


모름지기 인생은 저처럼 최선을 다할 때 그 모습이 빛날 것이다.

이 먼 구석에도 저처럼 열심이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삶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숙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린 선수들이 시합 중에 화가 난다고 라켓을 분질러 버리는 것과 대조해 볼 때 그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함이 더욱 돋보이기만 했다.

우리가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에 순응하고 그것에 도움을 준 것이 비록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물건에 지나지 않더라도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대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인생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파장까지 자리를 지키다 나는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여기서의 잠은 특별히 준비해 온 귀마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바로 길 옆인데 차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지 안했고 한 밤으로는 고요하기만 해서 나는

특별히 잠에 방해 받을 것이 없었다.

잠자리나 사람이나 음식이나 특별히 날 어렵게 하는 요소는 전혀 없었다.


11월 7일(5일 째)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 어스름한 빛 속에 호텔 주변의 산책에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역시 더욱 한적하기만 하다. 여기저기서 야채며 아침 먹을거리를 파는

좌판을 벌이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대부분이 두 서명의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 작은 좌판이 그들 일가의 삶의

전부라서인지 내가 보기엔 하잘 것도 없어 보이거늘 그들은 각자가 자못 진지하기만 한

표정이다.


식사 후 코트에 나가 연습 후 시합에 들어가서 우리 팀은 한명은 본 선 1회전 탈락하고 한

명은 어제 예선 마지막에서 진 캐나다 선수를 이기고 본 선 2회전에 올라갔다.

이로서 세 명 중 한 명이 5점을 겨우 딴 것이다.

그 5점을 따기 위해 그 모든 시간과 인원과 노력과 돈이 필요했다는 것의 그 비효율성이

이긴 것에 대한 흐뭇함을 훨씬 앞지르는 안타까움이었다.


과연 이 5점이 그 어린 선수에게 보다 큰 선수가 되는데 얼마만한 도움이 되고 뒷받침이 될

것인지 의심이 가기만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기쁨의 환호는 그런 저런 나의 복작한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쩌면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 승리의 쾌감 한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고 포기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나머지는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일승의 기쁨 그것이 모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로선수로 커서 확실한 인생의 보장을 받지 못할 지라도 매 순간 맞이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 일승을 거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그 것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자체만이 의미이고 다른 것들은 의미 이전의 운일 것이고 인간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신들의 영역일 것이다.

나도 너무 어렵고 거창한 한국 테니스계의 난맥상에 고개를 흔들고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고 그저 그들이 거두는 한 점 한 점과 그 들이 그 때마다 기쁨으로 지르는 함성에

박수를 쳐 줌으로 그들의 최선의 노력에 동참해주는 일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호텔로 돌아 와 저녁을 먹기 전에 나는 또한 시내 산책을 나갔다.

그 방향은 바닷가 쪽의 다운타운 거리였다. 널따란 길을 따라 가다 밑으로 철길이 지나는

다리를 지나 오른 쪽에 낡은 붉은 색 벽돌집이 있어 그것을 끼고 돌아 보니 어느 호텔과

연해 있는 아주 오래 된 건물이었다. 아마 영국 식민지 시절에 지은 커다란 호텔이거나

시청사 건물쯤으로 되어 보였다. 어림짐작에 한 백년은 되어 보였다.


아침에 산책에 나섰던 곳에서 봤던 건물들도 다 서양식의 가정집 건축물로서 이런 큰

건물과 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인들이 지은 것이리라.

지금은 모두 퇴락하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 옛날에는 제법 폼 나고 멋있는 집들이었을

것이고 그 사이를 유렵인 들이 많은 현지인들을 거느리고 왕족이나 되는 듯한

거들먹거리던 삶들이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랜 식민지 생활의  잔재들일 것이다.


우리도 중앙청은 벌써 없어졌지만 약간의 식민지 흔적이 남아 있다 하겠지만 이들의 것은

그 집들이 유럽식이라서 크고 튼튼해서 맘먹고 헐기도 어려운지라 이처럼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름으로 생각을 해 봤다. 그렇지 않다면 대단한 문화재도 아닐 텐데 이처럼

내버려 두겠는가?

그 주변으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도 특이했는데 아마 그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처럼 그 옆에 붙어 있는 호텔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특별히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거나 살벌한 분위기도 아니고 보초서는 군인들의 표정도

딱히 긴장된 분위기가 아닌 것을 보면 그냥 하나의 시위용인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자유를 위해 군부에 반기를 들까봐 두려워서가 아니고 그냥 그처럼

군인들을 세워 놈으로서 딴 생각들 말고 지금처럼 그냥 조용히 살라는 뜻의 거꾸로 '군부

시위용'이 아닐까 나름으로 생각을 해 봤다.


보초서는 군인이나 개회사를 했던 장군이나 여기 일반인들이나 그런 정치적인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이다.

어느 나라든지 일반인들이야 정치적인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직접 영향권에 있는 지위가 높은 군인들도 우리의 그 옛날의 그

사람들처럼 눈알이 번뜩이고 동작이 팔딱팔딱하거나 경직 된 그런 살벌한 표정들이 아니다.

아마 직접적인 당사자도 아니고 사람 사는 모습을 그림 보듯이 감상하는 내 눈이

부정확해서 그런 지도 모를 일이나 하여튼 그들 모두의 표정은 평화롭고 한가하기만 하다.


그 곳을 나와 좀 더 걸어가니 시장 통이다.

온갖 잡동사니 천지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움직임 등이 이곳 사람들의 삶의 리얼한 한

형태인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쭉 돌아보며 기웃거려 봤지만 내가 관심을 가져 볼 만한

것은 그 많은 상가 점포 중에 한 곳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 것은 그들의 삶의 공간일 뿐 이방인인 내가 끼어들 공간은 전혀 없었다.

그곳은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가 아니고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오래 전의 어느 역사

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시장통 같기만 해서 낯설고 어색하고 어설프기만 했다.

다만 그들의 삶의 열기만이 후끈할 뿐이었다.


그곳을 디귿자로 돌아 다시 큰길로 나오니 저 멀리 탑이 보이는 지라 무턱대고 그 쪽을

향해 가니 '슐레 파고다'란 곳이었다.

큰 길을 막고 서 있는 그 탑은 비교적 작고 낚은 것으로 나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

가려니 신발 비닐 값을 내라면서 비닐 하나를 주기에 비닐 값 100 쨋을 강탈당하는

기분으로 내고 봉지를 받아 신발을 넣고 좀 더 올라가니 "도네이션!"한다.

