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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꼴베 순례이야기
조선인학교. 보통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들어오는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고 징용징병이 됐다. 더 멀게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마찬가지. 그렇게 일본으로 들어가서 일본 전역 곳곳에서 제철과 탄광의 막일을 해야 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착취와 약탈을 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패망에 이르자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도쿄의 한일관계사사료관에 가면 심지어 그 수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대등할 정도였다는 도표도 나온다. 해방이 되고 그동안의 눈물과 설움을 딛고 고국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다시 일본 전역에서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역순의 행렬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만을 간직한 채인 우키시마호의 폭침은 불과 하루면 건널 수 있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제야저제야. '조금 더 여기도거기도 좋아지면 가자.'던 것이 벌써 세대를 두 번이나 지났다. 시모노세키의 달동네인 똥굴마을에 들어서면 징용과 징병의 역사와 위안부, 그리고 이념과 갈등의 역사도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들이예요.'라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렇게 아들세대에 이어 손주세대가 됐다. 그래도 말만은 잃지 말자며 세웠다. 학교를. 서로 사상은 달라도 일단 언어는 배우고. 철저히 이용한 일본은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북녘도 남녘도 무관심한 것은 마찬가지. 저마다 먹고살기 힘들 때는 그래서려니 하지만 이제 나아져도 굽어보거나 넘어보기를 주저하고 꺼려한다. '내 소명인 것 같아요.' 예수회의 일본인 나카이준신부의 이 말이 마음속을 계속 울리는 것은 이방인[Gentile]의 친절함[Gentle]을 보기 때문이다. 그가 손에 든 '조선어학교 이어가도록 살펴주세요.' 하는 전단지가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 것도 어쩌면.
달동네 똥굴마을에 모여든 사랑들은 모두 제각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심장에 수녀들이 산다. '작은자매회'. 예수의 원형과 프란치스코의 전형과 샤를드푸코의 전형을 따르는 수녀들은 '가난'이 가장 큰 키워드다. 빅토르위고가 말하는 "가난한사람들"이 압권인 것은 가난한 해안가의 어부 가족이 옆집 과부의 두 아이를, 그것도 그 중 한 아이는 이제 갓난 아기를 아내가 몰래 입양해 다락방에 숨겨놓았는데,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남편이 식사중에 고민하고 망설이다 죽은 옆집 과부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담배나 술까지 끊을테니 아이들을 거두면 어떻겠냐.'고 하고, 그러자 아내는 눈물섞인 웃음을 보이며 말없이 다락방을 보여주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단편이지만 인상적이다. 딱 그 말처럼 작은자매회의 '작은'은 '가난'을 담고 있다. 스스로도 가난하고 이웃들도 가난한데 그렇지만 보듬으며.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모습이 똥굴마을의 심장에 있다. 그 심장이라고 하는 곳은 똥굴마을이 똥굴마을인 이유이다. 비만 오면 온깆 오폐수를 가지고 내려와 생긴 물웅덩이. 그래서 붙은 똥굴마을의 그 심장부에 수녀들은 움을 텄다. 수녀들이 말하는 한 사람 막달레나의 얘기가 삶의 표양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연은 모르지만 달동네에서 정붙이고 남편을 만나 소박하게 살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오로지 홀로가 됐다. 달동네에서조차 이념을 가지고 다투는 틈바구니에서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신앙. 그런 그녀에게 말벗이 된 것이 수녀들이다. 묘한 아이러니는 쌀이라도 보급이 되면, 그것을 끌개에 끌고 수녀들에게 건넨다는 것이다. '굶어죽을까봐 [?]' 바로 여기에 가난한사람들의 핵심이 있다. 가난이 분명 시련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가난할 때 서로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나눔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건네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으뜸의 것을.
조세이탄광/다가와탄광/히지마탄광. 세 곳 다 일본의 본토건 섬이건 타향살이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가득했다. 조선인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내선일체라는 허울은 어김없이 적용됐다. 도쿄의 한일자료관과 나가사키의 평화사료관을 가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도표가 나온다. 다시금 씻고 봐도 여전한 그 도표에 당시 일본 내 조선인노동자들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된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탄광/제철/무기 등 강도 높은 곳에서의 노동이었다. 속아서 온 조선인노동자들에게 퇴로는 없었다. 언제까지. 강제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죽어나갈 때까지. 그러다가 터널이 붕괴되고 바닷물이 들어가 모두 익사한 곳이 조세이탄광이다. 당시 어린아이였을 법한 마을주민 중 한 일본인여성은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했던 것인지를. 그러면서 말미에 덧붙인다. '마지막 유해가 나올 때까지라도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 가리고 덮으려 하는 여느 일본인들과는 다르다. 독일 다하우마을의 이장과 비슷하다. '우리의 수치를 가리고 덮으려 마세요.'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지금은 이름도 성별도 국적도 잊힌 채 바닷속 지천을 맴도는 넋이지만, 그렇게 고국의 가족들조차도 그저 쉬쉬 하며 마음만 쓸어내리고서 이어진 세대는 까맣게 그런 사실도 모르는 채 살아가지만, 헤집고 찾으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계속되는 기억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꿈꾼다면 적어도 그래야 한다. 다크투어가 무겁지만 의미있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참 잘했다.' 하는 치유와 힐링의 길로 접어드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우리가 계속 간다면 가리고 덮으려 했던 이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현대의 어린 지성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 때 광경을 목격한 마을주민처럼.
