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포 이경선(藍浦 李慶善)
李慶善(1600年 宣祖 33年~1636年 仁祖 14年)은 朝鮮 中期의 忠臣으로, 本貫은 慶州, 初名은 慶徵, 字는 君善, 號는 藍浦이다.
禮曹佐郞을 歷任하고 承政院都承旨에 贈職된 再思堂 李黿의 後孫으로, 高祖는 丞旨에 贈職된 李渤이며 曾祖는 判書에 贈職된 李憬胤이고 할아버지는 進士를 歷任하고 左贊成에 贈職된 梧村 李大忠簡公 楸灘 吳允謙建이며, 아버지는 刑曹判書를 歷任하고 左贊成에 贈職된 忠翼公 碧梧 李時發이며, 어머니는 栗谷의 同生으로 軍資監正을 歷任한 玉山 李瑀의 딸 德水李氏이며, 夫人은 領議政을 歷任한 忠簡公 楸灘 吳允謙의 딸 海州吳氏이다.
1624年(仁祖 2年) 司馬試에 合格하여 進士가 되고, 蔭職으로 校書館正字를 지냈다. 1633年(仁祖 11) 癸酉式年謗 33人中 10等으로 文科에 及第하여, 司果. 校理. 禮曹佐郞-正六品). 成均館 典籍-正六品)을 歷任한 後, 1636年(仁祖 14年) 1月에 藍浦縣監(從六品) 兼 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로 轉任되고, 그해 12月 丙子胡亂이 勃發하였다.
이에 仁祖가 南漢山城으로 蒙塵(몽진)해 있을 時, 忠淸監司 鄭世䂓가 이끄는 王의 勤王兵 參謀官으로 京畿道 廣州 險川峴 戰鬪(只今의 京畿道 龍仁市 水枝區 東川洞 竹田休憩所)에 出戰 淸나라 太宗 皇太極(弘他時, 홍타이지)의 妹夫인 舒穆禄 揚古利(슈무루 양굴리)의 12萬大軍과 最後의 一刻까지 壯烈히 싸우다 殉節하니, 享年 36歲였다.
이듬해인 1637年(仁祖 15) 5月 26日 通政大夫 禮曹參議(正三品)에 贈職되고, 1730年(英祖 6年) 11月에 王命으로 後孫들이 世居하는 龍仁 貢稅谷 洞口인 只今의 京畿道 龍仁市 器興區 貢稅洞 마을 入口에 忠臣旌閭가 내려졌다.
本來의 旌閭門은 日帝強占期 日本이 우리나라의 精神文化 抹殺政策에 依據, 消失되고 없던 것을 2005년 11월 忠淸北道 鎭川郡 鎭川邑 山尺里 山22-18番地 산직마을 李慶善의 墓所 아래, 兩面지붕에 丹靑을 하고 兩 側面에 防風板을 設置한 새로운 旌閭閣을 建立하고 懸板은 12代孫인 李在薰이 原販을 拓本하여, 天然記念木인 厚朴나무로 이음매 없이 旌閭門을 復元 製作하여 設置했다.
2017년 9월 21일
忠北 遺跡地 踏査
정발산 터줏대감