기부금으로 입장료를 대신하나 보다. 200 쨋에 그들의 ‘뜰드름해’ 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불상 앞에 서니 금 불상도 특이하지만 그 후광처리가 더욱 회한하기만 했다.


그것은 동그란 플라스틱 후광 같은 것에 여러 색의 반짝이 불을 넣어서 안에서 밖으로

조그만 점등식 전 들불이 밖으로 점점이 달아나는 그런 아주 현대적인 후광이었다. 

그 기발하면서 전혀 불상과 어울리지 않은 모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거기다 각 방위마다

놓여 있는 불상도그 표정이 한결같고 약간은 '합죽이'같은 표정이어서 있던 신심이 있어도

달아날 것만 같은데도 갈색가사를 두른 중과 사람들은 열심히 무릎 꿇고 뭔가를 중얼거리니

여기 사람들의 신심은 그저 자연 발생적인 그 무엇인가 보다.


한 바퀴를 돌다보니 맨발바닥에 자꾸 흙 같은 것이 붙어 다리고 여기 저기 더러운 것들이

달라붙는 것만 같아서 영 파고다고 신심이고 영 기분이 언짢았다.

이상하게 나는 맨발이 '뽀드득'거리는 기분이 아니면 병적으로 싫어하는 편이다. 부엌

근처만 해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름기들이 발에 밟혀서 미끈거리면 영 기분이 '파이'인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서도 발이 슬리퍼 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아니고 뭔가 중간에

끼어 있는 느낌이 들면 이에 음식이라도 낀 것처럼 질색이므로 물로 닦아서 이물감을

없애곤 하고 부엌 바닥도 휴지로 박박 문질러서 그런 이물감의 원흉을 없애는 광적인

'발바닥 감촉 보호병자'이다 보니 미안마 파고다 안의 더러운 바닥에서 달라붙는

이물감에서 불쾌감이란 말로 형용하고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고문의 수준에 육박하는  것이다 보니 대충 후다닥 돌고 그 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은 제법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파고다라는 것이 원형이고 방위마다의 각 입구가 다 비슷해서 한 바퀴 돌다 보면 우리나라

절간이나 탑이나 건물구조하고는 사뭇 달라서 그 입구가 어딘지 헷갈리는 면이 있다.

대충 맞겠거니 하고 입구를 찾아 나와서 또한 한 방향이 대충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이려니

하고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만 가는데 아까의 길이 자꾸 아닌 것만 같다.

한 참을 가도 기준이 되는 커다란 호텔건물도 없고 아까의 그 철길 오버브릿지도 안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길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미안마의 밤은 다운타운이건만 가로등이 거의 없거나 안 켜져 있다고 보면 맞을 정도다.

길바닥은 엉망이고 어둡기는 하고 마음은 급한데 자꾸 엉뚱한 길만 계속되어 결국 다시

돌아 나왔다.

다행히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길옆의 어설픈 길거리 식당에서 식사들이나 차나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서움은 적었고 꽤 길은 시간을 걸어 다녔건만

방글라데시에서 산 슬리퍼의 쿠션이 의외로 내 발의 피로 누적을 막아 주는 지 별로 걷기에

피곤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실 도시를 걷는데 있어서 한 삼십분만 걸으면 그저 어디고 쭈그리고 앉아 있고 싶어 하는

내 체질에는 신기한 노릇이었다.


돌아 나와서도 이리 저리 길을 헤매도 영 아까의 길과는 딴 판이고 결국 헤매다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어 버렸다.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완전히 우리나라 시골 식으로 '저기요'다. 저기라고 해서 가보면

아니고 그러기를 몇 번하니 완전히 내 방향 감각이 먹통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주머니에

돈을 몇 푼 가지고 나와서 그 이상하게만 생긴 자전거를 타려고 호텔이름을 대니 다들

고개만 저을 뿐이다.

아니 호텔에 묵는 사람이나 관광객은 자전거도 안탄단 말인가? 자전거는 현지인들만

타기라도 한단 말인가? 여기서는 큰 편에 속하는 이름도 거창한 ‘그랜드 프라자 로얄

호텔’을 모른 단 말인가?

하기는 택시 운전수들도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을 대면 반 이상이 몰라서 결국 주소를

보여줘야 그 때서야 끄덕이고 하던 것을 보면 호텔이용자가 별로 없던가 그런 사람들은

호텔버스 외에는 별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이 없던가 한가 보다. 한마디로 호텔

이용객은 여기서는 우주인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것이 확실한 것만 같다.


겨우 두세 개의 택시를 넘어서 호텔을 알아보는 기사의 택시를 찾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야간의 스릴감을 전리품처럼 가슴에 안고 나는 호텔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대충 씻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피곤한 몸이 자꾸 꺼져들어 일찍 눈을 붙였다.


11월 8일 (6일 째)

이른 잠을 잔 덕에 또한 일찍 눈을 뜨니 5시 반이다.

어제의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아 아침 산책을 나갔다. 하지만 그 쪽은 시장 통도 아니고

사람의 왕래가 적고 차들만 다니는 길이라서인지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는데다 밝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날은 계속 밝기를 꾸물거리는 통에 나는 별 흥이 없이 호텔로 돌아 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을 먹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아침 경기는 연기한다는 안내쪽지가

붙어 다렸다.

나는 빈 시간의 짬을 내서 그 유명한 '쉐다곤 파고다'를 가기로 했다. 애들은 게임의 중압감

때문인지 그냥 쉬겠단다.


어설프게 내리는 비를 한 십분 뚫고 달리니 금탑들이 벌써 나를 맞는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또한 신발을 벗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니! 웬 엘리베이터가?

말하자면 절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격이다.

우리나라도 부분적으로 그렇지만 여기도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한 공간에 뒤엉켜 있는

격이다.

평지의 도시인 이곳에서 그나마 한 삼층 정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조망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도시의 조망이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저 멀리 분수가 있는 호수가 보이고 도시

건물들과 녹지 공간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짧은 순간이지만 그런대로 나의 눈을

즐겁게 했다.


연도를 지나 탑 쪽으로 다가 갈수록 탑은 점점 큰 모습으로 다가 왔고 나의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 즈음 갑자기 어떤 친구가 다가오는 통에 그런 기분이 다 부서졌다.

입장료로 5달러나 내란다. 그것도 외국인만 골라서 받는 것이니 내가 얼쩡거리며 어설프게

카메라를 주물럭거리니 독수리한테 걸린 새앙쥐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변명의 여지없이 강탈당하는 기분으로 표를 사서  역시 타일로 깔린 바닥을 맨발로

둥그렇게 돌아 나갔다.