기억[AnaMNesis]. 그것은 단순한 기억[Memory]과 상기[ReMember]나 회상[ReMiniscence]과 다르다. 예수는 '나를 기억[AnaMNesis]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한다. 조성만열사 삼십주기가 끝나고 추모를 마감한다는 소식에, 서울대 수업을 가니 교수가 격앙된 목소리로 '너라도 이어야 하지를 않겠냐.'고 해서 다시 시작했다. 그 때 한 말이 '우리는 예수를 삼십년만 기억합니까.'였다. 그렇게 몇 년을 이어가는 동안 도리어 사분오열됐던 이들도 죄다 모였다. 자신있게 잇겠다고 한 그룹에 의해 또다시 사분오열의 위기를 맞고는 있지만, 그나마 명맥은 잇는 듯하다. 조세이탄광은 처음에 흙으로 그리고 시멘트 부어서 덮었다. 소학생이던 전석호는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잃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물속에 갇혀있다. 이를 본 동료 야마구치다케노부는 죽을 때까지 친구가 아버지를 찾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에 함께 한 이노우에요코. 그들이 만든 단체의 이름이 어쩌면 약간 우스꽝스러울 수 있다. '조세이 탄광을 역사에 새기는 사람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 이름을 짓기까지 얼마나 목적의식이 분명했는지를 알아차리게끔 한다. '잘한 것은 바위에 새기고 못한 것은 모래에 새기는' 세태 앞에서, 주변의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망자에게 이제 그만 지천에 묶여있지 말고, 천상낙원의 기억[AnaMNesis]으로 가게 하려는 것이다. 유족들도 포함해서. 불교의 스님들도 그래서 영산재를 올린다. 우키시마호가 폭침된 곳의 해안가에서 이를 파헤친 역사교사가 후일 스님이 됐다. 물으니 '점점 잊혀져가는 기억에 나만이라도 이들을 기억해줘야 그래도 위로되지는 않겠느냐.'가 스님이 된 이유이다. 반짝 하고 마는 기억이 아닌 맘에 새겨 넣는 기억을. 기억에 담는 예수도 있고 부처도 있고 성현도 있고 이들도 있다. 그래야 마땅한 일이니.
수평사[水平社]의 얘기는 동서의 여러 얘기들과 닮은 꼴이 많다. 우선 시마바라의 농민항쟁에서 아마쿠사시로가 사용했다는 진중기[天草四郎陣中旗]와 비슷하게 형관기[荊冠旗]를 볼 수 있다. 진중기에는 두 천사가 예수의 성체와 성혈을 받드는 모습의 형상과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사는 찬미받으소서.[LOVVADo SEIA O SÃCTISSIMo SACRAMENTO/Louvado Seja O Santíssimo Sacramento]'라고 적혀있다. 비록 형관기에는 다른 문구가 없지만 두 개의 가시관 모습의 형상은 한 눈에 예수의 가시관임을 알게 한다. 그 중 하나는 스스로 닮은 모습으로 살겠다는 다짐이겠지. 진중기를 그린 화가 야마다에몬사쿠는 본래 가톨릭이 아니었고 시마바라 농민항쟁 때 배반했다. 물론 살아남은 그로 인해 당시의 상황이 구체화되기도 했다. 형관기를 담은 작자 사이코만키치[西光万吉]는 정토진종[신슈] 서광사에서 태어나 오히려 불교에 가깝다. 그런 그가 만민평등의 형평운동을 가톨릭의 기치에 따라 주창한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놀랍다. 하지만 이차세계대전의 끝자락에 돌연 변절하면서 천황사상으로 돌아선다. 선봉에 선 주창자들의 배반과 변절은 두고두고 이렇게저렇게 해석될 것이니 차치한다고 하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부락민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다. 조세이탄광에서 수몰사고가 났을 때 거의모두 덮으려고 쉬쉬했지만, 바로 이 수평사만큼은 진실을 밝히기를 원했다. 물이 높낮이가 없는 것처럼, 그 형평의 잣대는 이민자인 조선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보면 수용소로 함께 간 노동사제들의 행보와 그로부터 비롯된 강생신학, 그리고 뒤이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도 닮은 꼴이다. 내부의 배신자와 변절자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그 초심만큼은 적어도 가치있게 우리에게 비쳐지는 것은, 그로 인해 생생한 기억을 더듬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함도[하시마]에 가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들은 '스고이[굉장해]'를 연발한다. 해설사는 신이 나서 그런 비슷한 얘기들로 추임새를 유발한다. '당시에 이런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근대문명을 이끈 미쓰비시[三菱]는 대단해'. 바다의 가는 길목 오는 길목 안의 미쓰비시의 군수공장과 전함공장을 보면서 더더욱 놀란다. 몇몇 일본인들의 침묵. 몇몇 한국인들의 침묵. 이름처럼 못된 마름[菱]은 바다와 갯벌을 간척해 땅을 만들어 농투성이들을 소작에 붙이고, 결국 빚의 고리로 이끌어 징용으로 연행한다. 더러는 불순하다는 이유로 강제연행되고. 이어지는 탄광노동. 무슨 '빠삐용' 영화에나 나올 법한 탈출이 감행되는데, 무려 절반도 넘는 숫자가 바닷가 물개구멍으로 시도하다가 죽거나 맞거나 더 가혹한 탄광으로 이끌려, 살아나온 사람의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나가사키는 어떤가. 아주 먼, 하지만 잊어서는 안될 임진왜란/정유재란 시대에 끌려온 사람들. 그런가 하면 고토섬에서는 유배로 떠나와 가난으로 점철된 가쿠레기리스탄이 있고, 그 안에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옹기/종이/기와 등의 파편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역사 안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비켜갈 수 없었던 원폭이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굳이 말한다면 예수칠고/성모칠고 등처럼 칠고 정도라고 하면 약과일까. 전쟁/노예/가난/유배/박해/징용/원폭. 일본 어디를 돌건 마찬가지겠지만 '스고이[굉장해]'의 이면에 '히카게[어두움]'가 있다. 성당 도처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예수성심이다. 고통의 되물림[대물림]을 인고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수성심 곁에 흔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성모성심. 예수통고[Passion] 곁의 성모통고[Com-Passion]. 그것이 아닌 무염[無染]과 희망과 사랑의 성모자가 있다. 그래서일까. 무겁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그들이 고통의 되물림[대물림]이 아닌 평화의 되물림[대물림]인 것을 깨닫게 된다.
