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노랑머리
올해 나의 나이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을 바라보고 있다.
요즘의 말로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얼굴이 무기가 될 나이는 아니고
톡톡 튀는 젊은이들 속에 서 있으면
그들보다 분명 이마의 잔주름만큼 인생을 더 겪은 나이이다.
나에게도 남자를 만나는 것이 미래를 보장 받을 것 같은 착각으로
보낸 시간도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하라면 소설보다도 더한 치장으로
지나온 날을 핑크빛 기억 속에 두고 싶어 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애시절의 남편의 생김은
좌우대칭 없이 규칙 없는 쌍곡선을 그리는 형태로
간혹 예측하기 힘든 행동으로 나를 자극하기도 하고
능청스런 유머로 엔돌핀 생성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의 남편은 하루가 25시간이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런 남편에게서 연애시절의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작년 이맘때였다.
자격증 공부한다고 며칠째 직원들을 대신해 숙직을 자청해서 하더니
늦은 아침 부시시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선 식사를 하고
여느때처럼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주고 바로 사무실로 출근을 하겠다더니
오전이 끝나기도 전에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으로 들어와선
다짜고짜 머리에 염색을 해달라며 재촉한다.
남편 성격상 외모를 가꾸는 것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닐뿐더러
남편의 머리에 대해 언급 하자면,
짙은 어둠 속 별 하나 구경하기 힘든 밤하늘보다도 까맣고,
아주 고집스러워 보이는 굵은 모발에,
머리를 위로 세우자면 못해도 20센티까지는 일자로
하늘을 우르럴수 있는 모발이다.
그기에 염색 한번 해보지 못한 머리이니 선뜩 해주겠다 이야기하기에
자신이 없었다.
미용실에 머리를 맡기면 편한일인데 경제원칙 따져가며
나에게 염색해 주기를 종용한다.
사실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자면 못해도 3만원은 족히 줘야 하니
집에서 하는 것이 경제적 부담이 적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편은 경제적이니 하는 것 보다 미용실에 앉아 염색하는 그 자체를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이유가 더 큰 것이다.
평소 내 머리는 염색을 해봤지만
그것 믿고 남편머리에 염색을 할 것은 못될 듯한데
굳이 남편은 염색을 하겠다고 나서니
난감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일단 염색해 주기로 결정을 하고나니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머리색깔이 문제였다.
평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사회니 하며 너스레를 떠는 남편인지라
원하는 색깔을 물었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 나왔다.
남편은 이왕에 염색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요즘 학생들에게 유행되는 노랑머리로 하겠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황금색으로 말이다.
염색약을 덕지덕지 바르고 머리에 비닐을 덮어쓰고
한시간이 지나 염색이 끝이 났고 남편은 이렇다할 이야기 없이 출근을 했다.
사무실 바로 들어갔으면 분명 전화가 올 법도 한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
여유를 가지고 출근을 했으니 평소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분명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갈색 염색약을 준비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그리곤 남편 머리 자체를 잊어버린 채 하루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배가 고프다며 급히 들어온 남편이 하는 말이
“원이엄마 검은색 염색약 있냐? 하는 것이다.
남편은 염색 후에 요즘 유행하는 머리색도 되었으니
새 마음 새 기분으로 친구도 만나고, 선배도 만나고, 사무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모두의 시선이 머리를 향하면 일제히 하는 말이
“너답다” 한마디 하더라는 것이다.
하기야 남편이 공직에 있다지만
간혹 일반인들 상상하기 힘든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내니
직원들의 반응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밤새 거울에 비친 자기 머리 보며 히죽거리더니
며칠만 버티기로 나간다며 허풍을 뜬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침마다 머리감고 드라이기로 머리 매만지고
출근을 서두른다.
남편은 그럴 것이다.
요즘처럼 여기저기서 받는 스트레스며, 조기퇴직이며, 경기불황으로
힘든 직장 생활에 해소시키고 싶은 돌파구의 하나로 머리염색을 택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하는 경쟁구조속에
힘들고 메마른 이 시대를 겪는 남편들의 회색빛 지친 마음에
간절한 희망의 색이 물들길 바라는 마음이다.
남편의 지쳐가는 마음에 밝혀두고 싶은 간절한 등불이 희망이며
소망하는 것이
안정된 현실인 것을 알고 있다.
남편의 조그만 반란으로 조금의 활력이나마 찾을 수 있다면
노랑머리가 아니라 빨강머리라도 염색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변화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남편은 노랑머리.
그를 사랑한다.
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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