탑은 어디서 보다 원형이다 보니 그 모습이었다. 뭐 특별한 감응을 줄 것까지는 없이 그저

커다랗다는 느낌 이상이 아니었다.


금칠을 했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탑을 보면서 엄청난 금을 발랐다는 그 탑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지만 탑 주변을 삥 돌면서 부처들이 마치 그 탑을 보호라도 하듯이 꽉 차 있고 그

사이로는 철책이 쳐져 있어서 관계자가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한 것만 같았다.

부처들은 그처럼 탑 주변을 비슷한 크기로 방위마다 서 있고 그 사이사이에 또한 그 나름의

잔잔한 크기들의 불상이 또한 원으로 줄을 서고 있었고 그런 원형의 줄을 벗어나

별도의 공간에도 부처들이 버티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맘에 드는 불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뭔가를 외우며 기도하면 염원하며 절하며 그랬다.


남녀노소가 없고 일반인도 있고 중도 있고 다양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의 신심을 향한 마음은 사뭇 경건하기만 해서 내가

얼쩡거리는 것이 행여 그들의 신심에 금이 가는 것이 아닐까 저으기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도 쭈그리고 않아 같이 절하고 싶지는 안했다.

나 같은 전혀 신심이 없는 인간에게는 전혀 가당치 않은 존엄성으로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이 날 감동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번쩍거리는 금빛의 휘황찬란함은 나의 묵은 때를 좋아하는 기호의 나에게서 감동과 함께

신심을 자아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고 애매모호한 부처들의 표정은 이질감과

이국적인 얼떨떨함만 줄 뿐 전혀 인간적인 깊이를 건너 신심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철저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 저런 생각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불상도 많고 불상을 안치한 집이나 고깔장식 모자

같은 지붕을 한 건물도 다양해서 다 나름으로 사연이 있을 법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것을

도저히 느낄 수도 파악할 수도 없었다.

역시 바닥에 밟히는 빗물과 뒤섞인 잔모래나 하루살이들의 시체 등이 더 내 신경을

자극하는 통에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오는데 다행히 수돗가가 있기에 열심히 발바닥을

닦고는 아까의 그 엘리베이터로 나왔다.

뭐든지 기대가 크면 그 만큼 감동은 적은 법인가 보다. 만사에 기대보다는 스치는 의외

감으로 만나는 것이 사람이나 물건이나 음식이나 하나같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

하겠다. 우리 인생도 큰 것에서 건지려면 작은 것이고 작은 것에서 건지려면 큰 것일

것이다.


오늘의 시합은 결국 하나 남은 단식 경기도 2회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결국 복식만 남았고

나는 어렵게 예선에서 떨어진 우리 선수의 복식파트너를 미얀만 선수 중에서 구해 주었다.

우리 선수들이 세 명인지라 그 한명의 복식 파트너 구하는 것이 걱정거리였는데 겨우

해결을 했다.

점심 후 복식경기를 치렀는데 우리 선수끼리 묶어진 복식조가 선전을 해서 일번 시드의

홍콩 팀을 잡았다.

둘의 팀워크에 상대팀은 오금을 못 펴고 제풀에 패하고 말았다.


그들이 외쳐대는 “캄온!”소리가 양곤 시내 전체에 울려 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껏 그처럼 크고 쉬지 않고 질러대는 파이팅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그들은 사력을 다해 일승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질러대는 그 외마디소리에 그들의 인생전체가 녹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숙연함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최선의 자세와 활력 넘치는 자신감과 매 점수마다 느끼고

확인하는 즐거움이 그들의 삶 내내 계속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했다.

복식 한개 조는 그 출발이 좋았다.


호텔로 돌아 와 저녁 후 쉬고 있는데 오늘 야간 관광이 있단다. 그것도 오전에 간 쉐다곤

파고다에.

좀 어이없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분명 야경은 또한 한 낮과는 다른 운치가 있을 것이란 기대

속에 호텔버스를 타고 쉐다곤 파고다를 향해 갔다.


저녁에 다시 쉐다곤 파고다에 들리니 이번에는 노인 한 명의 가이드도 따라 붙어서 설명을 하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역시 아침의 코스를 따라 쭉 따라 도는데 조명이 빈약해서인지 생각보다 화려함이 덜 했다.

그렇더라도 조명등을 받은 황금 탑은 선명하고 인간의 염원을 응축해서 발하는 그 빛의 장엄함이 이 곳 양곤과 미안마와 정치와 가난 그리고 소원 등 그 모든 것의 복잡한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 들 염원의 한 덩어리고 표징이고 고향이고 그 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고 절대적인 종교 이상의 그 무엇이다.


마치 그 탑이 있음으로 해서 그들은 살아 있음이 의미가 있고 사후의 삶도 확실함이고 지금도 가난한 이나 부자나 지위의 고하를 넘어서 모두가 하나로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신앙심 이상의 불가사의한 그 무엇이라는 생각밖에 들지를 안했다.

그런 것은 그들이 기도하는 자세에서도 엿 볼 수가 있다.


그들은 기도를 함에 있어 경건함이나 의무감이나 겸허함이나 갈구나 애틋함이나 간절함이나 한 것 외의 그 무엇의 다른 느낌으로 기도를 한다.

그 것은 탑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 탑은 그런 모든 것의 합일이 만들어낸 하나의 응집된 덩어리 일 것이고 사실은 불심이라는 신앙심일 것이다.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다정함이고 친근함이고 가까움이고 즐거움이고 따스함이고 자연스러움이고 연인이 만나는 산들바람이고 부부나 자녀가 만나는 포근함이고 편안함이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도 그렇다.

천천히 흐르는 커다란 강물을 따라 가는 작은 통나무 배 같은 것이 그들의 삶이 아닌가싶었다. 자연과 환경에 순응하면서 특별한 욕심이나 부정이나 흔들림이나 쏠림이 없는 것이 그들의 삶의 한 전형처럼 보였다.

최소한 겉으로는 내가 만난 시장의 사람이나 사원의 사람이나 일의 관계자나 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군인이나 택시기사 거리의 사람이나 모두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들의 일상화된 종교의식의 저변에서 나오는 이런 국민성은 그 탑을 돌면서 한 공간에 갔을 때 더욱 확인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침에 내가 빼 놓고 들렸던 곳으로 말하자면 사진 실 같은 곳으로 밑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탑 꼭대기 부분의 사진과 탑신의 근접 촬영 사진과 재건 내지는 수리 사진 그 위에서 행하는 행사 사진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 놀라운 것은 그 탑이 내가 처음 생각한 것처럼 금칠이나 금박이라든지 우리나라 불상처럼 금종이를 붙인 것이 아니고 그냥 금판을 금 못으로 박아 붙인 것이었다.

