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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그저 막 쏟아 부어주시는 분이다.
덕분에 매일매일이 놀라운 나날이다.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이다.”
이병호 주교는 매일 아침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산보에 나선다. “걸으면 정신뿐 아니라 몸도 최대로 활기찬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평소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한 짐이다. 남 보기에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미끄러지듯 가는 것 같은 사람의 삶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어려움이 다 있다. 제가 주교가 되자마자 맞닥뜨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보통 광신적이라고들 말하는 이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제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는 바람에 어려움이 훨씬 더 복잡해졌다. 그 일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한때는 전국적으로도 크게 물의를 빚기도 했다. 주교님들 중에서도 그 일의 깊은 내막을 아시는 분들이 별로 안 계셨는데, 당시 생존해 계셨던 수원교구의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거기에 관해서 아주 조금만 들으시고도 깜짝 놀라시며, “나는 이렇게 오래 주교 생활을 했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런 일이 다 있었나요?”하고 말씀하셨다.
그즈음 치명자산에 올라가서 유항검님을 비롯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 등 가족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특별히 마음이 무겁던 어느 날, 거기에 갔더니 초로의 한 자매님이 무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주교라는 체면 때문이었을까? 저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그런 처지에 계속 눌러있으면, 그 스트레스로 적어도 암은 걸려야 맞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에게는 가장 확실한 답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미사에 나오는 성경 대목을 대하고, 토씨 하나까지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 읽고, 여러 번 읽어서 외우고 난 다음에,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계속 묵상하면, 세상에서 벼락천둥이 치고 별 일이 다 일어나도 저는 성경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 몰입해 있어서, 바깥의 일은 떠오르지도 않지요. 그리고 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강론에서 나누면, 생각이 한결 더 선명해지고 저 자신에게도 더 확실한 믿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성경 속으로 깊이 잠기면 “하느님께서 낙원을 열고 함께 걸어주신다”(2008년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문헌 「주님의 말씀」 87항 참조)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매일 새벽미사를 마치고 아침 산보에 나서서 치명자산을 향해 가서 순교자 묘와 경당을 거쳐서 돌아오곤 했다. 성서사도직 관계 아시아대회 참석차 방콕에 갔다가 다리를 크게 다친 다음부터는, 여정을 바꾸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서 교구가 마련한 토지를 임시 농장으로 쓰고 있는 데까지 갔다 온다. 지금은 한 시간 50분에서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데, 이 산보가 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옛날부터 성경이 둘이라는 믿음이 있어왔는데, 하나는 종이에 적혀 있고, 또 하나는 대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 펼쳐있다. 그러니까 성당 감실과 십자가 앞에서 읽는 하느님 말씀은, 말하자면, 귀로 듣는 것이고, 밖에 나가서 자연 속에 들어가면 그 말씀을 눈으로 보는 셈이지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온몸을 움직여 걷는 것은 각기 특유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 인보성체수도회 전주 본원에서 시작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 한참을 걸어온 이 주교가 전주교구가 마련한 토지에 세운 임시농장 앞에 서서 새벽부터 되새겨온 성경 구절을 큰 소리로 외우고 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성당에 들어갔을 때나 산보 때 이러 저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대단히 큰 착각 속에 빠질 위험이 크지요.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베드로가 그 황홀경에 계속 눌러앉고 싶어서 한 말을 성경은 기록해 두었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드리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그런 환상을 여지없이 깨어, 온갖 골치 아프고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 세계로 내려가게 하셨지요. 기도와 활동은 날숨과 들숨처럼 번갈아 있어야 둘 다 건강하고 참 의미를 띠지요. 이 중 하나에 고정되면, 영적 생명도 죽을 수밖에 없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산보를 거르지 않으니까, 어떤 분들은 건강을 위해서 그러느냐고 묻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건강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건강요?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건강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일에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앞세울 것을 분명히 하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말씀이지요.
아침 산보에서는 성당에서 시작한 성경 묵상을 자연 속에서 계속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건강은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면 건강은 덤으로 오는 것 아닐까요? [가톨릭신문, 2022년 9월 25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3)
성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동반해 주시는 어머니 믿음
- 중학교 졸업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학생이 이병호 주교다. 이병호 주교 제공.
