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통신 38> 모슬포의 슬픈 과거 (상)
문 창 재
^“제주도 넓은 벌에 바람소리 굳세이니 / 한 나라 젊은이의 호령소리 우렁차다”
^모슬포에 갈 때마다 어려서 친척 형이 부르던 이 노래가 떠오른다. 지게 작대기나 장작가피 같은 긴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제식훈련 행진동작을 거듭할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일제 때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모두였던 그는 6·25 전쟁 초기 군에 징집되어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훈련 중의 쇼크로 인한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 하고 의병제대로 귀향했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가 군에서 너무 많이 맞아 정신병에 걸렸다고 하였다. 배가 고파 취사장에 숨어들어 밥을 훔쳐 먹다가 걸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놀리거나 반말을 해도 그는 히죽이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섬답지 않게 벌이 넓은 모슬포에 갈 때마다 제 명을 살지 못 한 그 형이 가여워, 대체 훈련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건강한 청년이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이번 여행에서 그 실상의 일말을 짐작할 단서들을 얻었다. 옛 제1훈련소 정문 자리에 모슬포 옛 모습의 편린이 안내판에 흐린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6·25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대구에서 창설된 제1훈련소가 51년 1월 이곳으로 이동, 55년 4월 논산으로 옮겨가기 까지 연 50만 명의 신병을 배출했다는 짧은 부대역사에 비밀이 담겨 있다. 당시의 교육훈련 장면 사진 도판(陶板)에도 녹아 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그 짧은 기간에 50만 병력을 만들어 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전쟁이 터진지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 전선 사수에 나라의 운명을 걸었던 시기 대구에 급조된 제1훈련소는 이듬해 1월 22일 제주도로 훈련소를 옮겨가야 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대반격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초입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급히 쫓겨 내려온 1·4 후퇴 직후였다.
^쫓기듯이 제주도로 피란을 온 훈련소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옛 사진을 보면 모슬포는 거대한 천막도시였다. 일망무제의 벌판에 빼곡하게 들어선 비닐하우스를 연상하면 좋으리라. 군 관계 상주인구가 10만에 이르렀다. 훈련병 숙소로 쓰인 천막이 몇 겹으로 줄지어 선 빛바랜 사진 속의 훈련병 생활상은 몇몇 경험자들 회고담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밥그릇과 수저가 없어 그릇 하나에 밥과 국에 반찬까지 한꺼번에 받아 군번표로 밥을 떠먹었습니다. 국물은 마셔야 했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몸 씻기는 사치스런 생각이었고, 먹을 물도 모자라 훈련 받을 때 늘 목이 말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목욕을 못 하니까 땀에 전 몸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내복 속에 굵은 이가 들끓어 짬만 나면 이 잡는 게 일과였어요. 누구 이가 더 큰지 내기를 했다니까요. 그러고 나면 중대본부에서 DDT 살충제를 온몸에 뿌려주었지요.”
^“무기가 부족해 훈련병 다섯에 M1 총이 한 자루씩 지급되었습니다. 피복도 부족해 작업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태풍 철이었던 모양입니다. 바람에 천막이 날아가지 않도록 밤새 천막자락을 붙잡고 앉아 밤을 샌 날도 있었습니다.”
^“천막 내무반은 흙바닥이었어요. 거기에 가마니를 깔아 먼지가 풀풀 났지요. 전등이 어두워 밤에는 고향에서 온 편지도 읽지 못했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같은 내무반에 사는 것도 봤습니다. 장인의 출생신고가 잘못 되었는지 같은 날 징집이 되어 같은 중대로 편성이 된 것이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허허벌판에 줄지어 늘어선 천막도시는 장관이었다. ‘강병대’(强兵臺)라는 기지 이름이 새겨진 정문 위병소를 들어서면 어느 천막이 어느 부대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강병대 본부, 교도연대, 경비대, 공병대, 헌병대, 군악대, 보육대 등 여러 단위부대에 수송학교, 하사관학교, 같은 교육기관, 제5~9연대, 제1~5 신병숙영지, 제1,2 하교대 숙영지 등등 그 많은 천막을 어떻게 다 찾아 다녔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드넓은 모슬포 벌판에 다 소용할 수 없게 되자 인근 안덕면이나 중문 서귀포, 멀리 제주시 구역까지 천막촌이 들어섰다. 각급 부대 정문과 철조망 주변에는 배고픈 훈련병들에게 찐 고구마며 보리개떡 같은 먹을 것을 파는 행상들이 줄을 이었다. 부대에서 나오는 잔반수집자들과 군납업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뭍에서 온 면회객을 상대로 한 인사 청탁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정문 부근의 다방이었다.