140미터가 넘는 탑과 엄청나게 큰 그 밑 둥우리의 그 모든 부분을 그처럼 금판을 붙였다니 당연히 7톤의 금이 들어갔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맨 꼭대기의 첨탑부분으로 그 곳은 특별히 엄청난 양과 개수의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70킬로 그람의 다이아몬드까지 박혔다니 내가 잘못 들어 7 킬로 짜리라 해도 엄청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여기가 보석이 많이 난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양의 보석을 덕지덕지 붙였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뿐이 아니라 그 곳에는 온갖 종류의 보석이 박힌 금반지나 팔찌가 개수를 셀 수 없는 양으로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즐비해서 마치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 탑 밑에 가면 그 중 최소한 하나는 떨어져 주을 수 있을 만큼 그처럼 엄청난 양으로 매달려 있고 박혀 있었다.

그런 것들이 다들 신심으로 기증이 된 것 들일 터이니 행여나 신을 속일 마음으로 가짜를 그처럼 했을 리도 만무하니 아무리 기원 전 588년부터 만들어져 계속 재건되어 온 탑이라지만 그 양의 엄청남에 놀랍고 어찌 보면 우매하게까지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를 향한 순수함은 그처럼 시간을 뛰어 넘어서 영원불멸인 것이다.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 낸 우매한 상징이고 개인의 삶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우습게라도 여기는 듯이 그런 믿음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엄청난 무게로 하나가 되어 덩어리로 모이고 쌓여서 절대적 의지로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한결같다는 것이 거듭 놀라울 뿐이었다.


왕권이든지 침입자들이던지 독재자들이든지 그 모든 이들의 그 사소함은 이 거대한 용광로 안에다 녹아 버리는, 부질없고 하잘 것 없는 작은 욕심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외부인의 눈으로는 우매함일지 모르는, 그들이 가지는 이 절대적이고 확고한 신념에 의한 믿음 덩어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삶의 의문에 대한 오답덩어리일지언정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염원에 대한 화석덩어리거나 종류석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힘이 가지는 그 절대적 깊이와 무게에 대한 시각적 확인은 정말로 나를 질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사진은 높은 군인인 듯 한 사람이 나무 거푸집 위에서 그 높은 첨탑의 보석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있었다. 왕이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 통치자건 일단 그 탑에 대한 경외감을 보임으로 해서 그 거대한 믿음 덩어리와 한 식구라는 동참의식을 확인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은 통치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인 모양이다.

일단 그런 하나 됨의 확인만 거치면 나머지는 수월하거나 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그럴 것이다.


우리의 ‘나라를 위한 조찬 기도’같은 ‘눈 가리고 아웅’식과는 달리 이들의 하나 됨의 이 덩어리는 너무도 확실한 것이기에 그런 요식행위가 꼭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위가 높은 이는 그처럼 코앞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일반인은 밑바닥에서 기도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그 오랜 염원의 덩어리에 정성을 들이는 한결같은 마음은 같은 것이니 이 나라에서 그 탑의 위력은 참으로 큰 것일 것이다.


감동으로 탑을 둘러보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마침 오늘 시합을 경렬하게 해서 발이 아프다는 선수도 있고 해서 발 마사지를 받았다.

주무르는 힘이 어찌나 센지 때로는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원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11월 9일(7일 째)

어제 마자지 실에서 마신 차 덕분인지 눈을 뜨니 3시인 지라 다시 억지로 눈을 붙여 6시 반에 기상을 해서 다른 날보다 좀 늦게 7시에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여전히 같은 메뉴인지라 처음에는 훌륭하기만 하던 아침이 이제는 약간 질리는 맛이 되어 버려서 새로운 메뉴가 없는지 찾아 헤매는데 중국식 코너가 있고 빵 통이 있어 보니 하나는 만두고 하나는 찐빵이다. 그것도 곁들여 다음 날 먹던 것으로 아침을 때웠다.


그래도 여기서 오래 먹어도 그럭저럭 버틸 만한 것이 생과일주스하고 계란 프라이하고 마치 김밥처럼 속에 내용물을 넣고 말아서 튀긴 만두 같은 것으로 비교적 덜 질리고 먹을 만하다.

워낙 호텔 손님이야 수시로 바뀌니 이처럼 늘 같은 메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가 보다. 방글라데시 같을 때도 그랬고 베트남 갔을 때도 그런 것을 보면 호텔들이 다 같은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는 오전에 경기가 없어서 나는 쉬겠다는 선수들을 남겨 놓고 혼자 시내 구경을 나서기로 하고는 정문의 전통복을 입고 손님들을 안내하는 아가씨에게 장소를 물어 먼저 ‘간다우지 호수’라는 곳을 갔다.

마침 호수정문에 도착하니 어는 택시 기사가 호수가 철책 앞에서 신발을 옆에 다소 곳하게 벗어 놓고 호수 너머 저 멀리의 금빛 신앙의 상징 쉐다곤 파고다를 향해 절하는 모습이 너무도 경건하여 나도 절로 절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하지만 난 절할 대상이 없으니 그가 행복한 인간이라면 난 불쌍하기만 인간 일 것이다.


정문을 들어가니 입장료가 2백 짯이고 사진 찍는 값이 5백 짯이란다.

뭐 대단한 호수도 아닌데 입장료 받는 것도 이상했고 사진 찍는 값을 별도를 받는 것도 특이하기만 했다.

입구를 지나 오른 쪽에 롭스터 요리 간판이 있어 한번 나중에 들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호수는 그저 평온했고 주변에 있는 야외 음식점인지 카페인지 하는 곳들의 영업 준비가 분주해 보였다. 호수의 한편 중앙에는 촌스런 백조 모양의 커다란 음식점이 있어서 자연스런 호수의 맛에 침을 뱉는 격이었지만 난 느껴 질 듯 말 듯한 아침 공기만 느끼고 호텔 안내 아가씨가 바로 곁에 있다는 ‘가바라예 파고다’를 찾아 나섰는데 택시비가 좀 비쌌다.

이상히 생각하며 가니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 곳은 그 호수의 정반대에 있는 곳으로 그녀가 처음에 권했지만 너무 멀다고 해서 내가 포기한 ‘이아 호수’라는 곳 근처였다.