동선의 흐름에 있는 후쿠오카/나가사키/가고시마/구마모토 지역은 여러 면모에서 우리의 역사와 오버랩된다. 임진왜란부터 변함없이 있었던 정한론[征韓論]의 주무대이기도 했고, 포로들로 끌려간 장인들이 도자기로 일본을 번셩하게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첫자락부터서는 이 지역의 너나 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땅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조선땅을 사들여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다. 사분의 삼을 가져다바쳐야 하는 소작은 가난한 조선인들을 빚더미에 안게 했다. 이 지역의 수많은 지명들은 당시 소작을 붙이던 이름들과 매칭된다. 그렇게 부를 쌓은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앞을 다퉈 식민건설에 앞장서고 탄광사업/철강산업/무기제조 등에 손을 댄다. 가난한 농민은 빚더미 안에서 징용의 노동자 신세로 나앉고 객지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소작쟁의 등으로 인한 불순분자로 찍히면 막장으로 향했고. 그렇게 노예로 삼았고 박해로 죽었고 수탈로 망했고 노동에 시달린 선조들이 묻힌 곳에 괴롭힌 사람의 이름이 담긴 지명들만 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배상도 보상도 주어지지 않은 채 세월은 흐르고 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정치적 무게감을 지닌 자리를 변함없이 꿰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일까.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하야오의 '징용에 사죄하고 위안부 뉘우치라.'는 수상소감이 더 깊이 와닿는다. 비록 소설이지만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쥐어준 디뉴[Digne-les-Bains]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용서의 도시로 번모해 남프랑스 어디를 가나 '디뉴가는길'이라는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듯이, 전범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도시와 기업의 이름들은 언제쯤 아름다운 이름들로 변모할 수 있을까. 우리의 순례의 발걸음은 어쩌면 우리의 변화와 그들의 변화를 꾀하는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걸으면 곱씹는.
'평화, 예수의 이름[La Paix, C'Est La Paix, C’Est Le Nom De Jésus]'이라는 표현을 프랑스에서 곧잘 한다. 이병호주교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예수의 말씀을 누차 강조한다. 김성환신부가 말하는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의 가치도 분명 그 범위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평화순례는 그런 가치의 공통분모에 있는 사건과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평화라는 추상적일 수 있는 가치를 체화하는 기회이다. 양운기수사는 다른 여행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라고 한다. 장현근선생도 마찬가지다. 놀러가는 것이 아니다. 쇼핑하는 것이 아니다. 돈벌려는 것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는 것에 따라 여러 차례 평화순례를 이렇게 또 저렇게 하면 조금은 그 기운이 느껴진다. 뤼순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안중근의사의 교수형자리. 그리고 여러 차례 공사중이어서 못본 곳에서, 옛 사형수들의 죽음 뒤에 독방보다도 조그마한 나무통에 꾸부정하게 앉은 채로 묻었다는 모습의 재현을 보면, 평화를 갈구하던 안중근의사도 그렇게 여전히 있으면서 '너무나 오래 꾸부정하게 움츠리고 있어서 팔다리도 목허리도 너무 아프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곳에 서면 절로 성호도 그어지고 절로 기도도 토해진다. 허용되는 범위에서 아주 가까이 있을 법한 안중근의사의 무덤을 위해 여기저기를 헤매기도 하고. '찾아야하지. 찾아야겠다. 찾아야한다.' 하면서. 문정현신부/문규현신부 등과 함께 한 만주순례에서 '진지하게. 진지하게.' 찾았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받는 두 형제신부의 바람도 '평화를 찾아야지. 평화를 찾아야지.' 하는 것 같다. 올해 평화순례그룹과 함께하는 상해/항주/남경 평화순례. 사라질 뻔했던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거리의 기운도 느끼게 될 것 같다. 거기를 김대건과 안중근과 로베르가 평화를 생각하며 걸었던 까닭에.
보통은 여러 차례 혹은 수십 차례 순례건 여행을 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하지만 평화순례는 다르다. 하나씩하나씩 새로운 내용이 곁들여진다. 때로는 그것이 매우 놀라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전에 참여했던 순례자가 다시 참여한다. 지금도 자취가 남아있는 상해임시정부청사와 항주임시정부청사는 실은 더 이전의 전신이 있었다. 묘하게 이번 평화순례에서는 두 곳에 갔다. 항주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인 여관[호텔]은 내부의 중랑까지도 들어갔다. 다음에는 여기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잠시 몸을 뉘였을 곳에 기대기도 하겠지.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은 사라졌기에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김가항성당이 공사중이어서 찾은 우캉맨션. 가는 길에서 수많은 인파의 난징동루도, 노르망디와 오봉막쉐를 닮은 프랑스조계지의 옛정취 가득한 거리를 보면서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이자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거리를 만끽한다. 그 거리의 이름은 다양했다. 수녀들거리[Route Des Soeurs].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녀회가 있던 곳에 떼이야르드샤르댕의 누이인 프랑수아즈도 거기서 자신의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다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뒸다. 김신부로[金神父路]. 여러 중의적인 이름. 우리로서는 김대건신부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의 로버트[金河伯]신부도 떠올릴 수 있다. 프랑스조계지를 구축하는데 기여한 그는 김대건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어쩌면 자신의 성을 김[金]으로 한 것도 그런 연유인지도 모른다. 또다른 프랑스식 이름인 로베르거리[Route De Robert]. 이 역시 앞선 로베르와 중의적일 수 있지만, 또다른 이름의 로베르[Robert Jacquinot De Besange]신부를 떠올릴 수 있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는 거룩함을 거리는 기운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수만의 중국인들은 일제의 상해학살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로베르신부가 프랑스조계지에 마련한 안전지대[The Shanghai Safety Zone / 南市难民区] 덕분이었다. 외팔이신부인 로베르는 이후 하나의 모델[De Besange Model]이 됐고, 남경의 존라베의 안전지대의 모범도 됐다. 그래서일까. 그를 기리는 중국인들은 천주교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황묘에 모시고 기억한다. 그런 거리이름이 지금은 서진로[瑞金路]로 불린다. 근대혁명의 모태가 된 루이진시[瑞金市]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최초의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있던 곳은 서김이로골목[瑞金二路 48[50]弄]이 되는 것이다. 이곳은 주은래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혁명을 준비하면서 사람들과 이렇게저렇게 모이고 지하서클을 펼쳤던 곳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주은래의 동상이 서 있다. 주은래는 누구인가. 남편인 주은래[周恩來]가 연출하고 아내인 등영초[鄧穎超]가 배우였던 작품이 안중근이고, 거기에서 싹튼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주은래는 말한다. '안중근이 혁명의 효시이다.'라고. 그런 깊은 인연들을 떠올리며 그 거리를 보면 건물은 사라졌지만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그려진다. 김대건신부가 조선입국을 생각하며 걸었을 거리. 로베르신부가 조선도움을 모색하며 걸었을 거리. 안중근의사가 조선앞날을 걱정하며 걸었을 거리. 떼이야르수녀 가난백성을 보살피며 걸었을 거리. 백범김구선생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걸었을 거리. 주은래선생이 조선사람을 우러르며 걸었을 거리. 로베르신부가 환난백성을 보호하며 걸었을 거리. 이 모든 것이 뭉뚱그려 있는 거리의 조그마한 골목길 한 귀퉁이는 루이뷔통의 난징동루, 색계로서의 우캉맨션 등에 비견도 안될 정도의 거룩함이 깃든 명품거리[골목]가 아닐까. 그 기운을 한껏 그리고 함껏 들이킨다.
