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마을 녹동서원을 찾아가기위해 늦은 아침 도심속 추억의 흔적이 담긴 남부정류장을 찾았다.
남부정류장을 출발해 가창을 지나 팔조령을 넘어서 소싸움대회로 유명한 이서를 지나 풍각까지 다니는 0번 완행버스를 타고 중간 경유지인 우록까지 가야한다. 샛노란 병아리처럼 버스색깔이 참 예쁘고, 귀여웠다.
남부정류장을 출발해 파동 냉천 대일동 삼산리를 지나온 버스는 우록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녹동서원은 여기서 5킬로 더 들어간 우록마을에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 우록마을까지 들어가는 대구시내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완행버스 기사아저씨께서 가르쳐 주셔서 일단 우록입구에서 내렸다. 여지것 한번도 온적이 없는 낯설은 곳에 내리자 이내 노란 완행버스는 떠나버린다.
우록입구에서 30분을 기다리다 우록리행 오지노선 버스를 타고 녹동서원이 있는 한적한 산아래 마을 우록리에 도착했다. 흐린하늘아래 우록리 전체는 옅은 연두빛 세상이었다.
우록버스 종점에서 버스가 왔던 길을 되짚어 100미터 정도 올라가니 마침내 내가 찾는 녹동서원이 보인다.
녹동서원은 김충선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는곳이다. 김충선 장군.. 임진왜란 1592년 선조 25년 당시 조선을 침략하던 왜군 장수 사(沙)야가(也可)는 예를 중시하고, 일본보다 앞선 문물을 가진 나라에 무력침략 정책을 펼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에 회이를 가지게 되어 귀화를 결심하고서 이끌고 온 500명의군사와 조선에 항복하고 조선으로 귀화를 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이던 해였다. 사야가 는 조선군에 조총 제조기술법을 알리고, 조선의 장수로 출전해 많은 전공을 세운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여러성을 되찾자 권율은 왕에게 간청하여 그를 승진시켜줄것을 간청해 마침내 그는 정이품 자헌대부의 관직과 왕이 손수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왜란이 끝난후 왕에게 자청하여 북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소탕하고 1636년 병자해 일어난 병자호란당시 광주 쌍령등지에서 적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는 무훈을 세웠다. 이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현재 대구시 달성군)우록리에 터를 잡았다. 우록리에 터를 잡은 그는 향리교화에 힘써오다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적도 드문 한적한 마을어귀 서원 뒷 동산에는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대나무숲을 이룬 대나무 잎사귀들이 휘날린다. 활짝열린 문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몇사람이 서원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당은 이름모를 꽃들과 풀들이 자리하고 있다.
뒷산에서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청나라 와의 화의( 和議)가 성립되자, 그는 통곡하여 이곳 녹리( 鹿里) 로 내려오게 된다.
그는 이곳에 서서 저 뒷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귀화한 이후로 그는 조선을 위해 한 평생 몸을 던져왔던 충신..
김충선 장군에 대해 알지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그에대한 훗날의 역사는 너무도 소홀히 대했던 것이다. 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일이다.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서는 김충선 장군이 있었다.
일본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진 곳은 이곳이 유일한 곳이다. 찾는 관광객들은 조금식 늘어가고 있지만 주로 일본에서 찾아온 일본관광객이 많다.
살육만이 존재하고 무사도 정신은 사라져버린 조국.. 그 모든것을 미련없이 버리고 조선으로 귀화해 조선인으로 살아온 그는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두고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몰래 눈물도 흘려야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나무숲은 울창해져 있다.
사람들은 사야가 가 그 의 본명으로 알고있지만 사야가 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을 알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두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끝내 자신의 일본 본명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김충선 이란 이름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조선을 위해 평생을 바쳐오다 그토록 흠모해 왔던 조선땅에 묻혔다. 그는 진정 평화를 사랑했던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역사책 에서나 언론에서나 교과서에서도 김충선 장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사실 나도 김충선 장군에 대해 알게된것은 부끄럽지만 군복무하던 시절 내무반에서 우연히 읽던 지역 석간신문 우록마을 소개 기사란에서 알게 되었다. 그만큼 김충선 장군에 대한 일화가 알려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간 소홀히 대한 부분을 이제부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공적 충효를 알려야 할것이다.
오히려 바다건너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온다는데 우리는 이렇듯 무관심 하기만 하니 부끄럽기 조차 하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적한 오지마을 그곳에 조선을 위해 살다가 떠난 영웅 호걸이 잠들어 있다. 그의 넋일까.. 이른 오전에 뒷산에서 들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끝내 가보지 못한 조국을 그리워 하며 두 눈을 감았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짙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뭇잎에 덮여버린 녹동서원앞 버스 승강장
그의 혼이 담긴 우록리에 입하가 지나고 여름이 조금씩 깊어갈려 한다.
우록리 마을회관 앞마당 쉼터의 모습니다. 김충선 장군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면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우록리 종점
우록리 녹동서원으로 가는 대구 시내버스는 두개 노선버스가
하루 25회 운행되고 있다.
버스 운행시간은 맨 아래쪽에 올려놓았다.
녹동서원을 나와서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위해 마을회관 옆 공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성이고 있는데 서원아래 모퉁이를 돌아 버스가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녹동서원 여행을 마무리 하고 돌아가야할 시간.. 그동안 모르고 있던 사실까지 알게되면서 그가 이루고져 했던 평화..충절.. 우리의 소홀했던 부분을 생각하며 우록리를 떠났다.
※ 녹동서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이용시 우록리행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204번 우록행 시간표 439번 우록행 시간표
(반월당 출발시간) (대구역4거리 출발시간)
1. 06:07 1. 06:45
2. 07:17 2. 07:15
3. 08:51 3. 09:36
4. 09:30 4. 12:26
5. 10:48 5. 13:51
6. 11:32 6. 16:41
7. 12:15 7. 18:49
8. 13:33 8. 20:14
9. 14:12 막차 21:03
10. 15:39
11. 16:18
12. 16:57
13. 18:24
14. 19:46
15. 21:04
막차 22:36
204번,439번 우록발 시간표
05:40
06:58
08:10
09:47
10:26
11:44
12:28
13:11
14:29
15:08
16:35
17:14
17:53
19:20
20:39
막차 22:00
(439번 우록발)
06: 05
07: 10
08: 25
10: 39
13: 29
14: 55
17: 44
20: 00
막차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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