기념품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골목을 지나 신발 넣는 비닐 값도 입장료도 도네이션도 없는 파고다가 나오니 거기가 가바라예 파고다였다. 멀리 오긴 했지만 특별히 특징도 없고 작고 이렇다하게 보잘 것이 없는 그런 곳이었지만 역시 원형 형태의 공간으로 탑 밑 내부에 부처가 방위마다 있는 구조여서 한 바퀴 무감으로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데 오히려 기둥에 새겨져 있는 입상이 부처보다 열배이상 아름다웠다.


이처럼 예쁜 얼굴로도 얼굴을 만들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부처상은 조금은 합죽이 상 같기도 하게 윗입술이 튀어 나오고 턱은 뾰족하고 표정도 애매모호하고 약간 졸린 것 같기만 하고 얼굴도 전체적으로 ‘오종종하게’ 보이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여기도 부처 얼굴의 정형 같은 것이 있어서 그처럼 만드는 것이 신심을 더 유발시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이가 있어 그 전형을 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부처들의 그 덤덤하고 무뚝뚝한 표정의 일치감처럼 여기서도 전혀 신심하고는 거리감 있게 만들어진 불상이 특이하기만 했다. 하긴 그렇다 보니 오히려 거창함대신 더 인간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이니 이들의 신앙심의 생활화된 모습을 생각하면 한편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침에 호텔 안내 여자가 건네 준 지도위에 그녀가 동그라미를 그린 곳이 마침 그 옆에 있었다. ‘젬 뮤지엄’이라고 보석 박물관이란다.

마침 좀 걸어가니 그 곳이 나와서 정문에 선 군인들에게 가방을 검문 당하고 들어갔다.

여기는 그야말로 검문의 일상화다. 호텔을 매일 들락거려도 매번 검문이고 테니스 경기장도 걸어 들어 갈 때는 검문이다. 겉으로는 평화롭게만 보이는데 이 처럼 검문이 생활화 된 이유를 모르겠다. 뭔가 정치적인 불안감이 상존하는 모양이나 겉으로만 보는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안했다.


이층은 상점들이고 삼층은 보석 박물관인 곳이었다.

박물관은 문을 열었지만 5불씩이나 내야 한다기에 보석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 마침 문을 딱 한군데 연 상점에 들어가 귀걸이 두 짝을 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아마 또 핀잔만 듣고 잘 샀다는 소리는 들을 것 같지가 않다.


거기를 나와 이번에는 아까 택시 타고 오면서 지나친 이안 호수를 가기로 했다.

사실 거기가 먼저 들린 간다우지 호수보다 좋다고 했는데 멀어서 포기했지만 마침 안내 잘못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들르기로 하고 택시를 타니 금방 데려다 주는데 거기는 호수변의 호텔이다. 지나는 여자한테 길을 물으니 일반적인 호수 방향과 ‘로컬’호수 방향이 있다기에 나는 당연히 로컬로 정하니 멀다고 택시비를 더 달랜다.


호수는 아침의 그 호수보다 더 크다는 것을 빼고는 그냥 호수였다.

호수라고 안개가 좍 끼었거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을 끼고 있는 우리 작업실 근처의 저수지나 아니면 퇴촌입구의 물가나 양수리 같은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내 실수였다.

여기는 바닷가 분지다 보니 산이 드물고 기온차가 적으니 물안개 같은 것이나 콧구멍을 뻥 뚫리게 하고 시큰하게 하는 그런 찬 공기 맛 같은 것은 턱도 없는 생각이다.

그냥 물하고 약간의 식당하고 연인이 몇 쌍 풀 뽑는 사람 등이 좀 있을 뿐인 그저 밋밋한 물가 이상이 아니다.


실망으로 둑을 내려와 택시를 잡으니 몇 대가 그냥 지나가더니 한 차가 우악스럽게 서면서 빨리 타란다.

이 친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여기 기사들과 다른 인상이다. 우선 마르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고 다른 기사와 달리 영어로 얼추 반은 통한다는 것이 틀렸다.

여기 기사들은 뭐라고 말을 하면 고개만 끄덕이는 통에 기어이 주소를 보여줘야 했는데 이 친구는 달라서 반가웠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불록에 흰색과 빨간 색이 교차로 칠 해져 있는 이곳은 택시가 서면 벌금을 내야 하는 곳으로 내가 외국인처럼 보이는데다 주변에 경찰도 없어서 그처럼 급하게 서고 태웠다는 것이다.

참으로 순발력이 좋은 친구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모셔야할 어머니며 가르쳐야 될 애도 한명이 있는지라 열심히 해서 돈들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이 택시도 자기 개인 것이 아니고 싱가포르에서 돈을 벌고 있는 자기 사촌의 것으로 매일 8000 짯을 제하고 나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고 영어도 10년 전 택시를 시작하면서 외국인을 태울 때 어려움이 많아서 순전히 독학으로 배웠단다.


지구 어디나 열심히 일 하지 않으면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이 처럼 열심히 사는 친구를 만나니 반갑기만 했다.

그래서 인지 마음도 통하고 여러 가지로 친절하기만 한데 대뜸 나와 ‘브라더’하잔다.

나야 뭐 돈 드는 일도 아니고 그게 열댓 살 더 많은 나를 형으로 부른다는 의미 같으니 마다할 일이 없었다.


‘내셔날 뮤지엄’을 가자고 했는데 바로 아까 지나온 ‘젬 뮤지엄’으로 나를 데려가는 게 아닌가? 대부분 외국인들이 보석 박물관에 많이 오는 통에 자기도 뮤지엄 소리만 듣고 여기인 줄 알고 잘 못 데려왔다면서 ‘노 프라블럼’이란다.

자기가 그것은 제하고 받겠다면서 시내로 한참을 가니 박물관이 나왔고 나는 그 친구에게 밖에서 30분 기다렸다가 내가 나오면 호텔로 가자고 하니 그러잖다.


가방하고 카메라를 맡겨야 된다는 직원의 말에 걱정 말고 자기 차에 맡기고 가란 권유를 나는 뿌리치고 짐 보관 상자에 넣었다.

‘브라더’하자고 한 친구에게 내가 너무 의심스럽게 대하고 야박하게 군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어떤 신부가 신자인 내가 아는 사람에게 “세상 사람은 물론이고 신부인 나도 믿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나 혼자 자위를 떨면서 박물관에 들어갔다.


박물관은 큼지막했으며 볼 것도 꽤 많았다.

특히 금 세공품이 많았다.  이곳은 그런 보석류 가공의 역사가 깊은 모양이다.

