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마다 절경이나 별미를 선정하여 홍보한다. 마산에선 9경 5미가 있다. 마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아구찜, 전어회, 복요리, 미더덕, 국화주 등 다섯이 꼽힌다. 바닷가 도시 특성답게 해산물이 네 가지를 차지했다. 아구찜이나 복요리는 연중 맛을 볼 수 있으나 전어와 미더덕은 철이 있다. 전어는 가을이 제철이고 미더덕은 봄이 제철이다. 국화주는 재료가 국화꽃이지 연중 맛볼 수 있다.
미더덕 양식을 많이 하는 곳이 진동만이다. 나는 평소 다녀 볼 기회가 적었던 진동으로 나가 보았다. 마산에서 진동 가다보면 국도 왼쪽 편 교동 마을에 마산 유림의 본산인 마산향교가 있다. 본래 진해향교로 출발해 임진왜란 때 불탔고 일제강점기 때 폐지되었다가 현대에 와서 복원했다. 진동 진북 진전의 삼진만세운동은 기미년 지방 4대 의거로 여덟 명이 순국하고 스물두 명이 부상했다.
광암 해안은 규모가 제법 되는 어항이었다. 포구에 묶어둔 어선들도 여러 척이었다. 다도해 연안이라 섬들로 가려진 바다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양식장에서 일찍 거둔 미더덕은 아침 이른 시각 경매가 끝나 수협 공판장이 텅 비어 있었다. 바로 곁의 해수욕장은 수년 전부터 폐장한다는 공고문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수질오염이라기에 마음이 씁쓸했다. 어떡하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광암 갯가 따라 가니 해양경찰에서 운영하는 조종면허시험장이 나왔다. 동력수상레저기구를 운행하려는 사람을 위한 면허제도인 모양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찻길에서 외진 주도 마을이 나왔다. 마을 앞에 있는 작은 섬이 주도였다. 그림 같은 갯마을엔 횟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마을 뒤엔 추계 추씨 선영과 수월재 재실이 잘 꾸며져 있었다. 진동에선 알려진 집안이었다.
주도 마을 들물 횟집부터는 길이 끝이었다. 야산 소나무 숲을 헤집고 올라가 차가 다니는 길을 겨우 만났다. 산불감시원에게 물었더니 계속 가면 구산면 수정이 나온다고 했다. 저 멀리 아스라이 저도연육교가 보였다. 고개를 내려서니 다구 마을이었다. 방풍림만 없을 뿐이지 남해 물건 마을 같았다. 대신 마을 가운데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마침 순환버스가 지나도 타지 않았다.
다구 마을에 이어 배나무골 찻길 가에 제말 장군 무덤이 나왔다. 아래는 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안내문이 있었다. 제말 장군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처럼 영남 내륙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고성 출신 의병장이었다. 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성주목사를 제수 받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조카 홍록은 정유재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숙질간 충절의 본이었다.
배나무골 모롱이 돌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도만 마을이었다. 도만에서도 미더덕을 많이 생산하는 모양이었다. 연안 앞 바다엔 점점이 하얀 양식부표들이 떠 있었다. 도만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서 모롱이를 돌자 구산면이 시작되었다. 여태 내가 거쳐 온 마을은 진동면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은 구산면이었다. 구산면 첫 마을 마전에 구산초등학교 구서분교장이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채 있었다.
마전 마을에서 계속 걸으니 군령 삼거리가 나왔다. 왼쪽으로 난 고갯길을 오르면 유산과 수정이 나오지 싶었다. 나는 해안선 따라 걸었다. 명주 마을을 얼마 앞둔 갯가에 할머니 한 분이 굴을 까고 있었다. 바로 아래 갯바위에 붙어 절로 자라는 굴을 딴 것이었다. 내가 “할머니!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 건네자 할머니는 “이거 한 번 잡숴 봐요.”하면서 금방 깐 굴을 낯선 길손에게 건네주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도 할머니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건네주는 굴을 받아 입안에 넣었더니 사르르 녹았다. 인정과 함께 간간하고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하나 더 먹으라고 또 까주었다. 나는 비위 좋게도 덥석 받아먹고 그냥 떠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어시장까지 나가 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할머니 앞에 까놓은 굴 모두 얼마치예요.”라고 묻자 “만원만 줘요.” 했다. 09.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