일본 후쿠오카의 다가와탄광에 가면 마치 '다가와[다가져와]' 하는 것처럼 일제 전범기업의 착취의 전형이 그대로 드러난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갱도, 사십오도에 달하는 뜨거운 갱도 안에서 젖가슴을 드러내는 수치심조차 잊은지 오래인 여성탄광노동자. 일본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징용인 그곳에서, 살아남은 노동자가 당시 상황을 묘사한 만화같은 그림이 있다. 그는 말한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내서 알리긴 했지만, 한가지 거짓말을 하고 말았네요. 그곳에는 단 한줄기 빛도 없었는데, 빛을 그려넣었으니.' 루쉰은 "외침[吶喊]"의 '철방[鐵房]'에서 사방이 철방인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주저앉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총알 한 발을 쏴 빛이 스며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거기에 펜이든 칼이든 총이든 또 한 발 또 한 발 쏘면 한줄기 빛은 한다발 빛이,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길이 된다. 길은 없었지만 걷는 이들이 많아 길이 갖춰진다. 루쉰에게 안중근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만들어낸 장본인. 거기에 하나둘 자신의 주어진 역할 안에서 한 발 한 발 빛을 일구어낸 이들. 루쉰을 여러 차례 만난 이육사도 그렇게 자신을 바쳐 길을 낸다. "광야에서" 외친다. '비로소 길이 열렸다.'고.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는 한 발 한 발 쏘아올린 이들의 영과 혼과 백과 넋과 얼의 마음.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브가 "I AM"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었을 때 차라리 날아오르면 보이는 그대로가 다 길인 세상'에 살고 있다. 앞선 이들이 빛을 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꿈은 현실이 되고[Dreams Come True]. 단 하나. 진 빚은 갚아야지 않겠는가. 천국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르겠다던 안중근을 동토의 땅 영어의 몸 속으로부터 나올 수 있게 하는 것. 그렇게 신채호를. 그렇게 이회영을. 또 그렇게 이육사를.
'무엇이 제일 감동이었습니까.'라는 물음에 어른이며 아이이며 하나같이 '손을 흔드는 것에 화답한 거요.'라고 말한다. 올해 만주순례 안에서의 일이다. 평화순례와 비슷하면서도 김대건신부와 안중근의사에 집중한 성지순례의 성격이 담긴 만주순례는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까지, 또 옛 독립투사들을 적어도 해마다 기억하자는 뜻으로 하는 것인데, 올해는 고사리손의 아이들과 했다. 진안산골마을 아이들과. 아이들은 해맑았다. 그리고 장난꾸러기들이었다. 그런 아이들과 압록강변에서 배를 탔다. 아이들은 아주 가까이에 다가가면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센느강변에 나와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유독 손을 흔드는 것은 우리 아이들. 그러면 강변의 외국인들도 손을 흔든다. 웃으면서. 그리운 광경을 그렇게 아이들 모두가 만든다. 그런데 여기는. 초소와 철망만 보이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그래도 혹여 초소 너머에 있을 마을 너머에 있을 인기척을 향해 목놓아 외친다. '안녕하세요.' 보통은 망원경으로 희미하게밖에 보이지 않던 곳을 가까이 따라가자 육안으로도 보이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간다. 연인인 듯한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강변을 따라 간다. 그 가까운 광경에 아이들은 더욱 목놓아 외친다. 연신 손을 흔들면서. 놀라운 광경은 여기에. 뒤에 탄 여인이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수십번 다녔다는 인솔자도 처음 보는 이 광경에 놀란다. 배 안의 아이들도 어른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다. '손을 흔들어줬어.' 순례가 관광과 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묘미이다. 볼거리 먹거리 정도가 아닌 사람의 향기에 취하는 지경. 여기에 이르면 중독도 되리라. 평화순례의 일본순례가 기획되고서 망설여졌다. 과연 몇이. 그런데 공지가 나가기도 전부터 신청하더니만 하루만에 마감됐다. 값도 만만치 않은데. 이유는 뭘까. 사람이 고픈 것이다.