어린 시절에 저는 나바위라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전주교구 나바위본당은 한때 군산, 강경, 논산, 고산,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전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신자 수도 3100여 명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성탄 대축일이 되면, 여러 공소에서 교우들이 갖가지 짐을 이고지고 모여드는 모습이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축일이 되면 큰 무리를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머리 속에는 바로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밤 12시가 되어야 시작되는 성탄 밤미사 전에는, 모여든 신자들을 위해 연극 등 여러 행사를 했는데,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쯤 되던 어느 해에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상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들 가운데 1등 상품은 성경이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제가 1등으로 당첨되어 생애 첫 성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성경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느냐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중학교 1학년 때 소신학교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교구청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 전에 주교님과의 면담이 있었는데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몇 학년이냐?” “중학교 1학년입니다.” “아, 그래? 그러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너라.” 이렇게 해서 시험도 보기 전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한 주일도 못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장가를 안 가고 한 평생을 혼자 살수 있단 말인가! 합격했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 갓난아이 시절 부모님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이병호 주교 제공.
그런데 몸과 마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여서였을까요? 그로부터 일 년도 채 안 된 늦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이기 때문에, 미사는 새벽에 한 번 밖에 없었습니다. 집안 식구가 다 미사에 다녀와서, 그때부터 어머님이 짓기 시작하시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나 일터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지요. 그날도 미사에 다녀와서 기온이 아직도 쌀쌀했기 때문에 아랫목 따뜻한 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구석에 「준주성범」이라는 책 한 권이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료하던 김에 무심코 그 책을 집어 들고 읽었지요. 그런데 몇 쪽도 읽기 전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 영원한 가치, 죽음 후에 나뉘는 운명 등이 아주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공부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출세 아니라 천하에 없는 일을 이룬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학교에 가는 것처럼 책보를 싸 가지고 부엌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님께는 머리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가을걷이가 끝난 후라 집 뒤쪽에 잔뜩 쌓인 지푸라기 더미의 한 곳을 후비고 들어가 온종일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때의 심경으로는 인생살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대강 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 쯤, 책 보따리를 챙겨 들고 학교에 잘 다녀왔다는 듯이,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머리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님께선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 너 어디 있었는지 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동네 우물을 오가시며 엉성한 울타리 틈으로 저를 보시고도 모른 체하셨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갔다가 밤중에 돌아올 때면 친구의 어머님들은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자녀들을 치마폭에 감싸듯 해서 데리고 가시는데, 저의 어머님께선 저녁밥을 준비해 놓고 바느질을 하며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왜 안 나갔는지 아니?” 알 턱이 없어 그냥 서있는 제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당장 키가 한 자나 크는 것 같았죠…. 학교 간다면서 짚더미 속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저를 보시고도, ‘저 애가 저러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저라면 당장 가서 혼을 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고는 물었을 법 한데, 이도 저도 아니고, 어머님은 그날 저를 끝까지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그날의 그 장면은 지금도 어제같이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지금까지 그 특유의 미소와 함께 제 사제생활을 동반해 주시지요.
온샘 이병호(빈첸시오) 주교님은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온샘이 머무는 곳’을 향해 걷는다.
"언제나 변함없음", "본연 그대로의 상태" 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순우리말이기에 단어 자체를
한자로 옮기는 것은 불가하지만 같은 뜻으로는 不變(불변)이다.
‘온샘’이란 예수님, 우리에게 진짜 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1시간40분에서 2시간 남짓,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을 나서 전주천을 거쳐 치명자산성지 근처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춘다.
‘온샘이 머무는 곳’이라고 새겨진 자그마한 나무 현판이 눈에 띈다. ‘온샘’은 통일운동가 한상렬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병호 주교님의 호(號)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동참하셨던 이현주 목사님이 글씨를 써주셨다.
제주이야기를 듣는다.
무슨 말씀을 주실까?
첫댓글 아!!!
우리 주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