선사 시대 유물도 많이 있고 여기 저기 볼 만한 유적이나 유물들도 꽤 많은 것으로 보면 구석에 ‘짱 박혀 있는’ 나라지만 나름의 문화를 이루며 오랜 세월을 지내 온 나라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마지막 맨 꼭대기 층의 그림 전시실도 양은 꽤 되었지만 이렇다하게 보잘 것은 없는 근현대 그림들이어서 좀 아쉬웠다.


그런 저런 것들을 서둘러 둘러 봤지만 근 한 시간은 지난 것 같다.

밖에 나오니 여전히 그 택시 기사는 ‘브라더’인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게임이 있을 테니스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게임이 끝나면 비게 되는 저녁 시간을 위해서 또 그 친절한 친구와 호텔 앞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점심 후의 오후 게임은 비가 온 통에 자꾸 연기가 되어서 자꾸 내일 떠나야할 일정이 마음에 걸렸다.

5시에 호텔로 돌아와 일층의 화랑에 잠시 들려 미얀마 미술에 대해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10분 쯤 늦은 시간에 로비로 나가 기웃거리니 역시 문 밖에 입가에 피를 흘리며 그 친구가 반가운 손짓을 했다. 혹시나 했더니 그 친구는 역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다시 두 군데의 파고다를 더 들리기로 했다.


원래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오가는 도중의 경치도 좋고 볼만하다는 어느 파고다를 들르고 싶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그냥 근처의 파고다를 들르기로 했다. 하나는 호텔서 추천한 곳이고 하나는 그 친구가 고른 곳이다. 택시를 타고 가며 그 친구의 그 ‘피’에 대해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작은 비닐봉지에 나뭇잎인지 풀인지 한 것을 들고 다니면서 씹다가 뱉는데 그게 영락없는 피 색이다. 그것을 씹던 사람과 말하려면 입 주변과 이 사이에 온통 피가 묻은 것 같아서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내 뱉을 때도 또한 섬뜩하고 길거리에는 그런 피가 여기 저기 튀어 있다.


그 친구도 날 기다리다 그것을 씹은 모양이고 뱉다 입 주변에도 묻은 모양이다.

원래 여기 사람들은 그것은 무슨 껌 씹듯이 그냥 기호식품으로 씹는데 그것을 씹으면 정신이 맑아진단다. 생각을 정리 할 때라든지 심심할 때 그것을 씹는단다. 말하자면 담배의 역할과 껌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자들은 그것을 씹는 것을 못 보고 또한 테니스 관계자들은 그것을 안 씹는 것을 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생활풍속이지만 너무도 원시적인 것이기에 미를 먼저 생각하는 여자들은 벌써 포기를 했고 좀 깬 이들도 그런 행위를 안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별히 기사들은 잠을 쫓기 위해 그것을 씹는다면서 자기처럼 하루에 열 대 여섯 시간씩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꼭 필요하단다.

길거리 좌판에 그것이 들어 있는 조그만 봉지가 눈에 많이 띄는 것을 보면 이렇다 할 기호식품이 적은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분명 값싼 대용기호식품인가 보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자들의 습관 중에 하나는 얼굴의 광대뼈 부분에 널찍하게 분 같은 가루를 바르고 다니는 것이다.

처음에 아침 산책을 나갔을 때 그런 모습의 여자를 보고 나는 무슨 몹쓸 병에라도 걸려서 약을 바른 줄 알고 기겁을 해서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피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너도 나도 하고 다니고 여자라면 나이에 구별이 없고 심지어는 어린 남자애도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무슨 주술적인 의미가 아닌가도 생각해 봤으나 그것은 아마 피부 보호의 전통방식인가보다. 햇볕으로부터의 보호라기보다는 피부를 부드럽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떤 파고다 앞에 차를 세우는데 그곳은 내가 아는 그런 ‘파고다’ 개념이 아닌 그냥 창고 같은 얼기설기 만든 건물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파고다가 내가 아는 탑이라는 개념 말고 부처와 관계가 있으면 그냥 파고다인 모양이다.

그곳에는 300피트는 됨직한 커다란 와불이 팔을 괴고 누워 있었다.

원래 있던 비스듬히 누운 불상이 오랜 세월의 풍화로 망가져서 다시 만든 지는 한 5년 밖에 안 되었다는데 그 표정이 ‘섹시하다’ 할 만큼 너무도 묘한 느낌이었다.


붉은 입술에 짙은 눈썹이며 내리 깐 눈알의 표정은 다정하기도 하고 조금은 요염한 것도 같고 불상의 이미지로는 통속적인 표정도 내포하고 있는 좀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백팔번뇌를 새겼다는 엄청 커다란 발바닥도 사뭇 기이하기만 했다.

역시 그 곳에도 부처가 누워 있는 앞 쪽 벽에 이 불상을 만들 때의 시주자들 명단이 쭉 써  있었다.

그 불상이 매일 그 시주자들의 명단을 바라보며 그 이름 하나 하나와 액수를 일일이 외면서 그들의 안녕을 빌어 줄 테니 그들은 축복 속에 살다가 죽어서도 부자나 높은 신분으로 환생할거다.


나는 그 부처 앞에 그 친구를 놓고 사진을 한방 찍고는 ‘촉 투트 키이 파고다’라는 다음 장소로 갔다.

이번에 들른 곳은 계단을 좀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계단이라야 백팔 개나 될까 싶은데 옆에 있는 부라더 친구의 숨소리가 가쁘다.

오늘도 두꺼운 지갑을 나한테 보이며 벌이가 좋았다고 자랑을 할 정도로 열심히 식구를 위해 일을 하고 휴식이라고 해야 잠이 전부라니 그 적은 운동량으로 살은 원수처럼 달라붙어 있고 심폐기능은 엄청나게 떨어져서 이처럼 적은 계단에도 숨소리를 몰아쉬는 그 친구가 안쓰러웠다. 10여 년 전의 내 모습만 같아서 더욱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우리나라에서 늘 그런 사람을 보면 나처럼 테니스를 하던지 다른 운동이라도 아무거나 하라던 권유를 거기서는 할 수가 없었다.

피를 팔아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피를 팔지 말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고 권하는 것하고 비슷할 것이기에 그랬다.

그저 얼른 그 친구의 바람처럼 개인택시를 사서 좀 더 여유로운 속에 일하는 시간이나 줄여서 식구들과 좀 더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지기나 빌 뿐이었다.

여기도 잘 사는 사람들은 다 몸이 뚱뚱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 친구도 반은 부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나의 쓸데없는 안쓰러움을 덮기로 했다.