'책자에 성경과 십자가 사진은 왜 넣은거죠.' 교회=평화 공식이 반드시 맞는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리지샹위안소의 대목에 넣은 사진을 두고 한 말이다. 그 사진 위에는 수련수녀였다가 강제연행된 네덜란드의 루프오헤른여사의 사진이 있었으니, '루프오헤른여사의 것이냐.'는 덧붙은 질문에, '아닌 것 같다.'고 하자, 더 격앙되게 '그러면 도대체 왜 넣은 거요.' 하니 '리지샹위안소에서 본 것을 오버랩 차원에서 넣었을 따름'이라고 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리지샹위안소에서 유심히 다시 확인한 성경과 십자가 아래는 '레이구이잉[雷桂英]이 간직한 성가와 십자가'라고 돼있다. 레이구이잉여사는 어린 시절 납치돼 리지샹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살다 탈출한 여인이었다. 루프오헤른여사도 레이구이잉여사도 박영임여사가 처음으로 고발한 것에 힘입어 오십년간의 침묵을 깬 용기있는 분들이다. 둘 다 천주교신자이다. 교회=평화 도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어쩌면 더한 것이다. 이제민신부의 "교회, 순결한 창녀"라는 책이 논란에 휩싸인 때가 있었다. 교부학자가 처음 던진 말인데도 불구하고. 수련수녀였다가 앳된소녀였다가 끌려가 성노예로 살던 여인들은, 처음 끌려가면서도 성당 안 성모 안에서 간절히 기도했고, 영화 "난징, 난징"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듯 모두의 죽음을 피하기 위한 대속의 희생양으로 끌려간 성노예의 어두운 단칸방에서도 성모 안에 간절히 기도했고, 그 시절이 지난 뒤에 계속 짓이겨오는 트라우마에 '용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용서'를 곱씹으면서도 성당의 성모 안에 간절히 기도했다.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같은 처지의 무염시태 성모를 위로처로 삼아. 그러니 이들을 통해서 침묵하던 죄많은 교회는 비로소 정화되는 것이다. 이들로 인해서 마침내 교회=평화 방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파편들의 조합은 놀랍게도 얘기들을 하나로 구성한다. 히라도의 네덜란드상관과 사세보의 네덜란드상관과 나가사키 네덜란드상관은 그저 유럽으로 열린 조계지나 무역항의 고풍스런 멋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끌려간 아이들과 처녀들은 거기를 통해 마카오와 자카르타 그리고 고아까지 거쳐 유럽으로 팔려갔다. 흑인노예의 십분의 일 가격에 팔려간 노예들은 막노동 성착취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세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 역사는 되풀이됐다. 징용과 징병과 위안부. 양칠성의 삶은 모두를 담아낸다. 완주 삼례에서 나고자란 그는 가난과 허기에 쌀수탈의 일본배를 탔다. 군무원에까지 이르렀으니 일본인 앞잡이 노릇까지 한 셈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히라도에서 자카르타로 간 그는 수용소 감시원 역할을 한다. 그가 태도를 바꾼 것은 그 즈음. 인도네시아 강제수용소 안에 징용된 오라버니를 보러 온 여인에게 반하고 후에 결혼까지 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후 큰 뉘우침은 그를 인도네시아 해방의 길로 이끈다. 제이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그에게는 늘 전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재건에 맞서 인도네시아인들과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용기있는 행동을 한 그는 마침내 붙잡혀 총살된다. 하지만 전범을 조사하던 일본인 여교수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현지의 진술들에 의해 놀랍게 밝혀진다. 그를 높이 사고자 꺼낸 얘기들이 아니다. 타협과 야합에 있어서 오십보백보인 시기에 회심의 계기는 누가 만들었고, 또 그 회심은 어떻게 굳은 결심으로까지 나아가게 했는가에 주목할 따름이다. 시대가 만든 흑백논리를 넘어 인간의 여리되 추악한, 하지만 살피며 뉘우친 그 마음 안에서 내 마음 깊이를 들여다보는 것에 주안점이 있을 뿐이다.
야세노바츠. 난징, 731, 다하우, 아우슈비츠 등은 그래도 곧잘 알지만 야세노바츠는 잘 모른다. 이차세계대전 때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의 정교도인과 보스니아의 이슬람인과 여기저기의 유대교인을 모아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던 수용소이다. 더러는 아우슈비츠보다 더 끔 찍했고도 잔인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범인 크로아티아 지도자 우수타샤라는 조직의 안테파벨리치에 의해 자행됐다. 독실한 천주교인인 그의 괴뢰정권은 수도자까지 동원해 행정업무와 색출작업에 가담케 했다. 유럽의 양차대전이 이념갈등과 민족갈등을 표면에 내세웠다면 인종갈등과 종교갈등은 속내에 숨어있었다. '이참에'라는 미명 아래.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들 오명은 남는다. 그래서 '가담'이 아닌 '침묵'도 죄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 순례의 '잘못이오[Pénitence]'와 한반도 순례의 '내탓이오[MeaCulpa]'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순례가 '내땅걷기'가 아니라 '네땅보기'의 의미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먼저 용서를 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에 그리고 메주고리예에 왜 성모발현과 성모성지가 많은지도 새삼 알 것 같다. '평화평화평화[MirMirMir]'라고 되뇌었다는 성모. '우리는 비교적 천주교인이 많지만, 그렇다고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확실히 평화순례예요. 그리고 아픔이 있던 곳에 평화를 심는 것이 우리의 일이예요.' 김성환신부의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의 평화순례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야세노바츠이기도 하다. 일본의 나가사키는 불교의 기운도 전역에 비해 사못 다르다. 지장신앙이 거의 곳곳에 나타나지만 나가사키에서는 관음신앙이 상당해진다. 관음성모의 모습이 보여지기도. 불교의 관음. 천주교 성모. 정교도 성모. 그 공통분모는 '어머니'. 달리 말하면 '평화'. 수감과 학살의 현장이 반성과 기도의 안에서 얼룩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눈물은 닦아야 도리가 될 것이다.