^매일 2,000명의 신병이 배출되고 입소한 모슬포는 잠들 틈이 없는 급조 군사도시였다. 그 많은 인원은 해군 LST 편으로 수송되었다. 출소 장병과 입소 장병들이 교육장을 오가며 부르는 군가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들이 제주도에 들고 나는 교통편은 주로 해군 배였다. 산방산 아래 화순 항에는 목포에서 오는 대형 LST가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급조되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고 가는 해군 배편으로 육지 문물과 전쟁소식도 묻어 왔다. 비바람이 심한 날은 배가 뜨지 못 해 큰 혼란이 빚어졌다. 병력소모가 심한 전선에서는 빨리 신병을 보내라는 독촉이 불같은데, 며칠씩 배가 묶이면 훈련소 지휘관들은 진땀을 흘렸다.
^신병수송에만 차질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양곡과 부식, 피복과 총탄 같은 군수품이 들어오지 못 해 아우성이었다. 그늘에 버섯이 자라나듯, 물자가 모자라는 곳에 부정과 부패가 싹트기 마련이었다. 훈련소에서 밀반출되는 군복 내복 양말 장갑 같은 군수품도 부대 주변에서 버젓이 밀거래되었다.
^훈련소장과 중요 간부들이 연루된 보급품 부정은 훈련병들의 배를 곯렸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져 아들을 군에 보낸 사람들은 정규군대에서도 그 꼴이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때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에게서 청렴하기로 유명하던 이응준 장군에게 훈련소장을 맡아달라고 조른 삼고초려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우시겠지만 훈련소장직을 맡아주실 수 없겠습니까.” 창군원로인 이 장군은 소장으로서 육군대학 총장 자리에 있었다. 대 선배에게 그런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도리가 아니었지만, 부정부패를 해결하는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노골(老骨)이나마 헌신해야 하겠지요.” 선뜻 부탁을 들어준 데 대한 고마움에 보답하는 뜻으로, 즉시 대통령에게 이 장군의 중장진급을 상신해 별 하나를 더 달아 주었다 하였다.
^신병훈련은 16주 과정이었다. 미군 신병훈련 커리큘럼을 본받은 것이지만 전황이 다급해지면 사격술과 총기조작법만 3~4주 가르쳐 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빨래였다. 모슬포에는 냇물이 없어 물이 귀하다. 훈련이 없는 일요일에 지하수 우물가에 몰려가 벼락치기로 옷을 빨아 입었는데, 3,4주 만에 훈련이 끝나 급히 전선에 투입되는 훈련병들은 땟국에 전 묵은 빨래를 더블 백에 넣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못살포’ ‘못쓸포’ 같은 말들이 생겨났다.
^훈련병들 입에서 그런 말이 오르내리는데 주민들이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부녀회원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남자들의 서툰 동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급히 빨아 말린 옷을 입고 그들은 전선으로 떠나갔다.
^아무리 고생이었어도 지나간 날은 다 그리운 법인가. 그 시절이 그립다고 모슬포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모슬포를 찾아드는 관광객 가운데 상당수는 가파도 마라도 관광이 목표라지만 지난날의 추억에 이끌려 옛 정문 자리를 찾아보는 사람도 많다.
^더러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보러 다니던 강병대 교회를 찾는 이들도 있다. 대정읍 상모리 정문 터 바깥 대로변에 있는 강병대 교회는 아직 옛 모습 그대로다. 지금은 현지 공군부대 교회가 되어 공군이 관리하고 있는데, 그 덕분에 깨끗한 외양을 유지하고 있어 방문자들을 반갑게 한다. (2018, 4, 9)




첫댓글 나는 1964년 겨울 논산훈련소 28연대의 훈련과정에서 체험했던 잊지못할 사연이 많았는데 이보다 무척 어려웠던 10년 전 전쟁당시 제주에서 있었을 상황들이 글처럼 충분히 상상된다. 그러한 극복의 역사에서 일구어 놓은 오늘의 대한미국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글의 필자가 보고 싶고 (하)편이 기대된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모슬포의 슬픈 과거(하)편이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