그처럼 조금은 높은 위치에 서 있는 그 불상은 또한 특이한 것이었다.

그것은 ‘만달레이’란 북쪽의 우리나라 경주 같은 곳에서 온 대리석 하나를 통 째로 가지고 와서 조각을 한 것이란다.

그 친구말로는 한 삼백 톤은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 컸다.

그것이 사각형의 커다란 유리조각을 연이어서 붙인 상자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


그런데 남의 나라 경배의 대상을 일부러 폄하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 표정이나 자세가 부처와 전혀 관계없이 나로서는 원숭이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얼굴의 옆면이 코 부분이 동그랗게 앞으로 튀어 나와 있고 게슴츠레한 표정이며 붕어눈을 한 모습하고 눈과 코 와 잎 사이의 거리가 유별나게 짧게 조성되었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종합적으로 그런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불상이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천안에 이십삼 억을 들여서 영국에서 사왔다는 현대술가 ‘데미안 허스트’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인체의 해부도를 입체로 만들고 에나멜 칠을 해서 번쩍거리게 만든 것으로 그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 상자 안에 넣었는데 영락없이 여기에서 보는 그 유리상자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기에 그렇다.

여기에 조성된 부처도 제작 된 지가 한 2-3년 밖에 안 되었다니 둘 다 현대미술인 셈이다. 어찌 보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만나는 두 작품이고 표현된 대상이나 작가나 목적은 전혀 다르지만 한 통속으로 관통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종교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려는 마음은 여기나 저기나 다 똑 같은가보다. 하기는 우리가 하는 미술도 어찌 보면 남을 놀라게 하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종교에서는 그것을 크기나 규모로 그리 하려고 하고 우리는 기발함으로 그렇게 하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현대 미술가 중에서도 규모를 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작가들이 없지는 않다. 아니 많은 경우에 종교가들이 하는 것처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단지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결국 현대 미술도 종교에서처럼 시주자들 즉 스폰서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처럼 규모로도 놀라게 하고 싶은 것이 자연스런 현상일 테이니 역시 그런 면에서도 종교와 예술은 또한 커다란 의미에서 한 통속이란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원시미술에서 현대 미술로 오는 전과정에서 한결같다 하겠다.

사실 예술도 간절한 염원이라는 종교지심이 없이는 보편성을 뛰어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니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절실한 구도자적 자세는 필연적일 것이다.


나는 그런 잡념 속에 호텔로 돌아와 그 친구의 그야말로 ‘리즌어블’이란 단어에 걸 맞는 액수를 건네고 팁까지 얹혀 주고는 호텔에 돌아와 조금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는 더러워진 발바닥을 닦고 나는 전혀 꺼지지 않은 배를 부여안고 오늘 밤이 미안마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좀 이른 잠을 청했다.


11월 10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나는 오늘의 일정을 예상하며 조금은 심난한 마음으로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을 정리를 해 봤지만 통 산뜻하지가 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밤에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하지만 복식조가 아직 게임이 안 끝났기 때문이다. 비와 일몰로 게임이 계속 연기 된 다데 다가 다음 팀이 약팀인지라 2회전 통과가 무난할 것이고 그 다음은 세미파이널인데 그 게임이 언제 이루어 질 지 또 거기서 승리해서 결승까지 올라간다면 오늘은 고사하고 내일까지 게임이 계속될 터이니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다음 팀은 약팀이니 오전에 이기고 오후에 4강에 올라가서 5시 전 즘 해서 패하는 것으로 게임이 끝나면 원래의 일정대로 돌아가면 되지만 원래 올 때 우리들의 그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란 예상이 없이 경비를 줄이려는 생각에 하루를 먼저 당겨서 일정을 잡아 놨기에 그리 된 것이고 또한 방글라데시에서도 그같이 일정을 짜서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선수들과 조식 후 경기장에 나가 며칠을 선수들에 치어서 못 한 백보드 운동으로 땀을 쏟고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니 물이 안 나왔다.

여기는 수도 한복판이라지만 수도시설이 안 좋아서 테니스장은 아마 물탱크의 물을 사용하고 며칠 동안 계속 사용하다보니 오늘은 물이 떨어진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현지 선수들이 사용하는 식당의 부엌에 가서 물을 찾으니 콘크리트 속에 갇혀 있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치 내 어렸을 때의 풍경으로 시계가 돌아간 느낌이었다.


조금 있어서 시합이 시작되었는데 결국 예상대로 아침 경기는 우리가 승리를 했다.

우리가 꺽은 미안마와 싱가포르 혼성팀 중에서 미안마 선수는 13살의 어린 선수로 6개월 밖에 안 배웠고 고아로서 그 곳에서 여러 사람한테 스폰을 받아 나온 선수란다.

그런 어리고 촉망받는 선수를 이겨서 좀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부의 세계에는 냉정함만이 존재하는 것이니 방법이 없는 노릇이다.

호텔에 들어가 조금의 틈을 이용해 나는 호텔 바로 옆의, 여기서는 크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쇼핑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조금만 쇼핑몰에 가서 선물을 샀다. 선물이라고 해야 일 층의 슈퍼에서 산 차 종류가 주종이다.


오후 게임은 나의 조바심과는 달리 결국 3시 반부터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어서 나는 본부에 이야기를 해서 비행기 표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겨우 ‘웨이팅’으로 잡아 놓았다가 겨우 2시간 당겨진 시간으로 좌석이 나와서 한 시름 놓았고 아이들은 결국 1세트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일몰로 경기가 연기 되어 비행 날짜를 하루 연기한 것이 너무도 현명한 처사가 되었다.

혼란스럽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와 미안마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또한 마지막 잠을 잤다.


11월 11일(9일 째)

아침 6시에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는 망설임 끝에 다 쌓은 짐을 다시 뒤적여서 테니스 복장으로 바꿔 입고 테니스 코트에 선수들과 같이 나가서 나는 역시 아침 운동을 하였다.

이제는 패한 선수들이 많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코트는 여유로웠고 내가 백보드 치기를 하기에도 훨씬 넉넉했다.

운동 후에 어제 중단 된 우리 선수들의 일몰 게임이 단식 결승을 하는 옆 코트에서 계속되었다.