'야키.' 나가사키의 숱한 얘기들의 파편은 아는 것들의 좀덜 혹은 좀더 하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치 금맥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가사키 북녘의 도자기들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 전혀 없던 일도 아니니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야키'로 불리는 나가사키 북녘의 도자기마을이 파면팔수록 종전에 풀리지 않던 얘기들의 열쇠가 되고 도저히 맞춰지지 않던 퍼즐의 중요한 한 쪼가리가 나온 것처럼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어쩌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못다 푼 얘기들의 단초나 단시가 될수도. 도자기를 굽던 도공들이 끌려왔다. 토기도 도기도 아닌 옹기와 자기를 위해. 그리 온 도공들은 왜에 순응한 순왜와 왜에 저항한 항왜로 나뉘는데, 항왜의 삶은 처참했다. 갇혀서 오로지 갇혀서 도자기를 구워내야 했기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도망쳐서 숨어들 수도 없었다. 그런 그들 중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세례받은 이들이 있다. 유일한 도피처였다. 예수회선교사들은 그런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닥친 것은 박해였다. 가혹한 박해를 피해 점점 더 산속으로 해안으로 숨어들고, 도저히 안되면 섬으로까지 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인 도자기로 삶인 신앙인을 고백했다. 관음성모가 그것이고 누운비문이 그것이다. 더러는 목숨을 잃었고 더러는 유배를 떠났다. 선교사가 없던 시절. 그들 내에 어른[미즈카타[水方]/공소회장]을 세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가쿠레기리스탄. 그리고는 몇백년이 흘러 새로운 선교사들이 왔고, 기도와 믿음을 조합해서 그것이 그것임을 확인했다. 잠복그리스도인. 돌아왔느냐 머무르느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그 얘기들을 풀 귀인들을 만났고, 모두에게 거절한 바들을 풀어주겠다고 하니, 진정성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만 남았다.
얘기를 좀 더 풀면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 가라쓰로 끌려온 도공들은 말 그대로 항왜였다. 백여명 가까운 장인을 포함한 이들은 선교사들을 접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하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오름가마에도 숨어보고 산골깊숙이도 숨어보고 해안절벽에도 숨어봤다. 더러는 히라도와 이키츠키 그리고 고토열도 등의 섬으로 멀리 더 멀리 떠났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로서는 어김없이 붙잡힌 그들에게 선택의 시간이 주어졌다. 순교냐 배교냐. 배교한 이들은 독실한 불교신앙인이자 고니시유키나가와 충성경쟁이 붙었다가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가담해 승리한 가토기요마사의 번에 속하게 된다. 불교 일연종으로 개종당한 그들은 오카와치야마 깊은 산골에서 감옥 아닌 감옥을 체험한다. 삼면이 험한 산세로 둘러싸인 곳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던 이들이 그렇고 미카와치야마의 골짜기마다도 처지는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 중 거짓으로 배반한 신앙인들은 성모상의 모습의 관음상을 만들어 기도하고 죽을 때면 바닥에 십자가를 표시한 비문을 세워 신앙을 이었다. 선교사도 없이. 그렇게 이제 사백년이 흘렀다. 기도는 그것이 불교인지 신도인지 신흥인지 모를 정도로 일그러져 파편들을 주섬주섬 모아야만 그리스도교의 쪼가리를 찾을 수 있고, 팔작지붕과 도자기마다 새긴 고[高]자문양의 테두리들을 누군가가 말해줘야 적어도 조선인의 후예라는 것 정도를 겨우 알 정도로 희미해졌지만, 같은 민족을 만나면 가슴이 먼저서 뛴다. 오카와치야마 오름가마 한켠 집 마당에서 거실의 일연종 감실을 보다가 발견한 성모상. 무슨 사연이냐고 물으니, 오라버니가 나가사키로 가 아름다운 성모상을 만든다고 한다. 드디어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는 만난 민족의 후예들에게 형태도 피부도 마음도 곱다며, '예쁘다[키레이/綺麗/きれい]'를 연발한다. 고려[高麗]이니 기려[綺麗]겠지. 마치 스스로 자신을 거울 앞에서 보듯이.
나가사키의 얘기는 우리로서만이 아닌 주요인물로도 만주와 오버랩해서 볼 수 있다. 그 핵심적인 두 인물이 엔도슈사쿠와 나가이다카시 둘이다. 엔도슈사쿠는 대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안중근의 얘기도 신앙인의 얘기도 들었을 것이다. 나가이다카시 역시 만주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경신참변[간도학살]을 누구보다도 잘 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 둘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신앙을 접하면서였다. 엔도슈사쿠는 이모를 통해, 나가이다카시 연인을 통해. 그들에게는 주변의 인물들이 또 가쿠레기리스탄과의 인연으로 가득차 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점인 폭심지는 말 그대로 파괴의 현장이, 그리고 우라카미성당의 옛 종탑에서 당시의 상황이 그려지지만, 가장 인상깊게 와닿는 대목은 나가이다카시의 여기당[如己堂]이다. 말 그대로 '내몸깉이'라는 예수의 말에서 나온 나가이다카시의 집터이다. 그의 아내는 나가이미도리이다. 다카시[隆]가 미도리[緣]를 만났으니 이름에서조차 기막힌 만남과도 같아보인다. 하지만 원폭당시 피폭된 몸을 이끌고 겨겨우 집에 당도했을 때 아이들은 살았지만, 아내는 부엌에서 앙상한 뼈만 남긴 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손에 움켜쥔 녹아내린 묵주. 그 어떤 묵주보다도 인상적인 로사리오다. 가쿠레기리스탄의 후손인 미도리로서는 대를 이은 이 기구한 운명을 그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늘에 가서 따져물어도 하늘조차 뭐라 말하지 못할 지경의 고통의 연속. 조선인들도 그랬다. 조선인들은 더했다. 노예, 박해, 피난, 박해, 징용, 피폭, 천대 등으로 점철된 계속 이어지는 가련함은 아예 미래까지도 불투명한 불쌍함[MisérAble]이었다. 그런데 나가이다카시는 말한다. '용서[容恕]'. 쉽지 않은 이 단어. 피해자의 용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굴욕적인 패배가 아닌 거시적인 승리다.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의. 미도리도 하늘에 말했을 것이다. '제남편이 마침표를 찍었네요.'
다산은 용서[容恕]를 말하면서 동시에 추서[推恕]를 앞세운다. '자신의 돌아봄'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자의 설문해자로 본다면 새가 끊임없이 자신의 깃을 가다듬는 것과도 같다. 나가사키의 폭심지를 가건 여기당을 보건 우라카미 역시 가슴아픈 현장이다. 하나하나의 파편들마저 거룩함또한 되새겨진다. 하지만 조선인에게는 또다른 시선이 자리할 수 있다. 일제수탈과 내선일체와 경신참변과 관동학살과 강제징용을 겪은 우리로서는 '피해자코스프레'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한 바이다. 다카시와 미도리는 오랜 세월 긴긴 세대 내내 피해자로 머물렀다. 이들을 비롯한 우라카미의 기리스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미쓰비시는 다르다. 만일 미쓰비시가 은근슬쩍 피해자로 편승하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나가사키의노래"에서도 언급되듯 나가이다카시 역시 미쓰비시의 일곱 군수공장들이 이미 표적을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쌀수탈도 군함도도 나카사키 나오시마 등도 미쓰비시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미쓰비시가 인간에 대한 참회도 없고 자연에 대한 회심도 없이 오늘도 어딘지 모를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또 만일 그것이 일본의 민낯이라면 속좁게 '피해자코스프레'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로만 여겨졌던 내가 가해자였던 군상들을 본다면, 즉시 자신부터 살펴야 한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스위니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을 옳다고 봤다. 스스로 가톨릭 신앙인이며 자신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곳이 대대로 박해와 유배로 얼룩진 우라카미이며 많은 수가 가톨릭 신앙인인 것을 나중에라도 알아차렸음에도. 제대로 투하되는지를 보기 위한 체셔홈은 달랐다. 자신이 투하한 것이 아님에도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죽는 순간까지 뉘우치며 약자들을 위해 살아갔다. 추서[推恕]가 되면 용서[容恕]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니.
우라카미대성당의 성모. 폭심지와 여기당을 수없이 들른 이라면 우라카미대성당 조그마한 경당에 모셔진 피폭성모의 얼굴도 접하게 된다. 처음 입구에서의 성모가 십자가 아래에서의 비탄의 성모이면서 피폭당시 손가락들이 잘려나간 모습을 하고 있는 성모와 함께, 몸은 타버리고 검게 쾡한 눈을 한 무염시태[성모승천]의 성모를 만난다. 마치 실제 유해의 두개골을 보는 듯 섬뜩하면서도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피폭이 있던 열한시이분이면 어김없이 종은 울리고 거기에 온 순례자는 너나 할것 없이 기도에 잠긴다. 절로 나오는 기도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모셔진 성모 왼편에 또 하나의 성모 두상도 만난다. 오로지 가운데에만 집중하면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대성당 밖의 여러 피폭으로 파괴된 성상들 중 하나려니 생각하는 정도일텐데, 좀 더 깊이 알면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독일과 이태리 등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스페인 바스크의 게르니카. 거기 대성당에서 피폭된 성모의 두상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알면 알수록 동병상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오른편의 빈 공간. 균형잡히게 또다른 두상이 놓일 법도 하건만 빈 공간인 그곳이 오히려 여러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러한 동병상련의 성모도상은 여산에서도 찾아진다. 1959년 설립된 여산성당 제단 정면 중앙에 지금은 가려진 단이 있고, 새롭게 만든 벽면제단의 중심에 성모가 새롭게 도색된 모습으로 모셔져 있다. 그러한 도상이 십자가 아래 비탄의 성모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은데, 순교자모후로 명명된 성모의 출처와 비교가 몹시 궁금하다. 가장 비슷한 모습의 반다이크의 비탄의 성모도 손동작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라카미대성당 정문의 손가락 잘린 성모와 가장 유사한 것을 살필 수 있다. 여산과 일본과 스페인. 서로 다른 지역이지만, 학살의 현장에 담긴 성모의 동병상련의 상처가 시사하는 바는 관상에 들게 한다.
관상[ConTemplation]. 묵상[QuietTime]이나 명상[MediTation]과 달리 쓰이는 관상[ConTemplation]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뜻풀이로 보자면 성전[Temple]과 온전히 하나된[Com] 모습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시대[Temps]와 함께하는[Con]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관상수도회[봉쇄수도회]가 세상과 등진 곳에서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기본개념을 깨뜨리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뮌헨 다하우[Dachau]에 있는 수도회를 보면 바로 그렇다. 이차세계대전 수용소 가스실 옆에 있는 관상수도회는 그렇게 쉴새없이 기도를 한다. 지천을 떠도는 망자를 위로하듯. 일본의 이마리와 하코다테 등의 관상수도회는 왜란으로 끌려간 포로들과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위로하듯 그런 자리에 서 있다. 밀양과 익산의 관상수도회도 그러하다. 익산의 월성공소는 어쩌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흙벽에 나무판자를 덧댄 일본건축양식의 문화유산 가치가 높은 종교건축이다. 한편으로는 일본 나가사키 조계지 외곽 또랑 건너의 가난한 동네에 짓고 헐기 반복했다던 라우렌시오성당이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모습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일제수탈의 평야지대와 강제징용의 역사공간을 떠올리듯 기억과 회상의 자리로 거기 기도공간이 마련됐을지도 모른다. 그 바로 옆에 관상수도회인 글라라수녀원이 있다. 끊이멊이 이어지는 기도 안에 세상사가 담겨있다. 도자기마을과 징용탄광촌도 그렇게 부근에 관상수도회가 있다. 소화데레사가 선교사의 주보성인이듯, 그렇게 봉쇄는 세상과 맞닿아있다. 관상[觀想]은 바로 그런 의미의 바라봄[觀]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ProVience]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攝理] 바의.