상대팀은 미안마 에이스들이었고 나이들도 꽉 찬 선수들이고 실력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어제도 일 세트를 6대 6으로 끝내고 오늘은 타이블레이크로 일 세트 마무리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잠깐 사이 일 세트를 우리가 졌다. 이어서 이 세트. 여기서마저 패하면 어렵게 표까지 연기하고 갖는 경기이건만 결승 진출은 무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시합 중에 현지인들이 심판이다 보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편파적인 판정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 우리 선수 중에 한 명이 열을 받기 시작하고 덩달아 파트너 까지 흔들리는 바람에 우리가 실력이 나은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끊지를 못해 결국 이 세트도 타이블레이크 까지 가서 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수는 흔들림이 없어야 되건만 아직 그런 훈련은 안 되었는지 우리 선수들은 그렇지를 못 했고 결국 패인이 되고 말았다.

내가 들어가기 전에 어떤 판정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조언을 못 한 것이 내내 아쉬운 그런 경기였다.

하지만 승패는 결정 난 것이고 우리는 호텔로 맥없이 돌아 올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린 선수들은 마지막 시간을 호텔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기특했다. 인생은 늘 즐거운 시간의 연속을 바래는 마음으로 애쓰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을 수록 잘 산 인생일 터이니 부디 앞으로도 그런 시간들이 많이 있기를 기도해본다.


우리는 대충 정리를 하고는 내가 어제 애들한테 약속한 ‘롭스터’ 요리를 사주기로 하고 물어서 중국식당으로 갔다. 여기서야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훨씬 싸겠지 싶어서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이다.

나도 아직은 롭스터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기에 기대되는 심정으로 요리를 시켰는데 양이 너무 적을 것 같아 서너 개의 다른 요리를 더 시켰다.

결국 먹다가도 부족해서 두어 개의 요리를 또 시켜 먹었다.


롭스터 요리는 간단한 튀김요리였고 양은 적었지만 그래도 역시 명성처럼 맛이 있었다.

그 배 부분을 파먹는 살맛과 머리 부분의 살을 쏙 빼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

다른 요리들과 함께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서 계산서를 받으니 가격이 무려 팔십 삼만 쨋 정도가 되었다. 아무리 여기 돈 가치가 적다고 하나 여기서의 돈으로 엄청 난 액수다.

웬만한 사람 한 달 월급이 아닐까 싶다. 남은 미안마 돈을 다 털어 넣고도 부족해서 30달러를 더 냈는데 또 부족하단다. 일 달러에 천 이백 오십 쨋이지만 식당에서는 천 쨋이란다.

바가지 쓰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평생을 가지고 다닐 맛에 대한 기억의 가격치고는 오히려 싼 것일 지도 모르겠다.

언제 다시 내가 또 이런 요리를 먹어 보겠는가?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들고 공항으로 가는 호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를 주로 도와주었던 미안마 테니스 관련 임시직원이 우리에게 지나가면서 열쇠고리를 하나 선물이라고 주고 간다.

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여자로 말하면 우리가 미안마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만난 미얀마 인이었고 우리들 행사 내내 자주 만나 일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와주고 하던 명랑하면서 적극적이고 영어도 잘하는 사람이다.

머리는 긴 곱슬머리이고 얼굴은 약간 피부가 검고 얼굴에 기미 같은 것이 약간 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동그스름해서 우리나라 사람 얼굴과 비슷한 곳이 있는 모습이었고 매일 옷을 여기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오고 특히 디너파티 때의 복장은 짙은 노란색의 복장이 아름다웠던 그런 여자다.


언젠가는 이야기 중에 어렵다는 투로 내가 혀를 내밀었더니 자기도 혀를 날름 내밀고 가던 그런 유머러스한 부분도 있는 여자다.

그리고 나는 행사 내내 아줌마인 줄 알고 어느 날 마담이라고 남자 직원한테 이야기 했다 그 여자 앞에서 그러면 맞아 죽을 거라고 했다.

아무튼 그 여자가 나에게 탁구공만한 크기로 나무줄기 같은 것을 공처럼 똘똘 말은 열쇠고리를 주고 지나간 것이다.


옆에 있는 일본 선수도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가까이 지내던 몇에게 나눠 준 모양이다.

나는 무엇으로 답례품을 주나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는데 선수 중에 한 학생의 비행기 표에 이름 철자 하나가 틀렸다고 해서 비행기회사 직원에게 가니 이름 바꾸기는 너무 늦었고 이삼일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안되겠다 싶어 아직 가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있던 나에게 선물 준 그 여자 직원을 데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따지니 결국 표를 한 장 더 사란다.

여기 까지 잘 온 비행기 표를 새삼 문제 삼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안된다고 한 공항 직원은 미웠지만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 그렇게라도 해결을 해준 테니스 직원은 같은 미안마 사람이지만 감사하기만 했다.

아마 그 여자가 일찍 호텔로 돌아갔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며칠은 미안마에서 더 헤매고 말았을 것이다.

종이에 똘똘 말은 이십 달러 지폐 한 장과 내 명함을 그녀에게 전해 주며 겸연쩍어 하는 그녀와 서양식 포옹인사로 그 모든 고마움을 대신하고 비행기에 오르니 드디어 미안마를 떠나는 순간이 되어 버렸다.


순간 여러 사람과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다른 나라 선수며 그 학부모며 코치들이며 우리 선수들의 외침소리며 승리와 패배의 순간들이며 여기서 만난 미안마 사람들, 비행기 표를 알아봐 준 똥똥한 찐빵 같은 얼굴을 한 마음씨 좋은 미안마 테니스 남자 직원과 택시 기사와 모모라는 직원과 가수들과 군인들 호텔입구의 안내 걸 등이 스쳐 갔다. 그런 기억들을 고스란히 비행기에 실고서 우리는 방콕을 향했다.


방콕에 도착해서 대기실에서 비행기 좌석을 받는데 여기서는 이름 틀린 것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한마디의 말도 없이 좌석표를 내주기에 안도감과 함께 세 시간 반을 기다린 후에 또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 눈을 붙여 보려고 비장의 귀마개를 꺼내 틀어막고 눈을 감으니 잠을 잔건지 눈만 감았던 건지 애매한 중에 창밖은 서서히 밝아 오고 지도는 대전 근처를 가리킨다.


인천에 도착하니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것이 월드컵 응원 사진과 함께 우리를 반긴다.

그래 우리나라는 확실히 다이아몬드가 아니고 다이내믹이다. 좋게 말하면 기회가 많은 역동적인 나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죽 끓 듯하는 속에 눈을 부라리고 살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발길에 밟힐 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도 여유로움을 접고 다이나믹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 통속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 코리아! 나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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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11.14 22:07

    첫댓글 . 즐거운 여행하셨네요... 미얀마는 가보지 않았지만 .. 미얀마에 다녀온기분을 느끼게 해주시는군요 ..긴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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