미쓰비시[三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인 미쓰비시는 그만큼 아픈 기억에 갇혀있게 한다. 전주에 있던 동산동의 동산은 바로 그 미쓰비시의 창업주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었다. 농촌수탈은 가지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임자없다 싶은 땅과 간척사업 등의 땅을 차지하거나 가로채고서 소작을 붙였다. 반반도 과한데 거기에 기구와 세금도 더하면 칠팝십 정도를 가져갔다. 그러다가 거기에 저항한 이들이라도 생기면 그들에게는 또다른 방법이 있었다. 고리대금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면 징용을 유도해 탄광과 터널과 제강에 보냈다. 블랙리스트는 더욱 혹독하게 감시하에 막장으로 몰아갔다. 바로 그곳이 나가사키의 미쓰비시터널, 미쓰비시제강, 미쓰비시탄광[군함도] 등이다. 더러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무지 살아나왔다는 사람의 소식은 듣도보도 못했다. 해방이 되고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설령 돌아왔다고 해도 징용 때의 보상은 하나도 없었다.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는 일본 천주교 성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많은 성지순례는 거기까지이다. 하지만 조금 더 역사를 아는 이에게 그 골목에서 몇 걸음에 불과한 곳에 있는 인권평화자료관은 어쩌면 더 큰 의미로 와닿을 수 있다. 일본인 목사부부가 일본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모아놓은 수많은 사진들과 자료들이 어수선하게 있지만, 그 파편조각들을 조합하면 진상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충분한 까닭이다. 미쓰비시가 어떠했는지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제 버티기 힘에 부친 주인장은 가끔 찾는 한국인에게 더듬거리는 한국말을 하며 환하게 반기지만 누가 이을 것인가. 더러 아주 더러 찾는 일본인 청년들. 그들의 눈매가 매섭다. 몇몇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바톤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의 바램이자 희망이다. 그래야 적어도 인류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청할테니까. 미쓰비시도.
올리버스톤 감독의 영화 "구원자[Savior]"는 프랑스에 간 가톨릭 신앙인인 주인공이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에 의한 테러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적개심으로 무고한 아랍인을 죽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외인부대로 보스니아내전에 저격수로 참전한다. 세르비아난민들을 구하는 것이 목표. 그런데 중도에 보스니아인에게 강간당해 아기를 밴 여인을 만나고 우여곡절로 출산까지 돕는다. 아기엄마는 아기를 마땅해하지 않지만 함께 구출하기로 결심한 그는 그들을 데리고 난민들을 인계할 장소인 스플리트로 향한다. 하지만 가는 도중 크로아티아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에게 발각돼 대치되는 상황에 이른다. 저격수는 아기와 함께 오두막에 피했지만 세르비아 난민들과 함께 붙잡힌 여인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다. 아기들과 아이들이 울면 실제로 모두 죽였다는 전해오는 얘기들처럼, 오두막에서 아기가 칭얼대자 멀리서 아기엄마는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마땅치 않아했던 그 아기를 구하기 위해 저격수가 있는 오두막을 향해 '아기는 살려야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윽고 그녀는 쇠망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영화를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이를 'The Strength Of Courage[용기가진 힘]'라고 말한다. 앞선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A War[Power] Without Justice[정의없는 힘]'라고 하던 것과 비견하면서. 아기엄마가 부른 자장가는 마케도니아[발칸]의 민요 'NunnajNinaNena'이다. '자장자장자장' 정도일 것이다. 인종의 갈등과 종교의 갈등을 넘어선 엄마들의 언어이다. '평화평화평화[MirMirMir]'와도 같이. 아기와 함께 난민보호구역인 스플리트에 도착한 저격수는 아기를 인계하고 자신의 모든 무기를 버리고 상념에 잠기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아기요?" 하자, "그렇다."고 하며 다시 아기를 안아들고 영화는 마감한다.
영화를 좀 더 해석한다면 이렇다.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크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크게 박해를 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에 은퇴 후 별장황궁을 짓는다. 이후 베니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오지리/헝가리의 간섭하에 있기도 하고 오스만의 점령아래 있기도 했다. 곁의 슬로베니아와는 달리 언제나 변방이었던 크로아티아는 가톨릭과 정교도와 이슬람이 첨예하게 대립됐었다. 종교의 기본이념은 사라지고 인종과 민족과 종교는 갈등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는 가해자고 누구는 피해자인 지경이 아니라, 누구나 가해자고 누구나 피해자인 상황에 달했다. 영화는 그 복잡한 관계를 하나의 현상 안에 녹여내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지운 채 순례를 한다. 아니 그것을 애써 지우고 아전인수의 도구처럼 활용하기 위해 순례를 한다. 마치 '내 땅을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이웃과 다투는 것처럼. 성모발현의 메주고리예 역시 그런 식의 이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성모발현과 성모기적에 따른 성모순례는 영화 속 자장가와도 같다. 누구나 가해자인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누구나 피해자인 상황에서 타인을 위로하게 하는.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아기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듯, 평화를 오로지 평화를 심어주는 바로 거기에 방점이 찍혀있다. 사람들이 발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찬연하던 문화유산에 도취되고 매료되는 바에 야세노바츠 수용소를 한 꼭지 넣는 것이 찬물을 끼얹는 것일 수도 있다. 더러는 순례계획의 브리핑에 절대 그 얘기를 하면 탈락할 것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애써 상처를 후벼파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 이해할 때 자연이든 문화이건 바로 이해될 수 있고, 미래의 화약고를 지워나가며 지속적인 평화를 담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평화순례가 공지 하루만에 마감된 것이 희망인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